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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아쉬에서는 흙으로 꽃을 빚었습니다. 빨간 도자꽃과 흰눈의 어울림이 눈 속에 피어난 동백꽃 같습니다.
 갤러리 아쉬에서는 흙으로 꽃을 빚었습니다. 빨간 도자꽃과 흰눈의 어울림이 눈 속에 피어난 동백꽃 같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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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20일 아침, 문을 열자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습니다. 밤새 도둑눈이 내린 것입니다. 

마을의 자랑스럽고 부끄러운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덮어버릴 정도의 잣눈은 올해 들어 두 번째였습니다. 

하루가 지나도 헤이리의 눈 덮인 겨울 서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녘에 이웃의 몇 분과 눈을 밟고 나가 바지락 칼국수로 저녁식사를 대신했습니다. 뜨끈한 칼국수를 먹으면서 '시원하다!'라는 영탄을 연발했습니다. 바지락에 황태까지 넣어서 상쾌하고 개운한 맛을 높였습니다.

눈을 머금은 잔나무가지는 아직도 느티나무 낙엽 한장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한겨울을 지내는 방법 하나는 지난 가을을 추억하는 것임을 잣나무도 아는지...
 눈을 머금은 잔나무가지는 아직도 느티나무 낙엽 한장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한겨울을 지내는 방법 하나는 지난 가을을 추억하는 것임을 잣나무도 아는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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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겨울의 밤마실에 수다가 빠질 수 없지요.

"어제 쓰레기 수거일에 음식쓰레기를 내두었더니 까치 한마리가 왔다가 잔반을 맛보고 사라졌어요. 조금 있으니 10여 마리의 까치가 몰려와서 함께 그 잔반으로 만찬을 즐기는 거예요. 필시 그 까치 한마리가 동료들을 불러들인 것 같아요."

한분이 어제 아침에 집 앞에서 관찰한 까치 무리에 대해 말했습니다.

"까치가 먹이를 나누기위해 동료를 청하는 습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녹명(鹿鳴)'입니다. 시경에 나오는 이 '녹명'은 '사슴의 울음소리'라는 뜻으로 사슴이 먹이를 발견하면 '우우'하는 울음을 내어 동료들을 불러서 함께 먹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까치에게도 이 녹명의 나눔과 공생의 습성을 가졌는지 저도 유심히 관찰해보아야겠군요."

저는 '유유녹명(呦呦鹿鳴)'이라는 사슴의 아름다운 울음에 대해 말을 보탰습니다.

다른 이웃이 고양이 이야기로 뒤를 이었습니다.

"어제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길고양이에게 몇 번 먹이를 주었데요. 그런데 어느날 집밖을 보니 죽은 쥐가 있더라는 거예요. 기급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 길고양이의 소행이었다는 겁니다. 저도 시베리안 허스키를 오랫동안 키우고 있는데 몇 해 전에 쥐를 잡아서 집안에 물어다 놓는 통에 혼이 난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고양이의 이런 행동이 잘해주는 주인에게 은혜를 갚는 행동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친구에게도 제 경우를 얘기해주었지요."

작은 빈 화분은 흰눈을 고봉으로 담았습니다. 어머니가 공기에 밥을 퍼든 그 넉넉한 모습으로...
 작은 빈 화분은 흰눈을 고봉으로 담았습니다. 어머니가 공기에 밥을 퍼든 그 넉넉한 모습으로...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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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렇게 나누고 보은하는 얘기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화가 이웃이 이런 일도 있었다며 말했습니다.

"그제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집을 나와 혼자 지내고 있다는 거예요. 평소 술 좋아하고 독단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사람 좋은 친구였거든요. 법적으로 이혼을 한 것은 아닌듯한데 아무튼 집에서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친구 중에는 혼자 허름한 작업실에서 지내는 친구도 있어요. 젊은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나이를 먹고도 성과가 없자 가장 노릇을 기대할 수 없는 그 친구를 가족에서 떼어버린 겁니다. 나이를 먹으니 암담해진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나요. 남자들이 홀로 되면 참 비참해지는데……."

다리위에 흰 융단처럼 깔린 이 숫눈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아 부러 돌아서 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위에 흰 융단처럼 깔린 이 숫눈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아 부러 돌아서 다리를 건넜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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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픈 얘기를 또 다른 이웃이 몇 년 전에 죽을 고비를 넘긴 남편얘기로 받았습니다.

"남편이 몇 년 전에 화목난로의 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잖아요. 건강이 회복되고 나서는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평소 성미가 꼬장꼬장한 탓에 본인도 가족도 힘이 들었는데 그 후로는 빳빳한 풀기가 완전히 빠진 모습이랄까……. 사업에서도, 대인관계에서도 상황에 순응하고 만족하는 모습이세요. 그래서 가족들도 많이 수월해졌어요. 남편도 저도 훨씬 행복해졌고요."

독거하는 친구얘기를 했던 이웃이 다시 그 말끝을 이었습니다.

"암이 좋은 점도 있더라고요. 요즘은 암의 발병도 많아지고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율도 많이 높아졌잖아요. 그런데 암선고를 받았다가 나은 사람들은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어요. 하루하루를 은혜로 생각하고 봉사하고 감사하는 삶으로……."

제가 오늘 받은 동창회의 밴드 글을 소개했습니다.

"요즘은 동기들의 모임도 '밴드'에 개설하곤 하잖아요. 그 전에는 동기회 소식에 자녀들의 결혼 소식이나 부친상과 모친상이 많이 올랐는데 최근에는 '동기 본인상'이 잦아졌어요. 오늘도 한 동기의 본인상이 올랐어요. 철들자 세상을 뜨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텐데 말이에요."

#4

창밖은 어둠속에서도 흰빛인 눈 속이지만 우리는 봄 얘기로 마실을 마쳤습니다. 

함께한 작가가 다가오는 설날에 한 유통회사로부터 立春帖(입춘첩)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立春大吉 建陽多慶'대신 한글로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곧 당도할 봄을 상상하며 한 가지씩 한문을 대신할 우리말 입춘첩을 말했습니다.

이 미루나무는 이태전 태풍에 우듬지 부분이 부러졌지만 다시 가지를 내어 시원한 미루나무 고유의 수형을 회복했습니다.
 이 미루나무는 이태전 태풍에 우듬지 부분이 부러졌지만 다시 가지를 내어 시원한 미루나무 고유의 수형을 회복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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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희망이 돋다"
"봄, 햇살, 새순"
"새봄, 새출발"
"봄봄봄, 봄이 왔어요"

올해의 입춘은 설날 연휴가 끝난 이틀 뒤인 2월 4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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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motif.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헤이리,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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