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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에서 5층 건물 옥상에 가건물을 설치하고 농성중인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살수차로 물을 뿌리고, 경찰특공대를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에 실어 고공투입 시키는 등 진압작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에서 5층 건물 옥상에 가건물을 설치하고 농성중인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살수차로 물을 뿌리고, 경찰특공대를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에 실어 고공투입 시키는 등 진압작전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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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은 절기로 대한(大寒)이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왔다가 죽었다는 옛 얘기도 있지만, 대한은 늘 춥다. 2009년 1월 20일도 대한 추위가 몰려왔던 날이었다. 그 추위에 용산 남일당에서 망루를 짓고 초조하게 밤을 지새운 3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 이들과 연대하러 왔던 다른 지역의 철거민들이었다. 다른 지역의 철거민들은 망루 짓는 일을 도와주고는 빠지려 했으나 용역과 경찰이 건물 아래를 지키고 있어서 빠져나가지를 못했다.

세상이 모두 얼어붙었던 그 날, 새벽부터 망루를 향해 경찰은 용역과 함께 물포를 쏘아댔다. 그리고 크레인으로 컨테이너 박스를 올려서 경찰특공대를 투입했고, 건물 아래에서부터도 공격해 들어갔다. 방송으로는 투항하라고 말했지만 경찰은 확실하게 조기 진압하겠다고 벼르고 달려들었다.

철거민들은 그때 사람이 아니었고, 국민이 아닌 섬멸되어야 할 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망루를 짓고 올라간 다음에 단 한 번의 협상도 없이, 즉 철거민들이 그 추운 한겨울 망루를 짓고 올라가 농성을 하는 이유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채 진압을 서둘렀다. 진압장비도, 안전대책도 미비했으며, 경찰특공대는 건물의 구조도 모르고, 철거민들이 어떤 위험물질들을 구비했는지도 파악하지 않은 채 무모한 진압에 나섰다.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경찰특공대가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서 농성중인 철거민들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철거민들이 들어가 저항하고 있는 가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다.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경찰특공대가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서 농성중인 철거민들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철거민들이 들어가 저항하고 있는 가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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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불길이 치솟았다. 오전 7시 5분께 발생했던 1차 화재를 통해 언제고 화재가 일어날 수 있었음을 인지했을 터인데도, 안전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성급하게 신속한 진압을 재촉했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진압을 독려하는 목소리들이 로봇처럼 움직이는 특공대를 다시 망루 속으로 밀어 넣었고, 급기야 7시 20분께 2차 화재가 발생했고, 그 불길 위에 물포를 쏘아댔지만 불길은 커져만 갔다.

가까스로 탈출한 철거민들은 최루액에 절은 옷을 입고 감옥으로 병원으로 갔다. 난간에 매달렸다가 구조를 받지 못한 지아무개씨는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 허리와 다리뼈가 산산 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 생사를 확인 못한 아내들의 통곡을 뒤로 하고 주검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실려 갔다. 급히 만들어진 검찰의 특별수사본부장은 정병두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가 맡았다. 그는 현장에 와서 곧바로 부검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아직 신원도 확인 못했는데도 말이다.

유가족들이 남편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데도 몰래 모든 관행을 깨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시신을 옮겨 부검을 하고 말았다.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는 말은 사망자들의 유류품에서 나온 신분증 등으로 보아서, 그리고 지문으로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거짓임이 드러났다. 철거민이 5명이 죽었고, 경찰관 1명이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었다.

지독히도 추웠던 5년 전의 그 날

그리고 5년이 지났다.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채 감옥에서 4년을 지냈던 철거민들이 지난해 1월 30일 특사로 풀려났다. 전철연 의장 남경남씨는 거기서도 제외되었다.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5년의 세월은 용산참사를 잊히지 않기 위해 용산의 유가족들이나 관련자들이 몸부림쳤던 세월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대형사고가 터지는 한국 사회에서 용산참사와 같은 큰 사고도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2011년에는 영화 <두 개의 문>이 전국의 극장에 걸렸다. 다큐로서는 드물게 7만 명 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고, 공동체 상영을 통해서 본 이들도 우리의 주장에 공감해 주었다.

2012년에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과 강정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SKY ACT'를 결성했다. 그리고 전국을 돌면서 내몰리고 쫓겨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생명평화대행진을 했다. 자본과 국가가 합세한 폭력은 전국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 저지투쟁을 하는 할매들을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용산의 눈물이 쌍용차 노동자들의 눈물이었고, 강정의 눈물이었고, 밀양의 눈물로 이어졌다. 용산에서 사람을 죽인 그 자본이, 그 권력이 결국은 전국에서 민중들을 죽이고 있음을 확인해갔고, 연대는 더욱 강고해졌다.

남일당 건물은 헐렸고, 그 터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그 주변의 건물들이 철거된 자리는 폐허로 변했다. 5주기 추모대회를 위해 방문했던 사람들은 거기 펜스에 이렇게 썼다. "고작 주차장으로 쓰려고 서둘러 진압하다 사람을 죽였냐!" 그리고 이렇게도 썼다. "용산참사의 진실이 규명되는 때 이 땅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용산참사는 세월을 풍화작용을 이기고 잊히지 않았다.

용산은 기억의 풍화를 이겨냈다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남일당 터에서 열린 '용산참사 5주기 추모집회'가 열린 가운데, 한 참가자가 헌화한 국화 뒤로 고층 빌딩이 보이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남일당 터에서 열린 '용산참사 5주기 추모집회'가 열린 가운데, 한 참가자가 헌화한 국화 뒤로 고층 빌딩이 보이고 있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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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는 용산참사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고도 그 사건으로부터 제대로 교훈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국가폭력에 제대로 저항해 국가폭력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공권력을 통제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더더욱 정치적으로 종속되었고, 사법부마저 정치화되어 버렸다. 가진 자들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복무하는 정부와 입법부의 존재는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암담한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용산이 극적으로 폭로했던 이윤 추구, 경쟁 추구의 사회 시스템이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더더욱 사람이 살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살률 1위는 그냥 1위가 아니라 OECD 평균의 3배가 되는 비정상적인 사회임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인간 존엄성을 추구하기는커녕 인권의 자존감을 깡그리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이명박 정권 때보다 더더욱 후퇴된 한심한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용산참사를 해결하는 길보다는 '용산학살'을 계승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을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했고, 이제 곧 정병두 검사가 대법관으로 임명될 수 있는 상황을 맞고 있다. 국민대통합이니 경제민주화이니 사회복지국가이니 하는 말들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 공학적 수사였음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제 용산참사와 같은 자본폭력, 국가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절박한 대결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미 관권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촛불이 7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철도파업으로 국민들의 민영화에 대한 저항이 높아졌고,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한 민주노총의 파업이 국민총파업으로 조직되고 있다. 아마도 심각한 대결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야당세력과 진보정치세력이 지리멸렬하지만 국민적 저항의 연대감은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고 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갑오년에 새삼 다시 들어야 할 깃발

마침 올해는 갑오년이다. 120년 전의 민초들은 조선왕조의 폭정에 항거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사람이 하늘이다'는 동학의 교리는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용산참사 때 우리는 "여기, 사람이 있다"는 구호를 들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파업 내내 "함께 살자!"고 외쳤다.

갑오년 올해, 우리는 120년 전 폭정에 항거한 민초들처럼 다시 '제폭구민'의 깃발을 다시 들어야 할지 모른다. 폭정에 고통 받는 민중들의 저항의 역사가 갑오년에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갈 것인가. 용산참사 5주기인 올해, 더더욱 "여기, 사람이 있다"는 말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박래군 기자는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이자 인권중심 사람 소장입니다.



태그:#용산참사, #5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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