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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어랑 비행장을 떠난 비행기는 동해를 왼쪽에 끼고 나래를 편다.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우리의 비행기가 '김책시'를 지나고 있다"고 안내방송을 한다. "평양에 있는 '김책공대'의 그 '김책'과 같은 말이냐"고 승무원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남한에도 독립지사를 기리는 도시가 있다면

우측 상단 빨간 네모 안의 도시가 김책시다.
 우측 상단 빨간 네모 안의 도시가 김책시다.
ⓒ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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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가 예전에는 분명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이 도시의 옛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남편은 "혹시 '성진'이 아닌가 싶다"고 답한다. 옛날 중학교 지리 시간에 지도책에서 본 기억이 난단다. 청진 바로 밑에 성진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는데 그 도시 같다고 남편이 말한다.

'김책시'. 옛 소련식으로 말하자면 '레닌그라드'(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라고 하듯 '김책그라드' 정도 되겠다.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도시와 대학의 명칭에 이 사람의 이름이 쓰였을까. 이곳에서 '혁명의 불길'이라도 불타올랐을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설향이에게 물었다.

김책의 아들 김국태
김책의 아들인 김국태 노동당 검열위원장은 2013년 12월 13일 사망했다. 이 여행기는 2013년 8월, 9월에 북한에 방문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때는 김국태가 살아 있었다.

김국태가 죽은 시기는 '장성택 숙청' 이후였다. 당시 남한 언론들은 김국태의 장례 때 누가 장의위원에 이름을 올렸는지에 대해 관심을 쏟기도 했다.
"김책이란 분은 어떤 분이셔?"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신 분입니다. 왜놈들에게 잡혀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지만 만주에서 끝까지 항일투쟁을 하신 분입니다. 여기가 그분의 고향이지요. 해방된 조국에서 별로 살아보시지도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김국태라고 하는데 아직 살아계십니다."

아, 항일독립군이었구나. '해방된 조국에서 별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는 설향이의 말에 가슴이 아파진다. 얼마나 그리워했을 '해방 조국'이었을까. 남한에도 항일 독립지사의 이름을 딴 도시가 하나쯤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중근시, 김구시, 윤봉길시처럼 말이다. 그분들의 고향이 어디든 간에...

'마그네사이트' 때문에 부부싸움을...

마그네사이트. 이 광물 때문에 남편과 싸웠다.
 마그네사이트. 이 광물 때문에 남편과 싸웠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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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북한의 도시에 관심이 있다고 느꼈는지 설향이가 계속 말을 이어간다. 곧 단천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마그네사이트 광산이 있다며 매장량이 엄청나단다. 내가 설향이에게 "마그네사이트가 뭐하는 광물이냐"고 묻자 남편이 끼어들면서 대화는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아휴, 창피해, 아니 당신은 대체 마그네사이트가 뭐에다 쓰는 건지도 몰라? 어릴 때 리틀앤젤스인지 리틀데블스인지, 학교는 안 가고 매일 세계일주나 하면서 가무나 하고 다녔으니 모를 법도 하지. 쯧쯧..."

남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열도 바짝 오르기 시작한다. 그동안 '꼴통'이란 소리를 지긋지긋하게 듣고 살았는데, 어린 설향이 앞에서 아이 나무라듯 망신을 주니 말이다.

"그래, 당신은 뭐가 그렇게 아는 게 많아요? 말해 봐요. 골프하고 낚시 빼곤 아무것도 모르면서. 서울 가서 지나가는 아줌마들 붙잡고 물어보세요. 마그네사이트가 뭐하는 데 쓰이는 건지 아는 사람이 있나."

말을 해놓고 보니, 혹시 나만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은근히 걱정도 된다. 우리 부부의 날이 선 말이 오가자 이를 보다 못한 설향이가 내 편을 들어주며 보기 좋게 결론을 내린다.

"오마니, 멀리 서울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평양에도 그거 모르는 아주머니들 꽤 많습니다."

'멀리 서울까지 갈 것도 없다'는 말에 남편이 투항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내가 남편을 망신 줄 심산으로 의기양양하게 설향이에게 물었다.

"얘, 설향아, 너 혹시 김책시의 옛 이름을 아니? 아까, 저 잘난 척하면서 아바이가 김책시의 옛 이름이 성진인가 뭔가 그랬거든!"

설향이가 불편해하며 머뭇머뭇한다. 내가 다그쳐 물었다.

"성진 아니지? 저 아바이가 틀렸지?"
"저... 기런데... 기게..."
"빨리 말해, '기게' 뭔지."
"성진 맞습니다."
"..."

와, 속된 말로 돌아 버리겠다. 어쩌다 하나 맞힌 게 하필이면 이때라니. 남편이 엄청 고소해 한다. 북한에는 지하자원이 다양하다는데 그 가짓수만큼이나 부부싸움을 많이 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언젠가 북한은 축복으로 다가온다

곧 북청과 신포를 지나 함흥 선덕비행장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북청은 내게도 익숙한 도시다. 유명한 성악가이신 한 스승님의 고향도 북청이다. 실향민들이 다 그렇듯, 그 스승님 역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목소리에 담아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우리 부부가 자주 가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회냉면집이 있다. 우리는 그 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40마일을 달려간다. 돌아올 때는 고속도로에 차가 꽉 막혀 두세 시간 정도 걸리기도 한다. 냉면 한 그릇을 위해 하루를 길바닥 위에서 보내는 셈이다. 로스앤젤레스의 그 냉면집 주인도 고향이 북청이다. 남한에 무일푼으로 내려와 미국에 자리 잡은, 생활력이 무척 강한 분이다.

설향이에게 "'북청 사람들은 물장사로 아이들 대학까지 보낸다'는 말이 있다"고 하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함경도 사람들은 대체로 경쟁심이 강하며 부지런하다고. 설향이는 "생활력은 국숫발만큼이나 질기다"며 한마디 더 보탠다.

남편이 맥주를 마시자 설향이가 살을 발라 찢어놓은 '탈피'(말린 명태)를 손가방에서 꺼내 남편에게 건넨다. 이를 본 내가 설향이에게 말했다.

"설향아, 냄새나게 왜 탈피를 핸드백 속에 넣고 다녀? 그것도 꽃같이 예쁜 숙녀 핸드백 속에다가..."
"아바지께서 맥주를 자주 드시니 안주 하시라고 넣어 놓았습니다."

참으로 고운 마음씨다. 부인인 나도 남편 술안주 하라고 냄새나는 북어를 핸드백에 넣고 다니지는 않을 텐데. 설향이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더니 말을 잇는다.

"지금쯤 아마 신포를 지날 텐데 이 '탈피'도 이곳에서 온 것일 겁니다. 신포 앞바다에 마양도라는 섬이 있는데 명태철이 오면 섬 근처 바다가 명태로 깔려 있답니다."

이 말을 들으니 2012년 5월에 갔었던 라진-선봉이 떠오른다. 바닷가 아주 가까운 해변에서 숭어·문어 등 온갖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북한의 해안에는 해산물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어선이 작은데다가 어구도 낡아 보이니 말이다.

농수산업·광업·건설업·경공업·중공업 등 전 산업에 걸쳐 남북경제협력이 절실하다. 그 협력 속에 남한의 인공위성을 북한의 로켓에 실어 올리는 일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남과 북의 경제 교류가 대규모로 이뤄진다면, 북한은 남한에 있어 '골칫거리'가 아닌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눈물로 안녕... 독일어 안내원 오수련

함흥 선덕비행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독일어 안내원 오수련.
 함흥 선덕비행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독일어 안내원 오수련.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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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분도 채 안 돼 함흥 선덕 비행장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온다. 함흥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옆에 붙어 있다는 흥남에 대해서는 두세 가지 아는 게 있지만, 함흥은... 그저 '함흥냉면'밖에 아는 게 없다.

비행기가 멈춘다. 창을 통해 바라보니 낯익은 차 그리고 두 남성이 활주로까지 들어와 기다리고 있다. 아! 안내원 영길 아우와 운전기사 철남 아우다. 평양서부터 차를 가지고 와 함흥에서 만나다니! 헤어진 지 사흘 만이다. 트랩을 걸어 내려가니 영길 아우가 "형, 누나"하며 소리쳐 우리를 부른다. 이젠 남편을 아예 '님'자도 빼고 그냥 '형'이라고 부른다. 참 정겨운 사람이다.

"누나, 천지는 봤시요?"
"응, 봤어. 정말 감동적이었어."
"아, 다행이네. 난 혹시라도 구름에 가려 못 봤으면 어케하나 걱정했시요. 천지의 날씨가 하도 변화무쌍해서시리."

우리가 지난 사흘간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독일어 안내원 오수련이 눈물을 글썽이며 작별인사를 고한다.

"고모, 고모는 마전으로 가시지요? 제가 모시는 손님은 마전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곧바로 원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가요. 평양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항상 건강하시고 조국에 자주 오시라요."
"그래, 수련이도 잘 있어. 애 잘 키우고. 그리고 통일이 되어 아버님께서 고향에 가실 수 있게 어머님께 기도 많이 하시라고 전해드려."

보통 이산가족이라 하면 북의 가족과 헤어져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오수련을 통해 알았다. 수련이 아버님의 고향은 전라북도 군산이다. 한국전쟁 당시 수련이의 아버님은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평양에 정착해 살게됐다고. 수련이는 내가 남쪽 출신의 해외동포라서 꼭 아버지의 친척을 만나는 기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고모'라고 부르는 것이다.

2012년 5월 평양 봉수교회에서 찬양을 하는 내 모습.
 2012년 5월 평양 봉수교회에서 찬양을 하는 내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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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이 어머니는 원래 평양 사람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지금은 평양 봉수교회 신도라고 한다. 내가 2012년 5월 봉수교회에서 찬양을 했으니, 만약 그날 예배에 참석하셨다면 나를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수련이의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그리고 통일이 돼 수련이의 아버님께서 꿈에 그리던 고향 군산을 방문하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수련이와 헤어지려니 나 또한 눈물을 떨구게 된다. 수련이 아버님의 고향이 남쪽이라는 사실이 이별의 슬픔을 더 깊게 만든다. 어쩌면 그녀의 진짜 고모가 남한 어디엔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허무한 '나의 조국'

어둠이 깔린 마전 해수욕장에서 안내원 영길아우와 함께.
 어둠이 깔린 마전 해수욕장에서 안내원 영길아우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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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영길 아우가 우리 일정을 알려준다. 오늘은 마전해수욕장에서 하루 묵고, 내일 오전 흥남과 함흥 관광을 한 뒤 평양으로 돌아갈 예정이란다.

우리가 마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석양이 비치는 해변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방에 짐을 던져놓고 서둘러 해변으로 향한다. 부지런한 철남 아우가 어느새 장작불을 지피고 있다. 곧 조개구이를 한다고. 이곳에서 조개구이를 안주 삼아 한잔씩 하고 식사를 하러 가잔다.

드디어 불 위에 조개를 올려놓는다. 우리가 맛볼 조개는 '섭조개'라고 불리는 조개인데, 내 눈에는 대형 홍합처럼 보인다. 거의 손바닥 크기다. 조개가 점차 익어가자 입을 '쩍' 벌리며 뽀얀 국물을 흘린다. 철남 아우가 "이 국물을 먹어야 섭조개의 참맛을 아는 것"이라며 조개를 맨손으로 집어 든다. 그리고 잠시 식히더니 내게 건넨다.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뭐라 형용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다.

섭조개를 굽고 있는 운전기사 철남아우(왼쪽부터 나, 설향이, 철남아우)
 섭조개를 굽고 있는 운전기사 철남아우(왼쪽부터 나, 설향이, 철남아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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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워지고 있는 섭조개
 구워지고 있는 섭조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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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신 감탄을 하며 먹고 있자 한 유럽 관광객이 조개 하나를 집어 들다 비명을 지르며 곧바로 조개를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철남 아우를 '노려본다'. 마치 '이 뜨거운 걸 맨손으로 집어 들고 어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느냐'는 눈빛이다. 모양새를 보아 하니 정말 뜨거운가 보다. 철남 아우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철남 아우가 계속 뜨거운 조개를 식혀 내게 주며 다정히 말을 건넨다.

"누나, 많이 드시라요. 섭조개가 건강에 아주 좋습니다. 여성들 피부에도 좋다고 한단 말입니다."
"나만 주지 말고 아우도 어서 좀 들어."
"일 없습니다. 여기서 섭조개는 흔해 우리 많이 먹습니다."

그러더니 착한 철남 아우는 소주만 홀짝홀짝 마신다. 어느덧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져 장작불만이 환하게 우리 주위를 밝힌다. 우리가 먹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 철남 아우의 얼굴이 장작불처럼 따스하게 비친다.

우리에게 주려고 게살을 발라내고 있는 설향이.
 우리에게 주려고 게살을 발라내고 있는 설향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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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 음미하며 섭조개구이 파티를 마친 우리는 식당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게찜을 비롯한 산해진미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설향이는 연신 게살을 발라 우리에게 건넨다. 새삼 느끼는 일이지만 북한의 여성들은 정말 헌신적이라는 생각이다.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봐도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아우들과 함께하는 식사. 그동안 평양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며, 아이들 이야기며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밤늦게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모래사장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데이트를 즐기는 두 쌍의 남녀가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가며 모래 위를 걷고 있다. 여기가 북한이었던가! 갑작스레 허탈감이 저 파도처럼 가슴 속에 밀려온다. 아, 아무 이유 없이 갈라져 사는 나의 조국아!

굳세어라 금순아

아침바다에서 투망을 던지는 북한동포
 아침바다에서 투망을 던지는 북한동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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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한 사람이 투망을 던지며 고기잡이를 한다. 해수욕장에서 대체 고기가 잡히긴 할까 의문이 든다. 그런데 뭔가 잡히긴 잡히는 모양인지 옆구리에 차고 있는 망속에 잡은 고기를 연신 집어넣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북녘의 아침바다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쾅쾅' 두드린다. 영길 아우다. "오늘 평양에 5시까지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일찍 서둘러 흥남과 함흥을 거쳐 떠나야 한단다. 남편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5시까지 평양에 도착해야 한다는 거야?"
"나도 모르갔시요, 형. 하여간 어서 서두르시라요. 아침식사는 여기서 하고 함흥 참관을 마친 후에 중간에 가면서 벤또로 점심을 할 예정이야요."

급히 서둘러야 한다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자메시지를 읽으며 미소 짓는 설향이
 급히 서둘러야 한다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자메시지를 읽으며 미소 짓는 설향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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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경됐을 때 어디를 가는지 알려주지 않는 게 북한여행의 특징 중 하나다. 심지어는 그 장소에 가서야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미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성격이 급한 남편은 아니나 다를까 '미리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며 애꿎은 영길 아우만 못살게 군다.

급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마전 해수욕장을 떠나 흥남으로 출발한다. 흥남비료공장을 참관한 뒤 함흥으로 간다고 하자 남편이 또 불만을 터뜨린다.

"아니, 우리는 관광객인데 공장은 봐서 뭘 하겠다는 거야? 비료공장 시찰 나온 것도 아니고."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끼어들었다.

마전을 떠나며 설향이와 함께
 마전을 떠나며 설향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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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흥남비료공장은 나도 꼭 보고 싶어요. 학교 때 배웠잖아요. 그리고 흥남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고요."

겨우 남편을 달래고 있는데 영길 아우가 멀리 왼쪽을 가리키며 저곳이 흥남부두라고 알려준다. 남편이 깜짝 놀라며 말한다.

"뭐, 흥남부두? 차 좀 세워줘."

흥남부두 앞바다(흥남 철수 당시 이곳을 떠난 피난민들께서 기억하실지 몰라 여러 각도에서 찍어봤습니다).
 흥남부두 앞바다(흥남 철수 당시 이곳을 떠난 피난민들께서 기억하실지 몰라 여러 각도에서 찍어봤습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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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에 나오는 바로 그 흥남부두를 지나고 있구나. 차에서 내린 우리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 보았다 찾아를 보았다 /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드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이다 /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바로 여기구나! 많은 실향민들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가 지금 내 가슴을 파고든다.

식민지 국가의 노예로 살다 맞은 해방 조국은 또다시 전쟁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가족이나 연인을 잃고 길을 헤맨다. 목 놓아 불러 봐도 대답은 없고, 떠나가는 배 놓칠세라 눈보라를 헤집는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식구들, 피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한다.

내 어머니의 옛 친구, 큰 배를 타고 홀로 부산으로 오셨다는 '오랑 아줌마'가 바로 금순이었구나. '오랑 아줌마'는 이곳 흥남부두에서 누구를 찾아 헤맸을까. 겨우 얻어 탄 배 안에서는 누구를 찾아 목 놓아 소리쳤을까.

혹시 오빠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금순이를 애타게 그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혹시라도 찾을까 싶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끗힐끗 눈여겨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식당에서 일을 하던 금순이도 들어오는 손님을 곁눈질하며 오빠를 찾지는 않았을까.

안갯속에 희미한 흥남부두
 안갯속에 희미한 흥남부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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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피난민이고 실향민이다. 지금 이곳 흥남부두에서 나 또한 금순이가 돼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리고 목 놓아 불러보고 찾아본다. 잃어버린 나의 통일 조국을.

잿빛 속 흥남부두를 뒤로하고 차를 향해 힘없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태그:#북한, #통일, #민족, #함흥,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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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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