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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특징 하나가 때때로 그 사람을 기억나게 한다. 도시나 마을도 마찬가지. 어처구니없는 기억 한 조각이나 사소한 풍경 하나가 그 때를 불러낸다. 때론 부분이 전체보다 힘이 세다. 그런 조각들로 도시를 여행하려 한다.- 기자 말

일본 비에이역 앞에 있는 식당 '쿠이'. 건물 꼭대기에 있는 숫자는 창업연도를 뜻한다.
 일본 비에이역 앞에 있는 식당 '쿠이'. 건물 꼭대기에 있는 숫자는 창업연도를 뜻한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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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훗카이도(北海道)에 있는 도시 비에이(美瑛) 중심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건물 제일 높은 쪽 정면에 있던 숫자였다. 삼각형 지붕 한 가운데 깔끔하게 박힌 숫자는 누구라도 "저게 뭘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숫자가 지닌 비밀을 푸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번지라면 순서대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들쭉날쭉이었다. 하지만 통일성이 있었다. 숫자는 네 자리였고, 모두 '19'로 시작했다. 연도처럼 보였다. 짐작은 맞았다.

1947, 1915, 1997... 1910까지

숫자는 바로 건물이 시작된 연도였다. 태어난 나이가 붙어 있는 건물에선 사람과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그들도 사람처럼 태어난 때가 있고, 우리와 똑같이 늙어간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비에이는 인구가 1만 명을 조금 웃도는 작은 마을이지만 매년 120만 명이 넘게 찾아오는 관광마을이다. 꽃과 언덕이 아름다워 TV 광고나 포스터에도 여러 번 나왔다. 

2011년 여름 비에이를 찾아갔을 때 유명한 꽃과 언덕을 둘러보았지만 몇 해가 지난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나이가 적힌 건물들이었다.

비에이역 앞에서 건물을 빌려주는 마츠우라상점이 시작된 연도는 1915년.
 비에이역 앞에서 건물을 빌려주는 마츠우라상점이 시작된 연도는 1915년.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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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라면과 카레를 팔았던 식당 '코이'(戀)는 1947년생.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했다. "무척 오래 됐다"며 감탄했지만 근처엔 더 오래된 어르신(?) 건물이 있었다.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 '마츠우라상점(松浦商店)'은 1915년 생이었다. '코이'가 나이 들었다고 점잔을 뺐다면 큰 호통을 맞지 않았을까.

'마츠우라상점' 옆 관광안내소는 1997년생으로 아주 어렸다. 나이 들어 불편한 어르신을 모시기 위해 이렇게 젊은 건물을 붙여 모시도록 한 건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혹시 더 오래된 건물이 있나 살펴봤더니 대로쪽 인아베(因阿部) 백화점은 1910년생이었다.

상업용 건물뿐만 아니라 가정집에도 나이가 붙어 있었다. 한 가정집 나이는 1923년. 이렇게 건물마다 나이가 붙어 있으니, 보물찾기 하듯이 찾는 재미가 있었다.

얼마 전 지난 사진을 정리하다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는 누가 냈고, 어떻게 진행이 됐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비에이정 사무소에 전화를 걸면 되지만 일본어는 내 구역이 아니다. 혹시 이메일이 있나 살폈지만 없다. 지자체 사무소답게 홈페이지에 민원란이 있었다. 2013년 12월 사전과 번역기를 돌려 질문지를 만들어 올렸다. 약 10일쯤 뒤 답장 도착. 나가노 카츠야(長野 克哉)씨였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름을 붙여준 건물들, 꽃이 되다

비에이 마을에선 1989년부터 2008년까지 20년 동안 거리 정리사업이 실시됐다. 전봇대를 땅 속에 넣고, 도로 폭을 넓히고, 대로변 집을 새단장했다. 건물에 나이를 붙이는 작업은 그 때 이뤄졌다. 대상이 된 곳은 비에이역 앞 거리에 접한 88채. 그 가운데 56채에 나이를 붙였다. 정확히 설명하면 상점은 창업연도, 상점 외 주택은 거주자가 비에이에 살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1989년부터 2008년까지 새로 지은 건물이 있기 때문에 창업연도와 건축연도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나가노씨는 밝혔다.

아이디어는 조합 사무국에서 나왔다. 조합은 비에이역 앞 거리 땅 소유주가 모여 만들었다. 즉 시민이 주체가 됐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비에이정 사무소 직원들이 함께 했다. 민관합동프로젝트라는 설명이다. 이들이 건축 매뉴얼을 만들어 어떻게 집을 새로 지을지 정했다.

조합 사람들은 '서구풍 거리'를 기획했다. 일본식 연호 대신 서구식 연호를 넣기로 했다. 서양 건물에선 'since ○○○○'와 같이 표기하는 경우가 흔하다.

거리 정리사업은 2008년에 끝났지만, 매뉴얼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이를 붙이는 작업은 계속 된다는 뜻이다.

김춘수 시인이 그랬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우리나라에서 홍보를 위해 창업연도를 소개하는 식당은 많지만 그런 가정집은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런 마을도 없다. 건물마다, 집마다 나이를 찾아서 알게 된다면 그들 건물들도 우리에게 꽃으로 다가오게 되지 않을까. 나처럼 나이를 먹어가는 집을 쉽게 부수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가득했던 비에이마을에서 유독 건물나이가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잡은 건 그래서였던 것 같다.

비에이역 근처 시내 중심가 전경
 비에이역 근처 시내 중심가 전경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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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비에이, #일본, #건축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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