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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 '남인수 생가'의 문화재 지위 철회를 주장하고 나선 주체가 종북·좌파세력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주장을 참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이 문제제기를 한 주체로서 아연실색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주장 어디에 '종북'과 '좌파'의 주장이 있는지를 밝혀주기 바란다. 민족문제와 친일문제, 그리고 과거 문제를 제기만 하면 종북이고 좌파인가 되묻고 싶다. 변명이 궁하면 '빨갱이'로 몰아 붙였던 '매카시즘'의 전형이 아니고 무엇인가?"

23일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지회장 이기동)가 '남인수 생가'의 문화재 지위 말소와 관련해 낸 성명서 일부 내용이다. 문화재청은 남인수(1918~1962, 본명 崔昌洙·姜文秀)의 '생가'로 알려진 가옥이 문화재가 아니라는 결정을 내리고 지난 17일 <대한민국 관보>에 게재했고, 이와 관련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가 이날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기동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이 최근 문화재청에서 등록말소한 진주 드무실 '남인수 생가'를 둘러보고 팻말을 만져보고 있다.
 이기동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이 최근 문화재청에서 등록말소한 진주 드무실 '남인수 생가'를 둘러보고 팻말을 만져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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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자료를 통해 "2013년 3월 진행한 '진주기미만세운동 길 걷기 행사'가 일부 언론에 보도된 뒤 문화재청에 관련 사실을 확인 요청하고 문제 제기했다"며 "문화재청에서는 역사 인물과 관련되어 지정된 문화재에 대해 사실관계와 관련 전수 조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남인수 생가'가 실제 남인수가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자 <오마이뉴스>는 2013년 3월 28일"'친일가수' 생가가 문화재? ... '그는 여기 안 살았다'"는 제목으로 단독보도했고, 이후 문화재청은 '역사인물 관련 등록문화재 적정성 검토 일제조사'(전국 21건)를 벌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지난 3~9월 사이 구체적인 자료, 증거 수집 활동을 했다"며 "지난 9월 문화재청의 현지 조사 때 마을 주민 증언청취와 채증한 동영상, 녹취록과 함께 문화재 지정 취소 요청 공문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2005년 4월 진주시 하촌동(일명 드무실) 194-1번지 주택 2채에 대해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53호 남인수 생가'로 지정했다. 당시 문화재청은 '남인수팬클럽'에서 낸 자료만 바탕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는데, 이 가옥은 남인수 아버지의 본처가 살았던 집이다.

남인수 어머니(장화방)는 드무실 입구 비각 근처에서 주막을 하고 있었고, 장화방이 개가하면서 남인수는 이름을 '강문수'로 바꾸었다. 남인수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주막)은 현재 없어졌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은 문화재 지정 말소 결정했던 것이다.

"역사는 늘 현재 진행형이지 않은가"

최근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등록말소한 진주 드무실 '남인수 생가'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대문에는 안내팻말이 그대로 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등록말소한 진주 드무실 '남인수 생가'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대문에는 안내팻말이 그대로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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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이날 낸 자료를 통해 "이번 결정을 접하면서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바로잡힌다는 사필귀정의 이치를 확인하면서 문화재청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남인수는 대표적인 친일가수였다. 이와 관련해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대중가수인 남인수의 친일행적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지나친 결정이 아니냐는 주장"이라며 "이 주장에 의하면,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그 당시 살아남았던 우리의 조상은 모두다 친일이 아니냐'는 주장에 그저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어 "이 주장에 대해 분명히 밝힐 것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던 '남인수 생가'는 그의 친일행적을 기준으로 따져진 것이 아니라 생가가 맞는지 아닌지의 문제 즉, 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라며 "문화재로 지정된 그 곳은 남인수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자란 곳도 아니었고, 우리가 이 진실의 문제를 밝혀보기 위해 개인사와 가족사, 문중의 내력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이번의 결정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한국 대중가요사에 걸출한 인물인 남인수의 이력을 볼 때 이미 지정된 문화재의 지위를 없앨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있지만 이 역시 위의 첫 번째 이유와 같은 맥락으로 즉, '생가'인가 아닌가의 문제이지 대중가요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따질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일 뿐이다. 오히려 진실이 아닌 '남인수 생가'의 문화재 지위 영속은 두고두고 논란의 중심에서 붙들어 매어 두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남인수의 친일과 관련해, 이 단체는 "어쩔 수 없는 '생존형 친일'이 아닌 그의 행적 때문이다. 당시의 문화계 인사 중에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분들의 영전에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지 이 또한 되묻고 싶다"며 "사회적 위상이 어느 정도 있는 지도층 인사들이 대접은 받고 싶고 의무는 외면한 결과가 바로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게 아닌가? 남인수가 대중 가요계의 '황제'로 대접 받은 만큼의 반만이라도 이 민족의 운명에 대해 바르게 처신했더라면 오늘날 이러한 논란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등록말소한 진주 드무실 '남인수 생가' 앞에는 아직도 안내팻말이 세워져 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등록말소한 진주 드무실 '남인수 생가' 앞에는 아직도 안내팻말이 세워져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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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체는 "대중가요의 황제라고 일컬어지는 남인수의 행적은 과거이고 그 또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고인일 뿐이다. 지역사회, 국가라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번의 사례가 참으로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과거의 일이기에 묻어두거나 잊어버려야할 일은 더더구나 아니다. 역사는 늘 현재 진행형이지 않은가"라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김재화 선생 기념사업 벌여야"

이 단체는 같은 마을에 살았던 독립운동가 김재화(1892~1920) 선생과 관련한 기념사업을 촉구했다. 김재화 선생은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이강우·권채근·강달영·박진환·박용근·강상호 선생 등과 함께 1919년 3월 18일 '진주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현재 드무실 마을회관 앞에는 뜻있는 시민들이 세운 '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또 이 마을에는 김재화 선생이 태어나고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집이 현재도 남아 있다. <오마이뉴스>는 2013년 3월 30일 "독립운동가 집은 방치, 친일파 관련 집은 문화재?"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진주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김재화 선생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을 거치는 동안 온갖 고문에 의한 건강악화로 수형생활이 어렵자 가석방되어 자택에 도착하여 곧 바로 운명하셨다"며 " 논란이 된 '남인수 생가'와는 불과 100여 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있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28세의 청춘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김재화 선생을 비롯한 지역 출신 애국지사의 영령 앞에 우리 모두가 뒤늦었음을 고백하고 그 분들의 뜻을 받드는 일을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진주지역이 당면한 이번의 계기에 우리 지역사회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분명해진다"며 "진주시 하촌마을의 상징성을 살려 그 중심인물인 김재화 선생과 관련 애국지사들의 뜻을 받들고 기리는 일을 반드시 시행해야 하고, 진주시는 즉시 이 일을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태그:#남인수, #드무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김재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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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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