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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여행은 설령 폭우 속에 발이 묶인다 해도 여간 해서는 처연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실제로 여름 피서 때 홍수가 날만큼 큰 비를 몇 차례 만나기도 했지만, 최소한 내 경우 처량하다거나 쓸쓸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을은 다르다. 잿빛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차디찬 비를 바라보노라면 죽음보다 더한 고독감이 밀려올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지구 종말의 날이 그런 모습일까.

때는 9월 하순이었다. 태평양 연안의 로스앤젤레스를 떠나온 지 대략 한 달쯤 됐을 무렵이다. 동부 해안이 멀지 않은 뉴욕 업스테이트에서 '레이크 샘플레인'(Lake Champlain) 다리를 건너 버몬트 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잔 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회색 빛이었다. 전날 밤 잠을 청할 때부터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었다. 차 안은 을씨년스러웠지만, 마치 양철 지붕을 두드리듯 빗방울이 차 천정을 때리는 소리는 리드미컬했다. 서러운 나그네의 기분을 달래주는 반주였다고나 할까. 제법 맛있게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밖을 보니 빛은 그 희미한 줄기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대신 회색의 빗줄기가 무겁게 호수와 대지에 내려 꽂히고 있었다. 천상에서 해가 사라져버리고, 음울한 나락으로 떨어진, 아니 버려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잖아도 식구들을 떠나 1개월 가량 홀로 여행을 한 것은 그때가 난생 처음이어서 외로움이 켜켜이 쌓여가던 시점이었다. 인적도 드문 곳, 가을이 유달리 빨리 오는 뉴욕 업스테이트에서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내 눈물과 다를 바 없었다. 갑자기 미지근한 물기가 차가워진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미네소타의 덜루스(Duluth)에서 시작해 위스컨신을 거쳐, 미시건과 온타리오를 돌아 뉴욕에 진입할 때까지 왠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 갈수록 더해졌다. 수피리어 호수, 휴런 호수, 미시건 호수, 이리 호수, 온타리오 호수 등 오대호 주변을 섭렵하는 일정이었는데, 물을 가까이 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바다처럼 크지만 잔잔한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 저절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러다 이내 사는 게 부질없고 허망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발전하곤 했다. 호수, 비, 눈물… '물'이라는 '놈'들이 가진 마력이다.

잿빛 풍경
 잿빛 풍경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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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버몬트  주 경계 근처에 있는 한 호수(위의 사진). 오전인데도 흑백사진으로 착각할만큼 풍경이 음울하다. 뉴욕 업스테이트와 버몬트 주를 이어주는 샘플레인 다리(아래 왼쪽). 아침에는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너무도 처연해서 소리내 울 뻔했다. 9월 하순 어느 날인가에 울적한 기분으로 홀로 샘플레인 다리를 건너 버몬트(아래 오른쪽)로 접어들었다.

갑문
 갑문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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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의 경계를 이루는 수피리어 호수와 온타리오 호수를 이어주는 갑문. 두 호수는 수표면의 높이에 차이가 있다. 서쪽의 수피리어 호수가 높다. 갑문 양쪽으로 수표면의 높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왼쪽). 배가 들어오자 온타리오 호수 쪽의 갑문이 닫히고 있다(가운데). 갑문이 닫히자 수피리어 호수 쪽에서 물이 들어오고, 이윽고 배가 붕 떠서 수피리어 호를 향하고 있다(오른쪽).

매키노 다리
 매키노 다리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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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2600미터가 넘는 매키노 다리. 미시건 어퍼 페닌슐라와 로어 미시건을 이어준다. 다리 앞쪽이 미시건 호. 다리 건너편은 휴런 호로 이어진다. 

오대호
 오대호
ⓒ 위키피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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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호와 그 주변.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와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7개 주가 오대호에 이어져 있다. 오대호 일대는 북미 대륙에서 동해안과 서해안에 이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기도 하다.

다리
 다리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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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호 일대는 지구 최대 규모의 민물 호수들을 거느리고 있는 만큼 다리가 유난히 많다. 미국과 캐나다를 잇는 수 세인트 메리 다리(왼쪽). 배가 지나가면 교량 상판이 들리는 다리도 드물지 않다(오른쪽).

미국과 캐나다 경계인 세인트 로렌스 강의 풍경. 사우전드 아일랜드라 불리는 지역인데, 세인트 로렌스 강 속에 떠있는 섬이 1000개를 훌쩍 넘어1800개 이상이라고 한다. 유명한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이 이 곳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미국 국기와 캐나다 국기가 함께 걸려 있는 집들이 많다. 이 강 유역에서 섬으로 인정받으려면 물 위로 드러난 섬의 크기가 최소 가로 세로 30센티미터를 넘어야 하고, 또 적어도 1그루 이상의 나무가 있어야 한다. 섬 하나에 집 하나인 곳도 많다. 섬에서 뭍으로 나오려면 배를 타야 하므로 집집마다 배가 있다. 왼쪽 사진에 배가 보인다.
 미국과 캐나다 경계인 세인트 로렌스 강의 풍경. 사우전드 아일랜드라 불리는 지역인데, 세인트 로렌스 강 속에 떠있는 섬이 1000개를 훌쩍 넘어1800개 이상이라고 한다. 유명한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이 이 곳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미국 국기와 캐나다 국기가 함께 걸려 있는 집들이 많다. 이 강 유역에서 섬으로 인정받으려면 물 위로 드러난 섬의 크기가 최소 가로 세로 30센티미터를 넘어야 하고, 또 적어도 1그루 이상의 나무가 있어야 한다. 섬 하나에 집 하나인 곳도 많다. 섬에서 뭍으로 나오려면 배를 타야 하므로 집집마다 배가 있다. 왼쪽 사진에 배가 보인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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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
 나이아가라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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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 폭포는 오대호가 빚은 자연의 예술이다. 낮과는 달리 밤에 보면 황홀한 느낌이 있다. 호수를 바라보면서 삶이 공허하다는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한밤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면서 잠시나마 우울한 느낌을 떨칠 수 있었다. 왼쪽 사진은 미국 쪽 폭포. 오른쪽 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인접한 캐나다의 관광 타운이다.

시골
 시골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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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시골을 여행하다 보면 인적이 드문 길가에 의외의 편의 시설이 있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요즘 접하기 힘든 수동 물 펌프. 수량이 어찌 풍부한지 손잡이를 한번 들었다 놓자,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뉴욕 업스테이트에서 일찌기 골프장 사업에 손을 댄 한인 시니어. 재미 한인의 숫자가 늘면서 미국의 시골 구석구석에서도 심심치 않게 한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sejongsee.net(세종시 닷넷)에도 실렸습니다. sejongsee.net은 세종시와 관련한 각종 정보를 담은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태그:#오대호, #처연, #호수, #잿빛,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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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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