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던 해, 나는 열 살 남짓한 코흘리개였다. 그때 우리 반에는 과장을 조금 보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가 있었다. 학우들 학용품은 당연히 제 것이었고 툭하면 남자애를 때리거나 여자애들 치마를 들춰댔다. 아무도 한 마디 안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그냥 잠자코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결국 내 차례가 왔다.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옆구리를 세게 얻어 맞았다. 40여 명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치심'을 느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 방과 후 나는 몰래 학교에 남았다. 그리고 그 녀석 실내화를 쓰레기장에 버렸다.

'일베 사태' 보며, 엄석대를 떠올리다

14일 저녁과 15일 새벽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게시판에 올라온 '안녕' 대자보 훼손 인증 사진. 위가 고려대, 아래가 서강대.
 14일 저녁과 15일 새벽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게시판에 올라온 '안녕' 대자보 훼손 인증 사진. 위가 고려대, 아래가 서강대.

처음 '일베저장소(아래 일베)' 사이트가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일이 떠올랐다. 나는 당시 일베 회원이었다. 어느 유머사이트를 가든 대부분의 접속자들이 그렇듯 나 역시 '눈팅족'이었고, 정치와 무관한 '유머글', '정보글'을 보며 키득댔다. 사실 정치엔 별 관심도 없었다. 간혹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글이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을 보면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서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일베 논란'이 불거졌을 때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정도가 지나친 몇몇을 빼고 대다수는 그저 하나의 '놀이'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체장애인의 부정확한 발음을 희화화하고 '여성'을 '보X'라고 부르는 것은 '극단적인 소수의 예'라며 못 본 체 했다. 어느 술자리에 가서는 '일베는 현실에서 억눌린 감정을 배설하는 온라인 변기와 같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20대를 억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상'이라며 선동조의 개똥철학으로 일베를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밖의 행위들이 속출했다. 한 일베 회원이 전라도 출신 모 아이돌 가수 모습의 입간판을 눕혀놓고 유사성행위를 하며 '홍어 박멸'이라 했던 사건은 그들의 일탈 행위가 온라인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감과 동시에 법의 울타리 바깥까지 뻗쳐나가고 있음을 입증했다. 전 대통령들을 찬양 및 비하하며 희화화하는 것을 넘어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과 같은 역사들을 부정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무지에서 악으로, 악에서 죄로 변태했다.

결국 또 다시 일베가 도마에 올랐다. '안녕들 하십니까' 신드롬이 눈꼴셨던 한 일베 회원이 고려대학교 대자보 중 한 장을 찢어 버렸다. 여성 작성자에 대한 성희롱 발언까지 더해져 사회 공분을 일으켰다. 같은 대학교 재학생으로 밝혀진 당사자는 "사과문을 올렸음에도 신상을 털고 욕설을 하는 이들에게 법적 조치를 가하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련의 사태를 보며 초등학교 시절 그 일이 떠올랐던 이유는, '죄'임을 알지 못하는 '악'이 얼마나 쉽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지 오랜만에 절감했기 때문이다. 대자보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찢어 버리는 행위는 누군가에겐 유치한 장난으로 보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죄를 처벌하는 것뿐 아니라 예방하는 것 역시 법의 역할이다. 자성 없는 잠재악은 단죄의 대상이다.


태그:#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일베
댓글3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