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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 법조팀이 발간한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
 <한국인보> 법조팀이 발간한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
ⓒ 북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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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꾸린 '국무총리실 산하 민간인 불법사찰 및 증거인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화려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맹탕이 돼 사라졌다. 이 위원회는 작년 8월 생겼고 이달 10일 활동을 마무리했다. 사실 활동이랄 것도 없다. 15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회의가 딱 두 번 있었다. 생기면서, 그리고 종료를 위해.

위원장을 맡았던 심재철 의원은 그동안 받은 활동비 전액을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섬뜩했다. 반납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다시 한 번 머리를 맞대보라고 청하고 싶었다. '전 정부의 일'이니까 꼭 진실을 밝히고 몸통을 도려내시라고. 그가 맡은 임무가 그깟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무게던가. 그에겐 '민간인 불법사찰'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물론 온전히 위원장 혼자만의 책임은 절대 아닐 게다. 그러나 위원회 종료와 동시에 "활동비를 반납하겠다"는 발언은 그리 좋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마치 '받은 돈 토해내면 내 책임이 아니다'란 호소를 하는 걸로 보인다.

그 시작...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는지 파악해 보고하라"

이마저도 정쟁에 이용하는 그들이 너무 밉다. 위원회가 그렇게 활동이 전무한 사이, 그들에게 힘을 쥐어준 국민들은 큰 상처를 받았다. 개인의 삶은 파괴됐고, 사회에 불안감은 만연했다. 진실을 밝혔던 장진수 전 주무관은 지난달 28일 유죄가 확정돼 공무원 복직이 불가능해졌다. 참담하다.

장 전 주무관에게 유죄가 확정되기 딱 하루 전, <한국일보> 법조팀은 책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을 발간했다. 기자들이 취재한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 사건'의 전모가 담겼다. 꼬박 1년 동안 심층 탐사를 했다. 구체적인 진술과 정황, 증거들이 공개됐다. 직접 취재를 한 기자들은 이 사건을 '일반 범죄와 달리 국가기관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자행된 국기문란'이라 규정했다.

2008년 6월 10일, 촛불시위가 최고조에 이른 날이다. 주최 측 추산 70만 명이 촛불 대행진에 참가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 뼈저리게 반성했다"고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내부회의에서는 정반대였다.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시도가 절실했다. 특히 사정·정보기관에 대한 비판이 팽배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국민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개인에 대한 충성으로 흐르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사정 기관들은 촛불 시위의 배후 세력을 캐내는 데 경쟁적으로 나섰다.

지난 2010년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수사 당시 "청와대가 증거인멸을 지시했다"고 폭로한 장진수 전 지원관실 주무관(오른쪽)이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상고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씨가 장 전 주무관을 위로하고 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에 청와대가 개입했다고 양심고백으로 폭로했던 장 전 주무관은 집행유예를 선고 받아 공무원 복직이 불가능해졌다.
▲ 장진수 위로하는 '민간인불법사찰' 피해자 김종익 지난 2010년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수사 당시 "청와대가 증거인멸을 지시했다"고 폭로한 장진수 전 지원관실 주무관(오른쪽)이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상고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씨가 장 전 주무관을 위로하고 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에 청와대가 개입했다고 양심고백으로 폭로했던 장 전 주무관은 집행유예를 선고 받아 공무원 복직이 불가능해졌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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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1일, 국무총리실 산하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슬그머니 신설된다. 인원은 이른바 '영포'라인으로 채워졌다. 과장을 맡은 진경락이 사무실에 출근한 첫날, 팀장들과 고용노사비서관 이영호는 커피숍에서 간담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이영호는 평상시에 자주 말하던 '일심으로 충성하자' 'MB를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자'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민정수석실 소속도 아니고, 공직 감찰과는 전혀 무관한 고용노사비서관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간부들과 간담회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자리였다. 앞으로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법과 원칙이라는 궤도에서 탈선해 사생활이나 사찰하는 조직으로 전락할 것임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 본문 57쪽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견제할 장치가 없었으니 예견된 결과였다. 국회의원, 민선 자치단체장, 종교계 인사, 언론인, 민간인 등 무차별적으로 사찰 대상을 늘려갔다. 대통령의 패러디물을 게시했다는 이유로 민간인의 뒤를 캐는 일까지 벌어졌다. 최초 피해자는 KB한마음 김종익 대표다. 조사에만 그치지 않고 사기업의 인사에도 개입했다. 김종익 대표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지분마저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나 있던 일이다. 규정은 '중앙 행정기관 소속의 공무원 혹은 중앙 행정기관에 속한 공공기관 임직원'이 아니면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조사 대상으로 삼을 수 없도록 한정하고 있었다. 영장도 없이 사무실도 수색했다. 초법적인 조직이었다. 문어발식, 저인망식 활동을 펼쳤다. 한 노조간부를 사찰한 보고서를 보면 뒷머리가 쭈뼛 선다.

"OOO 노조위원장을 크리스마스 기간 감찰한 결과 집은 OO나, OO지역에 5000만 원짜리 방을 얻어놓고 살고 있으며, 여자 문제는 없고, 23일 잠시 외출해서 장갑과 여자 귀고리를 샀는데, 당일 1시간 미리 나와서 장갑 등 선물을 가지고 곧바로 OO지역 자기 집으로 가서 외출도 안 함." - 본문 95쪽

부실했던 1차 수사와 과제를 남긴 2차 수사

2009년 10월, 이들의 실체가 세간에 알려진다. 그토록 활개를 쳤으니 말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스멀스멀 새나오던 낌새를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민주당 신건 의원이었다. 문제제기를 하며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공직윤리지원관실 소속의 구성원들은 공무원이기 전에 국민이기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괴상한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그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무엇이 두려웠으랴.

그러나 적어도 당시 알려진 의혹은 공무원을 대상으로 나온 이야기들이라 마냥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몰아붙이긴 한계가 있었다.

2010년 6월, 민간인 김종익 대표의 사례가 불거졌다. 이를 알린 이도 신건 의원이었다. <PD수첩>까지도 이 사건을 다루자 수사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수사에 나선 검찰은 뭉그적거렸다. 압수수색이 늦어져 증거를 인멸할 시간이 충분했다. 하드디스크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등 증거인멸 범행 대부분 이 기간 저질러졌다.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2012년 3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간인 불법사찰이라는 용어는 현정부를 음해하기 위한 음모이고 정치공작이다"고 주장했다.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2012년 3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간인 불법사찰이라는 용어는 현정부를 음해하기 위한 음모이고 정치공작이다"고 주장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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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늦가을, 1차 수사에 대해 불법 사찰과 증거인멸과 관련한 법원의 판결이 났다. 부실 수사 논란에도 이인규와 김충곤을 처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보였다.

그러나 2012년 3월, 장진수 주무관이 <오마이뉴스> 팟캐스트 '이슈털어주는남자(이털남)'에 출연해 1차 수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윗선 개입 의혹을 폭로했다. 2차 수사가 시작됐다. 들여다 볼 내용이 급증하자 검사 14명에 지원 인력 46명의 초대형 수사팀이 꾸려졌다. 수사팀이 출범한 지 나흘 만에 뜬금없이 이영호가 자진해서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 유명한 '호통' 기자회견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석 달간의 수사 끝에 박영준, 이영호, 이인규, 최종석, 진경락 등 5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이 역시 '깃털'만 뽑았다는 비난이 일었다. 당시 살아있는 권력인 윗선의 개입 여부는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무총리실 산하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인적 쇄신을 주장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 것은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누구인지는 검찰 수사에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비선 보고 라인의 윗선으로 지목된 박영준 차장이었는지, 그 이상의 인물이었는지는 현재로서 불확실하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직보된 보고서를 밤을 새워 읽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 본문 124쪽.

열쇠는 '관봉'이다. 관봉이란 한국조폐공사가 한국은행에 신권을 납품할 때 포장된 상태의 돈을 말한다. 취재를 한 기자들도 처음 들어봤을 정도로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하물며 이를 직접 손댈 수 있는 인원은 오죽하랴.

이런 관봉을, 류충렬 공직복무관리관이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입막음을 목적으로 줬다. 더군다나 일련번호로 추정컨대, 5만 원 신권이 막 시중에 유통될 때의 것이다. 류충렬 관리관은 자신이 가지고 갔던 관봉의 출처를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계속해서 답변을 바꿨다. 도대체 이 관봉, 어디서 온 걸까?

사찰 정보의 최종 목적지는?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입막음 용도로 관봉을 건넨 류충렬 관리관이 돈의 출처에 대해 계속해서 말바꾸기를 했다.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 243쪽에서 인용.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입막음 용도로 관봉을 건넨 류충렬 관리관이 돈의 출처에 대해 계속해서 말바꾸기를 했다.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 243쪽에서 인용.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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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4일 진경락이 구치소에서 한 발언이다.

"날 죽여보라 이거야.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도 못 막고 무궁무진하게 계속 연쇄 폭발할 거야. 내가 유명하기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 내가 생각해놓은 대로 하면 되니까. 이야기할 루트는 많으니까." - 본문 171쪽.

그가 말한 연쇄 폭발의 끝은 어디였을까. 상당수의 증거가 사라져버렸단 점을 감안하면 도대체 얼마나 더 놀라운 사실이 숨어있단 말인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에 사용된 자료
2010~2013년 재판기록
장진수의 녹음 파일 69개
진경락의 외장 하드디스크
김경동의 USB문건
김기현의 USB문건(2619개 사찰 파일)
진경락의 구치소 접견 기록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기록
'공직윤리지원관실 업무 처리 현황' 사찰 리스트
VIP 충성 문건
청와대 하명 사건 처리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관련 정국 분석' 보고서
이 사건이 얼마나 상식 밖의 일인지 정녕 모르는가. 원칙도 철학도 없는 뒷조사가 자행됐다. 미행을 하고 철저히 짓밟았다. 대상과 범위도 따로 없었다. 굳이 추정하자면 '거슬리면 누구든' '사생활을 포함해 상대가 불리해질 모든 정보'라고 해야 하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칼을 줬더니 눈을 감고 제멋대로 날뛴 격이다.

기자들이 발로 뛰며 책을 낼 동안, 위원회랍시고 국회에서 한 일은 뭔가. 이제라도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정점에 있는 책임자를 밝혀라. 그것이 이 '비상식'의 일을 '상식'적으로 해결하는 첫 번째 절차다. 다시는 국가권력을 사사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그 오만방자한 발상, 못하게 하라.

덧붙이는 글 |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 한국일보법조팀 지음, 북콤마 펴냄, 2013.11, 1만4천5백원



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 - 공직윤리지원관실 불법 사찰 전모 추적기

한국일보 법조팀.김영화.강철원.남상욱 외 지음, 북콤마(2013)


태그:#민간인 사찰과 그의 주인, #장진수, #한국일보 법조팀, #북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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