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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알람이 울린다. 새벽 여섯 시. 아이의 뒤척임으로 인해 깊은 잠에 들지 못한 눈꺼풀이 한없이 무겁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나에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깜빡 졸다가는 피를 볼 게 분명하다. 잘 벼려진 칼을 한손에 거머쥔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나는, 당근을 채썰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가 김밥에서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아이들의 소풍날 아침 풍경이다. 김밥집 딸래미인 아내 덕분에 나의 역할은 재료 준비까지다. 쌀을 씻어 밥을 얹히고 나면, 당근 채썰어 볶기, 계란 지단 만들기, 녹색 채소 데치기, 그리고 햄과 맛살, 치즈 등을 규격에 맞추어 자르기가 계속된다. 우리 아이가 김밥에서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기에 단무지에 우엉, 참치에 깻잎까지 열 가지 이상의 재료는 필수다. 모든 재료 준비가 끝나면 김밥 말기의 고수인 아내를 깨울 시간이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도시락으로 김밥을 쌀 때, 속재료의 준비는 남편인 나의 몫이다
▲ 김밥 재료 준비 도시락으로 김밥을 쌀 때, 속재료의 준비는 남편인 나의 몫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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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다니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다르다. 한 달 평균 두 번의 소풍을 간다고 치면, 네 번의 김밥 준비가 필요하다. 단순하게 도시락 준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선생님 도시락을 만들라치면 풍성하고 맛깔난 데코레이션까지 필요하다. 내 아이 먹이고 선생님 드리는 데 나쁜 감정은 물론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나에게 지인의 한 마디가 귀를 번쩍 뜨이게 한다.

"요즘 애 엄마들 아주 난리야. 도시락 예쁘게 만들기 카페가 널렸고, 모아놓고 수업도 한다네. 김밥 틀 공동구매는 기본이고. 유치원 때부터 자기애들 기죽는답시고 별의별짓을 다해요."

'그럼 너는?'이라는 비딱한 시선을 던져보지만, 주눅드는 기색은 전혀 없다. 그 당당함의 이유는 바로, 그 친구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도시락을 준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 공단 도시(경북 구미)라는 특성상 맞벌이 부부들이 많아서 아침에 도시락 싸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원장님이 자체적으로 준비한다고 한다. 도시락 때문에 소외당하고 자존심 상하는 아이들이 생길까봐 배려하는 것도 있단다.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으면, 살짝 부러움을 느끼며 돌아섰을 텐데, 받아쓰기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나자 호기심이 발동한다.

"하루는 우리 애가 받아쓰기 점수를 보여주며, 옆집 누구는 맨날 30점 맞는다고 흉보듯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이건 아닌 것 같다 싶어 유치원에 전화했지. 유치원 때부터 점수로 서열이 나뉘는게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선생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더라고, 그 뒤로는 받아쓰기 시험지에 점수가 사라지고 첨삭지도만 되어 있어."

소풍 도시락 유치원에서 준비... "아이들 똑같이 보게됐다" 

도대체 어떤 유치원일까? 아이들의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배려하는 원장님과 선생님들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치원 홍보의 모양새를 띠면 어쩌나 싶기는 했지만, 일선 선생님들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어서 유치원 선생님 한 분께 조심스레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리고 한 달여 만인 지난 11월 15일, 한 선생님을 마주하고 앉았다(공개되기를 꺼려하셔서 선생님의 신상이나 기타 인사말 등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 유치원은 설립된 지 20년이 넘은 민간 유치원으로, 총 12개 반으로 구성돼있다.

빼곡히 정리해 간 질문지와는 달리 인터뷰는 자꾸 산으로 가고...
▲ 인터뷰 빼곡히 정리해 간 질문지와는 달리 인터뷰는 자꾸 산으로 가고...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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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풍이나 견학 등의 야외 행사에 가정용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한 달이면 적어도 서너번은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 저로서는 그 배경이 사뭇 궁금합니다. 언제부터 시행했고, 그 취지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학부모님들의 반응은 어떤지요?
"7년 전부터 시행한 거 같습니다. 구미가 아무래도 공단 지역이다 보니까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들이 많으셔서, 도시락을 못 싸거나 사서 보내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하는 부담감도 있고요. 그래서 원장님께서 선생님들과 상의하여 도시락을 유치원에서 준비하자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대여섯 살이면 집에서 싸온 도시락이랑 원에서 준비하거나 김밥집에서 사온 도시락이 다름을 충분히 알거든요. 아이들의 감수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것이라고 판단했고요,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들에 대한 작은 배려라고 생각했지요. 학부모님들의 반응은 굉장히 좋아하시죠."

- 이런 말씀 드리기 좀 뭐하지만 선생님 입장에서 예쁘고 맛깔나게 꾸민 도시락을 받아보는 것이 일종의 직업에 대한 뿌듯함 같은걸 느끼게 할 수도 있는데, 다른 유치원 선생님들이 부러울 때는 없으신지요?
"솔직히 저희도 사람이고 학부모님들의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받을 때 기분이 좋기도 하고 많이 감사하고 그렇죠. 그러다보면 도시락 보내주신 부모님들의 아이에게 아무래도 눈길 한번 더 가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그런데 도시락을 원에서 준비하고 부터는 차별없이 아이들을 대하게 됐어요. 선물이나 촌지 같은 것도 이제 완전히 사라졌거든요. 그 또래의 아이들이 똑같은 크기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유치원 받아쓰기 수업에 대한 사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궁금합니다. 학부형으로부터 어떤 전화를 받으셨고, 그 전화 이후에 원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요?
"사실, 저희도 그런 일이 처음이었어요. 받아쓰기 시험 보고 점수 매겨서 집에 보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학부형 한 분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벌써부터 점수에 길들여지면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은 아이들이 상처받고 위축될 것이 아니냐는 거였죠. 전화 거신 분의 아이는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는 아이였거든요. 전화 끊고 나서 원장님 이하 선생님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했습니다. 받아쓰기 수업의 본질이 뭐냐에 대해서 고민했죠. 점수에 의한 보상이냐, 한글을 깨우쳐 나가는 과정이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점수 적는 것을 없애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틀린 부분을 하나하나 수정해주고 왜 틀렸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본거죠."

- 저 역시도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고, 틀린 갯수대로 매를 맞고 자란 기억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구나 하고 하나의 의견으로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선생님들이 모여서 회의까지 하시고 이런 과정들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오는데요. 받아쓰기 말고 학부형들의 건의나 제안이 자주 들어오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매번 회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지요?
"네. 요즘 학부형들은 굉장히 적극적이셔서 여러 가지 건의들을 해주십니다. 알림장이나 전화를 이용해서, 일기를 쓰게 해달라거나 방과후 수업에 이런 저런 내용을 추가해 달라거나하는 제안들을 많이 하시는 편입니다. 그런 제안들이 들어오면 매주 월요일 회의 때마다 선생님들끼리 충분한 토론과 고민을 거쳐서 시행할 것들은 즉시 시행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한 반에 2~3명은 한부모, '아빠 수업' 아닌 '열린 수업' 진행

- 이건 좀 다른 질문입니다. 아빠 참여 수업이라고 알고 계신지요? 요즘 유치원마다 유행처럼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요, 한편으로 한부모 슬하의 아이들에게는 또다른 상실감을 안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유치원에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저희 유치원에서도 아빠 참여 수업이나 엄마 참여 수업을 진행했었는데요, 3~4년 전부터 학부모 참여 수업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한부모 슬하의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서요. 유치원에서 한 반에 2~3명의 아이들은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거든요. 예전보다 많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아빠, 엄마 참여 수업이 정규 수업 시간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진행된다고 해도 아이들끼리는 누가 오고 안왔는지 금세 알아차리거든요. 학부모 참여 수업으로 바뀌고 나서는 부모님들도 만족해 하시고, 엄마, 아빠가 아니고 할머니나 삼촌 등 친지들까지 함께 참여하는 열린 수업의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 저도 얼마 전에 큰 아이 유치원 수업에 참여했었는데요, 집사람이 일하는 날이라서 저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아빠만 온 분들도 계시고, 엄마, 아빠 함께 온 가족들도 여럿 보였는데, 한쪽 부모만 참여시키는 수업보다 훨씬 보기 좋았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소수의 아이들에 대한 배려심이 굉장히 많이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과 선생님께서 근무하시는 유치원의 다른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랄까 교육관, 이런 게 궁금합니다.
"아침에 아이들 통학차량에 함께 하려면 보통 오전 7시에 출근해야합니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하고, 청소나 잡무들을 진행하다보면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죠. 그래도 때묻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아이들에게 순수함을 많이 배우고 그래요. 자라나는 환경이 각자 다른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만드는 게 저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이들을 평등하게 내 아이처럼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내년에 유치원에 간다고 꿈에 부풀어 있는 둘째 아들
▲ 둘째 아이 내년에 유치원에 간다고 꿈에 부풀어 있는 둘째 아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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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여에 걸친 인터뷰는 학부형과 선생님의 허심탄회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시종일관 지속되었다. 천사는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커피숍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천사같은 아이들의 미소가 저절로 떠올려진다.

처음에는 김밥 재료 준비하기가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한 어느 아빠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인터뷰였는데, 대화를 이어나가다보니 어느 학부모 이상으로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고 계신 일선의 유치원 선생님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다른 집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이 내 아이 김밥에 들어갈 재료의 가짓수에 집착했던 내 모습이 순간 부끄러워진다.

유명한 사립 유치원에 아이를 입학시키기 위해 밤샘을 마다하지 않는 극성스런 부모들. 유치원부터 무한 경쟁의 전쟁터로 내몰리는 각박한 현실속의 아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조건과 환경의 차이 없이 동일선상에서 아이들을 출발시키기 위해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는 선생님들의 마음 씀씀이가 찻잔 속에 고스란히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두 아이들에게 쥐어 줄 붕어빵 한 봉지를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져간다.


태그:#아빠 참여 수업, #김밥 도시락, #편부모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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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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