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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대로, 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산국화이어도 좋고 나리꽃이어도 좋은 것이다.
아니, 달맞이꽃이면 또 어떤가!"

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나에게 깊은 깨달음이나 통찰력, 마음 속 깊이 스며들었던 책들은 식자연하고 학식 높아 보이는 책들이 아니라 고요하고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숨을 고르게 하고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하는 쉽고 자연스러운 글이었다. 친근하고 편안하면서도 삶의 흔적과 그 삶에서 우려낸 깊은 통찰력과 지혜가 깃든 글이었다. "내게 깊은 깨달음을 준 글들은 어렵지 않고 복잡하지 않았다. 쉬운 몇 마디 말로 사람과 사랑을 대하는 태도를 일러주었고 간단한 비유만으로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었다"고 했듯이.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쉬운 비유 몇 마디로 설파하셨듯이, 나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 책은 쉬운 글이었다.

도종환 시인의 글은 뒤늦게 읽고 좋아하게 되었다. '접시꽃 당신'으로 잘 알려진 도종환 시인. 딱 내가 아는 정도의 정보다. 그런데 근래에 두 책을 읽으면서 시인의 삶의 내막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짧은 정보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 책표지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 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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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도종환/좋은생각)는 몸이 상해 일을 멈추고 숲에 들어가 잠시 쉬면서 지내고 있던 시인이 쓴 단상들이다. 가난했던 문학도였고 교사요 운동가로 오랫동안 활동했고 해직교사로 10년 그리고 감옥에도 갇혔고 시골로 좌천되어 시골아이들을 가르쳤고 시를 써온 시인. 치열하게 살아 온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몸에서 신호가 왔다. 몸이 안 좋아져 시골에 들어가  살면서 고요와 평화를 누리며 살며 쓴 글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몸이 정지신호를 보내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수타니파타>에서 가르친 대로 만족할 줄 알며, 너무 많은 것을 구하려 하지 말고, 간소하게 살고자 한다. 피고 지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다 예쁘듯 나도 구태여 장미가 되려 하지 말고, 내 빛깔과 크기와 향기에 맞는 들꽃이 될 수만 있어도 좋다. 아직도 누군가 나를 꽃처럼 기억하고 사랑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산문집에 실린 글 한 꼭지 한 꼭지가 다 시다. 글의 행간마다 낮은 숨결과 고요한 가운데 쓴 듯한 시인의 마음결과 숨결이 느껴진다. 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잔잔해지면서 일상 속에서의 분주함이라 부대낌에서 잠시 떨어져 앉은 마음자리를 내게 한다.

시인의 글에서는 꾸미고 덧씌운 듯 한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자기 내면을 향한 응시를 할 수 있을 듯하다. 무한경쟁 현대사회 한복판에서 피 터지는 경쟁사회가 새삼 낯설게 느껴지게 만든다. 적당히 모자라고 부족한 상태와 조금은 느린 걸음이 오히려 제대로 된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자족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내용 중에 '기도를 배우던 시절'(89쪽)이라는 제목의 글이 마음에 유독 와 닿았다.

"나를 성당으로 불러 간 이들은 낯모르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었다. 대학시절부터 빠져있던 실존주의 철학으로 인해 오만했던 나의 태도가 무너진 것도 그분들 때문이었다. 사회과학서적 몇 권을 읽고 시대와 민족에 대해 고민합네 하고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고쳐준 분들이었다...

낯모르는 이웃의 병상에 찾아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철학과 내 과학과 내 문학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일면식도 없는 이웃 아낙을 찾아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달라고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고통 받는 내 이웃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아파하는 모습으로 문학을 해왔던가 하는 반성을 했다."

"누구에게고 어디서고 무릎을 꿇을 수 없다 생각해 왔던 것은 얼마나 오만한 자세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많이 울었고 많이 뉘우쳤다. 뉘우치고, 눈물 흘린 만큼 마음이 맑아졌고, 깨끗한 시와 만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을 쓰던 무렵이었다."

또 하나,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주셨다'라는 글 내용이다. 몸과 마음이 허약해져 숲에서 살면서 그가 하나님을 만나던 때의 얘기. '민족과 역사, 민주주의, 민중을 위한 문학, 이런 슬로건 아래서 밤새 토론하고 읽고 쓰면서 그런 거시적인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가 그런 자신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성당'을 찾아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뉘우침 때문에...

그는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죄와 잘못이 많은 자임을 받아들였고 용서를 구했고, 그 대신에 거듭 태어날 것을 약속했다고 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는 변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가 병이 든 이유는 '욕심'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책표지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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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 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라일락꽃'/도종환)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는 책 제목이 시적이어서 손에 들었다.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나의 삶, 나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자전적 에세이로 이 책을 읽다 보면 도종환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가난했던 어린시절부터 시인으로 교사로 감옥에 들락거리고 강퇴 당하고 운동권으로 활동하고 싸워왔던 지난한 삶과 몸에 병이 와서 숲속에 들어가서 살기까지의 고독하고 가난하고 힘든 투쟁의 삶, 시인의 삶, 교사로서의 삶 그리고 지금 자연인으로서의 삶. 그 행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도종환 시인이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단서를 찾는다면 어린시절의 가난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권세 있고 유복하고 많이 배운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선한 심성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마웠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친척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 편지를 자주 썼습니다. 편지 앞에 계절 인사를 쓰기 위해 바람과 별과 구름과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살폈고, 그래서 자연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참고서 한 권을 사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매일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하면 보내 줄 수 있는 상의할 부모가 옆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이 면제되는 지방 국립사범대학교에 진학했고 화가가 되고 싶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 좌절이 문학으로 방향을 틀게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문학을 밀고 가는 가장 큰 힘은 좌절입니다."(작가의 말 중)

그는 오월 광주 항쟁 때 군복을 입고 군인이 되어 시민군과 대치하는 상황에 처했지만 부당한 사격명령을 따르지 않고 양심의 명령을 따라 소총의 실탄을 거꾸로 장착한 채 오월의 밤을 견뎠다. 결혼한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 아내가 암에 걸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갔을 때 울면서 많은 시를 썼고 후일에야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시는 남들도 울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삼십대 초반에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승진과 출세의 길을 가지 않고 징계와 해직과 좌천이 기다리는 길을 걸었다. 감옥에서 온갖 모욕과 수욕을 당했지만 폭력이 아닌 상처받고 피 흘리고 박해 받음으로써 부당함을 드러나게 했다. 잘 만들어내는 글과 시가 아니라 살아가는 글을 쓰려 했고 그렇게 가르친 시인 교사였다.

그 시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읽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자기검열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 옷깃을 여미게 된다. 해서 책은 배움이요 깨달음이요 벗이며 스승이다. 두 책,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와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앎의 기쁨과 내면을 돌보는 고요한 시간을 조금 누릴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도종환 지음, 좋은생각(2004)


태그:#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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