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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정 대주교가 지난 26일 광주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대건문화관에서 열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2013년 정기세미나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염수정 대주교가 지난 26일 광주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대건문화관에서 열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2013년 정기세미나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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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님.

우선, 일면식도 없는 평신도 주제에 불쑥 공개편지를 드리게 돼 송구스럽습니다. 손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대주교님께 전해지기도 전에 가뭇없이 사라질까 싶어 이렇게 인터넷의 힘을 빌리게 됐습니다. 직접 읽게 되시든, 그렇지 않든 한국 천주교회의 현직 최고 지도자인 대주교님께 편지를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평신도로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말씀을 올리기에 앞서, 혹 편지글 중에 주상과 같은 대주교님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글귀가 있다면 부디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불과 한 해 만에 역사는 수십 년 전으로 완벽하게 퇴행해버렸고, 정치권도, 사회도, 학교도, 심지어 종교계조차 둘로 쪼개져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대주교님의 진심어린 '말씀'을 청하려는 목적입니다.

얼마 전 대주교님께서는 전주교구 박창신 신부님의 'NLL 발언'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타'하신 반면, 지난 26일 천주교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참석하셔서는 어느 평신도의 시국 관련 질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같은 내용인데 말입니다. 꼬일 대로 꼬인 현 시국 상황만큼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주교님의 복잡한 심경이 그려집니다.

"정의구현사제단, 동네 북 됐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전주교구 원로신부가 지난 22일 전북 군산시 수송동성당에서 열린 '불법 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에서 강론을 하고 있는 모습.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전주교구 원로신부가 지난 22일 전북 군산시 수송동성당에서 열린 '불법 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에서 강론을 하고 있는 모습.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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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주교님은, 원하든 원치 않든, 'NLL 발언'으로 정부와 보수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는 박창신 신부님 못지않게 여론의 주목을 받고 계십니다. 문제는 대주교님의 짤막한 입장 표명이 그에 대한 여론의 십자포화를 정당화시켜주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제는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급기야는 다른 교구의 원로신부가 동료 신부를 교황청에 고발하겠다고 나서는, 그야말로 '진흙탕 개싸움' 형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차마 보기 민망한 모습입니다. 그들도 사제이기 전에 인간인데,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지닐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순명의 의무(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 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따르는 덕을 말함)'를 강조하는 천주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주교님의 '질타'와 원로 신부의 '고발' 운운에 부정선거 여론으로 수세에 몰렸던 정부는 되레 연일 공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기충천한 보수언론과 일부 시민단체는 박창신 신부님이 속한 정의구현사제단을 '종북구현사기단'으로 조롱하며, 그간 쌓아왔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마저 폄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천주교에 대해 잘 모르는 지인이 제게 그러더군요.

"박창신 신부, 그분 머지않아 곧 잘리겠네. 사장(대주교님)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더욱이 동료 신부도 입에 거품 문 채 자르라고 난리니. 그러고 보면, 그가 속한 정의구현사제단, 완전히 '동네 북' 신세가 됐네. 천주교 내에서 '전라도' 꼴이구먼."

"능력껏 정치에 참여하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지난 22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이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열고 있는 모습.
 지난 22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이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열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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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이명박 정부 때까지 '경제적 양극화'로 우리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됐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출범 뒤부터는 '이념적 양극화'가 공동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지난 1년 간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는 이야기가 회자됩니다. 태생적으로 안정지향적일 수밖에 없는, 보수적인 천주교회조차 이 지경에 빠졌으니, 지나친 표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작금의 교회 내 갈등과 반목의 책임을 온전히 대주교님께 돌리려는 건 아니지만, '질타'든 '침묵'이든 대주교님의 입장 표명이 되레 교회를 더 큰 혼란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공개적으로 나무라신 'NLL 발언'은 엄중한 현 시국상황에 비하면, 그야말로 '깜'도 안 되는 해프닝 아닐는지요. 과연 그 몇 마디 말이 사제를 파문시킬 조건이 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박창신 신부님의 'NLL 발언'은 정제되지 않은 경솔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를 꼬집기 위해 '사제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대주교님의 말씀에는 동의는커녕 공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나름 '독실한' 신자인 제가 아는 한, '사제의 직접 정치를 금지한' 교회의 교리는 국회의원이나 관료 등 '직'을 겸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대주교님께서 장상으로 모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정치'에 대해 이렇게 갈파하셨습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 기여해야 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교황님과 대주교님의 '정치'에 대한 해석이, 거칠게 말해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걸 의식하신 탓인지, 대주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더군요. "그리스도인에게 정치 참여는 일종의 의무이지만, 그것은 평신도의 몫이다." 말하자면, 사제는 안 되고, 평신도에겐 의무라는 말씀인데,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대주교님, 말 꼬투리 잡기에 부화뇌동하셨습니다

'대통령 사퇴'와 '연평도 포격' 발언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박창신 신부를 '종북'으로 규정한 보수단체의 규탄시위가 서울 명동성당앞에서 연일 개최되는 가운데 지난 26일 오후 성당 입구에서 대한민국바로세우기본부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대통령 사퇴'와 '연평도 포격' 발언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박창신 신부를 '종북'으로 규정한 보수단체의 규탄시위가 서울 명동성당앞에서 연일 개최되는 가운데 지난 26일 오후 성당 입구에서 대한민국바로세우기본부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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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정치란 사회 구성원들의 첨예한 갈등과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또, 예로부터 '정자정야(政者正也)'라 하여 정치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성현들은 설파했습니다. 그러한 일에 사제와 평신도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요.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훨씬 더 부합하는 보편적인 인식 아닐는지요.

사람 사는 사회를 올바르게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사제가 할 일이 아니라니요. 사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대주교님은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세상은 평신도의 고유 영역으로 현세의 질서를 개선하는 것은 평신도의 몫"이라고. 저는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제는 속세를 떠나 고결하게 있을 테니, 세상이라는 진흙탕에서는 너희 평신도가 뒹굴어라'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정치는 '아랫것'들의 일로, 사제는 영성에 도움을 주는 성사만 집전하면 된다는 뜻인지요. 민의가 왜곡되고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있는 참담한 현실 앞에 '사제들은 정치에서 손 떼라'는 그 말씀에 절망을 넘어 분노가 치밉니다.

대주교님의 말씀에 맥락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해석한 것인가요. 그렇게 여기신다면, 박창신 신부님이 시국미사 때 하셨던 강론의 전문을 읽어보셨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된 'NLL 발언'이 과연 핵심이던가요. 대주교님의 '질타'는 정부와 보수언론이 26분 강론 내용 중 앞뒤 맥락 다 무시하고 3분 가량 되는 말을 꼬투리 잡고 늘어지는 한심한 작태에 부화뇌동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침묵'이 능사는 아닙니다

제가 가톨릭 신자로 살게 된 것은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보살피고 늘 약자 편에 서서 헌신하는 숭고한 신부님들을 직접, 또는 책을 통해 여럿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사로서, 사제로서 살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이태석 신부님과 서슬 퍼런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다 온갖 고초를 겪은 지학순 주교님은 삶 자체가 감동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해군기지를 건설한답시고 마을 공동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제주도 강정에서 마을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정부와 맞서 싸우고 계신 신부님·수녀님들이 존경스럽고, 부정선거를 자행한 국정원 개혁을 위해 지금껏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전국의 수많은 신부님들 또한 평신도인 제 삶의 나침반입니다.

이 모두가 아무리 좁게 해석해도 모두 정치 참여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대주교님은 그분들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쏟아내셨습니다. "마치 자신이 하느님처럼 행동하고 판단하려는 교만과 독선이 문제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졸지에 사제로서 그분들의 헌신이 순간 교만과 독선으로 규정됐고, 결국 제 신앙도 부정된 셈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공감하리라 확신합니다. 대주교님의 입장 표명이 외려 정치권력에 눈치를 보는 전형적인 정치 행위라고. 이미 교회는 갈기갈기 찢겨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종북 정당', '종북 국회의원', '종북 학자', '종북 노조', '종북 교사'라며 마구 내몰더니 급기야 '종북 사제'라는 이름까지 생겨났습니다. '종북'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요.

어느 평신도의 시국 관련 질문에 대해 대주교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주교님께서 대신 답변을 해주셨다더군요. "어느 지역에 가면 좌측에 있는 사람이 많고, 어느 지역은 우측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교회마저 종북 논란에 휩싸여버린 현실은, 주교님의 두루뭉술한 답변처럼 좌우가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의 문제입니다.

한국의 천주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내몰리게 된 걸까요. 끝으로, 고해하듯 말씀 올립니다. 박창신 신부님이 동료 사제로부터 교황청에 고발당하고 검찰에 의해 구속될 위기에 처한 현실인데도 '침묵'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대주교님이 꿈꾸시는 교회 공동체에서 평신도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2013년 11월 28일

서부원 안젤로 올림


태그:#가톨릭, #박창신 신부, #염수정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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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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