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디지털카메라의 붐이 일어날 무렵 엄마를 졸라 처음으로 dslr을 사서 동호회 활동을 했다. 조리개가 뭔지도 모르던 그때 잘빠진 카메라 한 대 들고 출사라는 것을 다니며 나도 트렌디한 여자라는 허세를 부렸다. 보통 서울에서 출사지를 꼽는다면 뻔한 몇몇의 포인트가 있지만 그 중 출사지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인사동 , 북촌에서의 이동이 편리하고 경복궁 내 화려한 건물들이 많아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필수코스처럼 꼭 한번은 가보는 출사 포인트가 되었다.

필자도 물론 첫 동호회 출사는 경복궁이었다. 셔터만 누르면 모든 것이 작품처럼 보이는 줄 알았던 그때 궁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나름의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 이후 사진에 대한 흥미가 연애 쪽으로 옮겨졌을 때도 필자는 어설픈 도시락을 싸들고 경복궁을 거닐며 연애에 불을 지폈다. 또한, 엄마와 날씨 좋은 날 인사동에 들러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경복궁에 들러 이런저런 속 이야기를 하며 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듯 필자에게 궁이란 이렇게 가깝고도 가볍게 그리고 무심한 곳이었다.

무뚝뚝한 남자의 사랑 표현방법

며칠 전 우연한 기회에 한 문화강좌에서 열리는 궁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많지 않은 참가비와 길지 않은 시간에 적당한 산책코스로 좋겠다 싶어 별 생각 없이 신청을 했더랬다. 경복궁은 20살 때부터 줄창 다녔던 산책 장소였지만 궁에 대해 조금은 알아도 좋겠다 싶었다.

투어 날 공교롭게도 신청자는 나와 일행이 전부였고 단촐하게 경복궁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날 보았던 경복궁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한국역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필자의 느낌의 위주로 적은 글이니 역사적 해석은 배제하기 바란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품은 근정전
 북악산과 인왕산을 품은 근정전
ⓒ 조경희

관련사진보기


경복궁에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근정전은 왕이 아침에 일어나, 지금으로 말하자면 조회를 했던 곳이다. 왕은 근정전 뒤에 자리 잡은 사정전에서 업무를 보았고 남은 업무나 휴식을 위해 사정전 뒤에 자리 잡은 강령전에서 보았다.

이 강령전 뒤에는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다. 교태전. 수없이 들어왔지만 투어 가이드에서 듣는 "교태전"과 "왕비"는 음흉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웃고 넘어가 준 가이드가 감사하지만 교태란 불경하기가 그지 없는 내가 생각하는 교태가 아니라 왕과 왕비의 교류를 뜻한다.

교태전의 문은 다른 전과는 다르게 문은 4짝으로 문고리는 안으로 향해 있다. 여자들이 거처하는 교태전에 편의성과 안전을 위해서겠지만, 왕비가 왕과의 다툼 등으로 왕을 보고 싶지 않을 때 안에서 걸어 잠궈 '당신과는 오늘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왕을 거부하는 왕비? 궁 안에서 왕의 손길만 바라는 작은 꽃인 줄 알았는데 그녀도 우리와 같은 남편에게 화를 내는 여인이었다니, 지난 세월 끝자락에 있는 왕비에게 찡긋하고 '저도 알아요~' 하는 마음을 보냈다.

교태전 바로 뒤에 보면 작은 동산이 하나 있다. 알고 보지 않으면 그저 작은 굴뚝뿐이라 동산이라 했을 때 '어디요?' 하고 반문을 했다. 참으로 짧은 눈이다.

태조가 왕비를 위해 지었다는 아미산 동산에 있는 아미산 굴뚝은 보물로 지정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태조가 왕비를 위해 지었다는 아미산 동산에 있는 아미산 굴뚝은 보물로 지정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 조경희

관련사진보기


아미산 공원이라 이름 지어진 이곳은 태조가 왕비를 위해 선물한 동산이다. 왕은 궁궐의 대부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지만, 왕비는 궁궐 내에서도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안쓰럽게 여긴 태조는 왕비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고자 동산을 선물했다.

봄이면 꽃이 피어 더욱 아릅답다는 아미산 동산은 소담하고 아름다웠다. 천천히 동산을 거닐며 태조의 마음을 느꼈을 왕비. 그녀가 밟은 동산의 흙 하나 풀 하나가 참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교태전 뒷편에 숨겨진 이곳은 왕비를 향한 왕의 마음이 달아날까 아쉬워 교태전이 꼭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저에게도 소중해요

교태전을 지나 대부분은 바로 옆에 자리한 경회루를 보게 되며 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되돌아 나가기 바쁘다. 하지만 경북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 건청궁이 남아 있다. 건청궁은 교태전 뒤편을 따라 여자 보폭으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다. 다른 전들이 비교적 가깝게 있는 것에 비하면 꽤 먼 거리이다. 건청궁을 향해 걸으며 '아 궁궐이란 매우 넓구나'라고 느꼈을 정도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조금은 다른 양식의 건물이 보인다. 청나라의 양식으로 보이는데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이다. 집옥재의 왼편으로 보면 소박한 사대부 집 양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건청궁이다.

건청궁에 들어가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경복궁을 둘러보고 아픈 다리를 쉬어 가는 사람들이였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나 역시 저들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 지어진 쉼터에서 좀 쉬어가지 했겠지.

건청궁은 1909년 일제에 의해 전소되어 터만 남았다가 2006년 재건축 되어 세월 흔적이 사라져 마음이 아리다.
 건청궁은 1909년 일제에 의해 전소되어 터만 남았다가 2006년 재건축 되어 세월 흔적이 사라져 마음이 아리다.
ⓒ 조경희

관련사진보기


건청궁은 매우 소박하다. 앞서 본 전들의 화려함에 한껏 충혈되어 있던 눈을 지긋이 눌러 주는 소박함과 고요함이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사비를 들여 조금씩 이 건청궁을 지었다. 적은 돈이기도 했지만 건설에 투입되는 백성들의 노고를 생각해 기존 전들과는 다르게 간결하다. 그래서인지 건청궁을 보고 있으면 담백한 양식에 마음이 평안해졌다. 고종의 아내인 명성황후는 남편이 어렵게 지은 건청궁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건청궁에 서서 보면 바로 앞에 자리 잡은 향원정이 보이는데 궁 안팎으로 시끄러웠던 그 시기 부부는 손을 꼬옥 붙잡고 향원정을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시대의 칼날에 맞서 당당한 기백을 보였던 명성황후가 이렇게 소박한 궁을 좋아했다니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눈빛이 느껴진다. 명성황후는 바로 이곳 건청궁에서 마지막을 맞이한다. 남편이 아버지 몰래 조금씩 지어나간 소중한 곳. 남편의 마음을 알기에 그녀도 기꺼이 마음에 담았던 건청궁에서 그녀는 일제의 만행에 꽃을 떨군다.

건청궁 앞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향원정. 바라만 보아도 이름처럼 향기가 멀리 퍼지는 것 같다.
 건청궁 앞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향원정. 바라만 보아도 이름처럼 향기가 멀리 퍼지는 것 같다.
ⓒ 조경희

관련사진보기


건청궁에서 보는 향원정을 마지막으로 경복궁 투어는 끝이 났다. 필자는 궁궐에서 선조의 지혜도 보았고 시대의 아픔을 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궁궐을 나오는 발걸음을 붙잡는 것은 왕비의 헛헛함을 달래주려 동산을 만드는 태조의 모습, 대원군과 외세의 맞서던 명성황후가 아닌 남편이 지은 궁을 소중하게 여기던 조선의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역사의 앞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날 내가 보았던 궁궐에서의 사랑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태그:#경북궁, #교태전, #향원루, #왕, #왕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