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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회식이라 저녁 먹고 갈게."

손에 쥐고 있던 장바구니를 툭 떨구었다. 남편 저녁은 차려 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퇴근하자마자 부랴부랴 장을 보고 이제 막 현관문을 들어선 때 온 남편의 문자. 나 혼자 먹기 위한 식사를 굳이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냉장고에 재료를 대충 쌓아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상가에서 김밥이나 한 줄 사 먹자라는 심산에서였다.

옆집 아이에게 길 묻는 아저씨, 본능적으로...

상가 앞 편의점까지 왔을 때, 묘한 풍경 하나를 목격했다. 한 중년의 아저씨가 옆집 꼬마 아가씨에게 "여기서 강변역에 어떻게 가니?"라고 묻고 있었다. 10살 안팎의 옆집 아이는 "여기 바로 앞 횡단보도만 건너시고 큰 길 따라 쭉 가시면 강변역이에요"라고 똘똘하게 대답했다.

아이의 말대로 아파트 상가에서 강변역으로 가는 길은 매우 쉬웠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정면에 강변역이 뻔히 보였다. 더구나 강변역은 지하에 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으로 철로가 놓여진 곳이라 역 자체가 지상 위로 보이고 규모도 꽤 크다. 보이지 않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저씨는 "아저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멀지 않으면 데려다 주지 않을래?"라고 말했다.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내가 애먼 사람 의심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20미터쯤 갔다가 다시 좌회전해서 50미터, 그 앞에 있는 서점에서 정면으로 섰을 때 오른쪽으로 나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시면 역이 있다' 정도로 어려운 길도 아니고 너무나 단순한 길을, 성인도 아니고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는 건 뭔가 의심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아이가 "네"라고 말하는 찰나, 얼른 달려가서 옆집 아이의 손을 잡았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한 지는 2년 10개월. 오전 8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나는 새벽 6시 30분이면 집을 나섰고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저녁 8시는 넘어야 집에 들어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웃과 교류는 없었고, 동네에 어떤 일이 있는지는 물론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가끔 주말에 쓰레기를 버릴 때, 어딘가 놀러갈 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고 그 집에 예쁘장한 10살 안팎의 큰 딸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나이 터울이 꽤 날 둘째 딸이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물론 옆집 아주머니도 나도 엘리베이터 앞에 함께 서서 그것을 기다리기만 할 뿐, 서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현대 아파트의 이웃이란 어색하고 대면대면했다.

나는 이웃집 아이에게 길을 묻는 수상한 아저씨와 같은 '낯선' 존재였다. 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19일 오후 경기도 용인 신리초등학교에서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는 6학년 학생들 모습.
 나는 이웃집 아이에게 길을 묻는 수상한 아저씨와 같은 '낯선' 존재였다. 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19일 오후 경기도 용인 신리초등학교에서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는 6학년 학생들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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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이 여자아이에게도 안면이 전혀 없지만은 않았는지 잠자코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아저씨에게 "요 바로 앞 횡단 보도 보이시죠? 저것만 건너면 정면에 역이 바로 보여요. 데려다 드려야 할 정도로 어렵지 않아요. 바로 보이니까"라고 말했다. 그 아저씨는 뭔가 당황한 모습으로 "네, 네"하며 자리를 피했다. 김밥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내가 왜 그 곳에 왔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바로 아이에게 "괜찮니?"라고 묻고는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는 건 정말 나쁜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혼자 있을 때, 모르는 어른이 와서 함께 어딜 가자거나 하면 절대로 함께 가서는 안돼. 알겠니?"라고 말했다. 그 순간 아이의 대답은 날 당황케 했다.

"난 사실 아줌마도 우리 동에 사는 거 빼고는 잘 모르는데요......"

말 끝을 흐리는 이 아이 입장에서는 낯선 어른이 '낯선 어른을 조심하라'는 말을 한 걸로 밖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 화끈 달아오르며 '내가 정말 이웃에게 무심한 인간이었구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만이라도 먼저 웃으며 인사를 했더라면'이라며 후회를 했다.

"사실 아줌마도 잘 모르는데"... 충격이었다

아이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졌다. 집에 들어와 다시 소파에 풀썩 쓰러졌는데, 다시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난 위험인물은 아니었고, 이런 오지랖은 좋은 것이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도무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물이나 한잔 벌컥벌컥 들이킨 후, 아무 의미 없이 TV를 틀었다. <응답하라 1994>가 방영되고 있었다.

생각없이 웃으며 들여다 보다 그 시절의 내가 생각이 났다. 90년대의 나는 초등학생이었고(그때는 국민학생이었을까?) 학교에서 갑자기 열이 심하게 나 조퇴를 했다. 집까지 겨우겨우 걸어왔는데 집에는 엄마가 부재중이었다. 열쇠도 경비실에 맡겨두지 않으셨다. 그때의 난 주저없이 옆집 벨을 눌렀고 옆짐 아주머니가 날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해열제를 주시고 물수건을 갈아주시며 재워주셨다.

<응답하라 1994>에서 해태가 "아랫동네에선 다 그렇게 부른다. 내 엄마도 엄마, 내 친구 엄마도 엄마"라고 했던 것처럼, 그 시절의 난 내 엄마도 엄마, 엄마가 없을 땐 옆집 아주머니도 엄마였다. 내가 우리 엄마와 같았다면, 그때의 옆집 아주머니와 같았다면 오늘처럼 "난 사실 아줌마도 우리 동에 사는 거 빼고는 잘 모르는데요......"라는 말을 듣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딩동."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라고 물으며 현관 문 구멍으로 밖을 살폈다. 키큰 어른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조금 전의 옆집 여자 아이의 얼굴은 확연히 보였다. 황급히 문을 열었더니 옆집 아주머니가 딸을 데리고 서 있었다. 서로 데면데면한 관계이기에 옆집 아주머니도, 나도 서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딸 아이 말이 옆집 아주머니가 자기 위험할까봐 도와줬다고 하더라구요"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아니에요, 제가 오지랖이 넓어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의심 갈 만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뿐이에요"라고 답했다. 약 3~5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곧 아주머니가 먼저 활짝 웃으며, "그래도 옆집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정말 나쁜 사람이었는지도.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저녁으로 했던 건데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지만 간식으로라도 조금 드세요. 제 성의입니다"라며 잡채 한 접시를 내미셨다. 감사히 먹겠다고 하며 서로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갑자기 식욕이 돋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혼자 앉아 드라마를 마저 시청하며 잡채를 먹었다. 고소하고 달달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당신은 어떤 이웃입니까?

같은 공간에 살지만 서로 다른 입장과 생활 속에서 단절됐던 이웃이 정체불명의 살인범으로 인해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스릴러 영화 <이웃사람>.
 같은 공간에 살지만 서로 다른 입장과 생활 속에서 단절됐던 이웃이 정체불명의 살인범으로 인해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스릴러 영화 <이웃사람>.
ⓒ 영화사 무쇠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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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남편이 일찍 왔다. 기분좋게 저녁 식탁을 차리고 메인 요리였던 도토리묵 무침을 넉넉히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의 잡채 접시에 도토리묵 무침을 담아 옆집에 가져다 주었다. 전날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과 인사가 오갔다. 이게 2주 전쯤의 일이다.

이젠 엘리베이터 앞에 만나면 다정스레 인사를 나눈다. 남편까지도. 그리고 서로의 전화번호를 알았다. 집을 갑자기 비우게 되어 신문을 치워달라든가, 배달 우유를 맡겨둔다든가 등의 이웃끼리 할 수 있는 사소한 부탁을 서로 들어주며 그렇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가는 중이다. 옆집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온 날에는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이 난다. '이제 내 아이도 내가 없을 때 집에 오게 되어도 문을 두드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구나'하고.

뉴스를 틀 때마다 비일비재하게 고독사에 대한 소식이 들려온다. 이웃과 조금의 왕래가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아동학대 사건이라던가 이웃과 조금만 친했더라면 좋게 해결될 수 있었던 층간 소음 갈등 등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웃을 가진 모든 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옆집 아주머니처럼 먼저 벨을 눌러보라고. 나처럼 화끈거릴 일 없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이웃에게 먼저 미리미리 인사를 해 보라고. 그들 모두가 나의 재산이 되고 내 보험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곧 내 아기의 백일잔치가 우리 집에서 열린다. 그날 하얀 백설기 예쁘게 포장해 들고 용기 있게 윗집, 아랫집 벨을 눌러보아야겠다.


태그:#이웃,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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