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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연전에 해남에서 오신 농부 부부가 '농사는 별의 노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래 '곡(曲)'자와 '별 진(辰)'이 합쳐져서 농사를 일컫는 '농(農)'자가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이 부부의 말씀에 고개를 꺼덕였습니다. 별의 기운을 받지 않고는 결코 작물이 자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별의 기운은 바로 노래의 리듬으로 만물에 스밀 것입니다. 농부는 그 별의 노래에 따라 함께 신명의 춤을 추는 것이지요. 이제 올해는 그 춤을 잠시 그쳐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서리가 내렸거든요.

종자를 담은 들깨의 통꽃 자루들 사이에 아침의 햇살에도 녹지 않은 서리가 붙었습니다.
 종자를 담은 들깨의 통꽃 자루들 사이에 아침의 햇살에도 녹지 않은 서리가 붙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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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에 올해 첫 서리가 내린 것은 10월 25일. 연약한 호박잎은 이 무서리에도 검게 말라버렸고 늦게 열매를 맺었던 애호박의 녹색 피부는 하늘하늘 녹았습니다.

무서리만으로도 호박잎은 죽음에 이르는 타격입니다.
 무서리만으로도 호박잎은 죽음에 이르는 타격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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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이 모든 작물을 거둬들여야 합니다. 농부의 가을은 고개 들면 눈에 가득한 만산홍엽을 가슴에 담을 시간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2

모티프원 옆에서 대지를 텃밭으로 일구고 계신 도시농부 김성규 선생님의 발길도 잦아졌습니다. 대지에 깔린 이불처럼 펼쳐진 배춧잎도 묶어야하고 꼬투리가 벌어지는 쥐눈이콩도 따야합니다.

쥐눈이콩을 거두고 계신 김성규선생님.
 쥐눈이콩을 거두고 계신 김성규선생님.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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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심어본 마는 땅위의 무성한 잎과는 달리 뿌리는 수확할만한 게 거반 없었습니다. '헛농사 였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얼굴은 '허허' 웃는 표정입니다.

소출에 관계없이 농부는 자연의 결과를 수용합니다. 텃밭을 가꾸는 도시농부인 김선생님에게도 그 농부의 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소출에 관계없이 농부는 자연의 결과를 수용합니다. 텃밭을 가꾸는 도시농부인 김선생님에게도 그 농부의 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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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농사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 작물을 시도해보는 김 선생님 덕에 저는 절로 농사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3 

김 선생께서 서울에서 오시는 날, 저는 아주 특별한 점심을 먹습니다. 김 선생님은 매번 사이참으로 콩통조림과 막걸리를 가지고 오시는데 꼭 2개씩입니다. 그중의 하나씩은 항상 제몫으로 내놓으십니다. 

저는 오후 2시까지도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먹지 않은 상태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께서 오셨고 어김없이 삶은 콩 한 캔과 장수 생막걸리 한 통을 건네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요기를 대신했습니다.

저의 '삶은 콩 통조림과 생막걸리' 점심식사는 김선생님이 텃밭일을 하기위해 오시는 날마다 봄, 여름, 가을에 계속되었습니다.
 저의 '삶은 콩 통조림과 생막걸리' 점심식사는 김선생님이 텃밭일을 하기위해 오시는 날마다 봄, 여름, 가을에 계속되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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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기가 올랐습니다. 무엇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나른했지만 무엇을 감각하기에는 더욱 좋아졌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나른함에 몸을 맡겼습니다. 정원에서 점차 붉어지고 있는 좀작살나무 잎이 이중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더욱 짙어보였습니다. 

#4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이생진 시인께서 시낭독을 하실 때면 압생트(absinthe) 술과 함께합니다. 스스로 귀를 자르게 한 발작증세를 유발했던 이 술은 이생진 시인뿐만 아니라 에두아르 마네, 기 드 모파상, 파블로 피카소, 애드거 앨런 포우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이 75도 술의 환각을 사랑했습니다. 아르튀르 랭보는 이 압생트가 가져다주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정원의 단풍나무가 온통 핏빛으로 변했습니다. 막걸리 점심으로 불콰해진 내 얼굴이 저 빛일까…….
 정원의 단풍나무가 온통 핏빛으로 변했습니다. 막걸리 점심으로 불콰해진 내 얼굴이 저 빛일까…….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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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이제 별의 노래에 맞춘 연주를 멈추어야하는 시기에 김 선생님이 건넨 막걸리가 압생트가 되어 저의 오후를 깨웠습니다. 서리가 칼날이 되어 호박잎을 죽이고 애호박의 껍질을 하늘하늘 시들게 하는 이 때 별의 노래가 더욱 쟁쟁하게 제 귀를 때립니다.

서리를 맞지 않은 애호박과 서리를 맞은 애호박(오늘쪽).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는 흰 얼음가루인 서리는 식물들의 세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백색입니다.
 서리를 맞지 않은 애호박과 서리를 맞은 애호박(오늘쪽).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는 흰 얼음가루인 서리는 식물들의 세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백색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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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죽음까지도 사랑해야지."

이제 한 세대를 마감하고 검은 죽음으로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콩줄기와 콩깍지. 이 검은 색깔의 죽음을 보면 죽음도 삶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제 한 세대를 마감하고 검은 죽음으로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콩줄기와 콩깍지. 이 검은 색깔의 죽음을 보면 죽음도 삶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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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서리, #농부, #텃밭,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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