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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중국에서 날아온 스모그 때문에 시야가 흐리더니 오늘(10월 30일)은 날씨가 매우 청명하다. 나는 물통을 들고 숭의전 약수터로 갔다. 숭의전 입구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즐겨 마셨다는 '어수정 御水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아직도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물맛이 좋아서 멀리 동두천, 의정부는 물론 서울에서도 약수를 뜨러 온다.

 

일주일에 물 한 통을 받아 식수로 마시고 있다. 집에서 나오는 임진강 수돗물도 깨끗하고 좋지만, 집에서 가까워 산책삼아 나와 물을 받은 뒤 숭의전 길을 걷곤 한다. 오늘은 비온 끝이라 그런지 날씨가 더욱 맑고 하늘이 푸르다. 어수정에 도착하여 먼저 물을 한바가지 떠서 꿀꺽꿀꺽 마셨다.

 

 

"어허이~ 시원하고 달고 맛이 있군!"

 

나는 마치 태조 왕건이나 된 듯 물맛에 매료되어 헛기침을 해본다. 시골에서 사는 맛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서 시골생활이 좋다. 이런 맛 때문에 도시에서의 편리한 생활도 버리고 시골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또 좀 불편하면 어떤가.

 

숭의전 입구에는 노란 은행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홍살문에 드리운 은행잎이 무척 곱다. 성터의 흔적이 남은 돌담길은 금방 빗자루로 쓸어서 깨끗하지만 곧 낙엽이 떨어져  뒹굴기 시작한다.

 

"아주머니 그냥 두세요. 낙엽이 깔려 있는 것이 더 운치가 있지 않나요?"

"네, 그래도 제가 할 일이라서요."

 

하긴 그렇다. 할 일이 있어야 월급을 받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쓸면 좋을 텐데. 돌담길을 따라가면 곧 숭의전지가 나온다.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네 분의 고려왕과 고려 충신 16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당건물보다 그 앞에 거대하게 서있는 느티나무 단풍이 너무나 환상적이다. 아직도 고려를 지키려는 듯 도열해 있는 600년 된 느티나무는 인고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저 느티나무는 고려시대부터 한반도에 흐르는 역사를 알고 있겠지. 울창하게 뻗은 가지마다 한이 맺힌 듯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용틀임을 하듯 굽이쳐 뻗어 올라간 나무줄기가 매우 기운차게 솟아올라있다.

 

숭의전지를 지나면 바로 잠두봉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누에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잠두봉에 오르니 푸른 임진강 물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부여의 낙화암과 비슷한 절벽이다.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다보니 순간 현기증이 난다. 눈을 들어 강을 바라보니 멀리 썩은소에서 흘러내려오는 푸른 임진강물이 예사롭지 않다.

 

 

 

썩은소라... 이름도 참 괴이하다. 이곳 임진강변에는 고려 태조 왕건에 얽힌 '썩은소의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이 썩은소의 전설을 음미하며 '경기도 평화누리길'을 걷는 것도 백미 중의 하나다. 세상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익히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오늘은 청명한 가을 날씨와 숭의전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워 썩은소의 전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썩은소는 미산면 아미리(峨嵋里) 임진강변에 있는 소인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등극하면서 고려왕족인 왕씨(王氏)를 멸족시키려 하였다.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갖가지 인연에 따라 변성(變姓)이라도 하여 생명을 보존하고자, 전씨(田氏, 全氏)·김씨(金氏)·옥씨(玉氏)·금씨(琴氏)·박씨(朴氏) 등으로 변성을 하고 피신을 하였다. 그 중에 뜻 있는 왕씨 몇 사람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이렇게 변성을 하더라도 우리 조상님은 한 분이니, 왕건 태조(王建太祖)  할아버지의 신주는 우리들이 안전한 곳에 편안히 머무시도록 해 드립시다."

 

하여, 돌로 배를 만들어 송도에 안치된 왕건의 신위를 그 돌배에 모신 후 송도 앞 예성강에

띄우며 신위를 향하여 말하기를,

 

"이곳 송도 땅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돌배를 타시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하소서."

 

그 돌배는 임진강과 합류 지점에 도달하여 임진강을 역류하여 강원도 철원과 경계인 황해도 안악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강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여, 지금의 미산면 동이리 임진강 어느 벼랑 밑에 멈추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신위를 모신 돌배를 차마 홀로 떠나보낼 수 없어 이 돌배에 같이 타고 있던 왕씨 몇 사람들은,

 

"이 곳을 피신 장소로 태조 할아버지께서 정하신 듯하니, 이곳에 모시도록 합시다."

 

 

그렇게 결정한 뒤 배에서 내리면서 쇠로 만든 닻줄을 매어 놓고, 근처에 사당을 지을 명소를 물색하여 정한 후 강가에 나가 보니, 하룻밤 사이에 쇠 닻줄이 썩어 끊어지고 돌배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급히 하류 쪽으로 가서 찾아보니 그 곳에서 4㎞쯤 떨어진 곳의 '누에머리[蠶頭]'라는 절벽에 붙어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곳 절벽 위에다 사당을 지어 태조 왕건의 신위를 모시고 '숭의전(崇義殿)'이라고 이름하기로 하였다. 그 곳이 지금의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 자리라고 한다.

 

지금도 청명한 날에는 누에머리 절벽 밑에 가라앉은 돌배가 보인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썩은소의 유래는 하룻밤 사이에 쇠닻줄이 썩었다고 하여 '썩은쇠'라고 불리던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말소리가 변하여, 오늘날에는 '썩은소'로 불리어지고 있다고 한다.(참조 : 연천군청 홈페이지)

 

 

오늘따라 강변에는 나룻배 한 척이 매달려 있다. 돌을 실은 배는 아니지만 썩은소의 전설과 퍽 어울리는 풍경이다. 투명한 강물에 비치는 반영도 무척 아름답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숭의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단풍이 다 지기 전에, 어수정에서 왕건이 마신 약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썩은소의 전설을 따라 '평화누리길'을 걸어보는 것도 가을 백미 중 하나이리라.


태그:#썩은소의 전설, #숭의전지, #임진강, #숭의전지 느티나무, #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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