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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상>의 한 장면.
 영화 <관상>의 한 장면.
ⓒ 주피터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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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께서는 아흔한 살에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였다.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년간 치매로 고통을 당하셨다. 할머니의 치매는 지금 생각하면 그다지 중증은 아니었다. 정신이 온전하실 때가 많았다. 그럴 때 할머니께서는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 은균이는 나이 마흔이 되면 잘 풀릴 상이야. 그전에 힘든 일들이 적지 않겠지만…."

어린 마음에 혹시나 해서 왜 그렇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언젠가는 그 힘든 일들이 무엇이냐며 대답을 채근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역시 알지 못할 미소만 살짝 띨 뿐이었다.

마흔 되면 잘 풀릴 거라던 할머니 말씀

턱 밑에 굵은 점이 있는, 45년 인생을 무사히 산 내 얼굴 아랫부분이다. 턱 밑 점은 보일락 말락 있는 게 좋은 것이라고 하신 할머니 말씀도 기억난다. 내 턱 밑 점이 딱 그렇다. 내 얼굴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눈여겨보지 않으면 인지하기 어려운 미묘한 지점에 놓여 있다.
 턱 밑에 굵은 점이 있는, 45년 인생을 무사히 산 내 얼굴 아랫부분이다. 턱 밑 점은 보일락 말락 있는 게 좋은 것이라고 하신 할머니 말씀도 기억난다. 내 턱 밑 점이 딱 그렇다. 내 얼굴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눈여겨보지 않으면 인지하기 어려운 미묘한 지점에 놓여 있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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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내 턱 밑의 굵은 '점'을 어루만지며 바로 그게 '복점' 노릇을 할 거라는 말씀을 하신 기억도 난다. 할머니의 그 말씀 때문이었을까. 간혹 급하게 면도를 하다가 예의 점에 상처를 입게 되면 스스로 화들짝 놀란다. 할머니께서 말한 귀한 '복점'에서 피가 나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나는 그러는 내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면서 실소를 머금곤 한다.

'관상'은 수명이나 운명 따위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사람의 생김새나 얼굴 모습이다. 그런 사람의 얼굴을 보고 운명이나 성격, 수명 따위를 판단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언뜻 보면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대체 얼굴 생김새로 어찌 운명이나 수명을 알아맞힌단 말인가. 한바탕 재밋거리야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종국에는 사술(邪術)에 지나지 않는 게 관상술이 아닐까.

그런데도 고래로 관상에 대한 관심은 결코 식지 않는다. 스스로 철저하리만치 합리적인 이성론자를 자처하는 나조차도 할머니의 말을 지금껏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거쳐온 삶의 역정이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서른아홉 살에 큰 병을 앓았다. 폐결핵이었다. 보름 정도 병가를 내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 병 탓에 그때 아직 어렸던 큰딸은 10여 개월이나 수개의 알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확진 당시의 내 상태는 심각했다. 병원의 담당 과장은 조금이라도 늦어졌더라면 완치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박사학위논문을 탈고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바로 뒤였다.

지금 있는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군산과 서울을 오가는 강행군 속에서 마친 대학원 과정이었다. 그러고는 곧장 쉴 틈도 없이 2학년 담임을 맡아 야간자율학습이며 보충수업을 하게 되었다. 몸이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면역력이 떨어진 몸에서 결핵균이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폐결핵과 '자뻑'사고에도 희망 잃지 않은 이유

그 삼 년 전, 서른여섯 살에도 큰 일이 있었다.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속칭 '자뻑' 사고를 냈다. '자뻑' 사고라며 웃고만 말기에는 너무나 공포스러운 사고였다.

비가 억수같이 내린 날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빗줄기가 거센 밤이었다. 자정께에 가까워지고 있었을까. 집에는 신혼집 살림 준비를 위해 아내 될 사람이 와 있었다. 그 사랑하는 여인을 한시라도 바삐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굵은 빗줄기를 뚫듯이 거세게 차를 몰았다.

어느 순간 차가 기우뚱했다. 그리고 불과 몇 초만에 차는 세 번인가 네 번인가를 회전했다. 차가 회전하는 그 몇 초 사이에 나는 핸들을 꼭 붙든 채 천국과 지옥을 떠올렸다. 집에 홀로 있을 사랑하는 여인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제발 전복되지만 않게 해 주옵소서. 그런 기도가 저절로 일었다.

그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을가. 차는 전복되지 않았다. 서너 번의 회전 놀이(?)를 한 차는 도로 오른쪽의 가드레일을 두어 번 부딪친 후 도로 1차선에서 주행방향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서버렸다. 저 멀리서 뒤따라오는 차의 전조등이 비쳤다. 다시 한번 두려움이 엄습했다. 와서 부딪치면 어떻게 하나. 나는 시동을 켤 생각도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잠시 후에 그 차에서 비상등이 켜졌다. 속도도 점점 늦춰졌다. 내 차에 가까이 온 그 차가 경적을 울려주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시동을 켜보세요. 이렇게 있으면 위험해요. 차에서 내리든지 하셔야죠." 그 말을 듣자마자 시동을 켰다. 차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살아났다. "고맙습니다. 그냥 가셔도 돼요."

그렇게 해서 나는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나들목 근처에서 군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사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 사랑하는 여인은 장난하는 것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했다. 그 한밤중의 '리얼'한 '자뻑' 사고를 나 자신도 꿈결의 일인 듯 느꼈으니까.

결핵 확진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리고 빗속 '자뻑'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군산으로 오는 길 내내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은균이는 나이 마흔이 되면 잘 풀릴 상이야. 그전에 힘든 일들이 적지 않겠지만…"

할머니의 음덕이었을까, 아니면 관상 때문이었을까. 그 무서운 병마와 무시무시한 사고로부터 별다른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게(?!) 된 '운명'이 스스로 예사롭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관상의 힘이 작용했고, 보이지 않는 운명이란 게 과연 있었다면 말이다.

이 얼굴 이 관상으로 45년 잘 살아왔습니다

만년의 백범 김구 선생
 만년의 백범 김구 선생
ⓒ 백범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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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은 한때 관상쟁이가 될 뻔했다. 청년 시절, 가난한 상민 자식으로 과거시험에서 거듭 낙방한 그에게 그의 부친이 관상쟁이가 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범은 <마의상서(麻衣相書)>라는 관상책을 깊이 공부했다. 당나라의 마의선인이 쓴 <마의상서>는 관상학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매뉴얼'이었다.

하지만 백범은 크게 실망했다. 매뉴얼을 따라 자신의 상을 분석해 보니 살인, 풍파, 불안, 비명횡사 등의 온갖 좋지 못한 '살(煞)'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백범은 하지하(下之下)의 최악의 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관상을 본다는 게 말이 되겠느냐며 한탄했다. 그때 문득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상호불여시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관상 좋은 게 몸이 튼튼한 신상(身相)만 못하고, 신상 좋은 게 마음씨 좋은 심상(心相)만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때부터 백범은 어떻게 하면 좋은 심상을 기를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결연히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데 충심을 다하자고 다짐하게 된다. 우국충정을 향한 백범 선생의 머나먼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마의선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남겼다. 어느 날 마의선인이 한 젊은이의 상에서 죽음을 엿보고는 그 사실을 일러주었다. 젊은이는 실의에 빠져 개울가에 앉아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던 중에 마침 물에 떠내려가는 개미 떼가 눈에 보였다. 젊은이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개미들을 모두 건져내 살려주었다. 며칠 후, 마의선인이 젊은이를 다시 우연히 만났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젊은이의 상이 귀하게 바뀌어 있었다.

할머니께서 내게 하신 '예언 아닌 예언'을 다시 떠올려 본다. 할머니께서는 왜 내게 관상이 가져올 좋은 일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왜 마흔 이전에 힘든 일들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굳이 미리 알려주셨을까. 관상이 말하는 운명을 따른다면, 나는 그 마흔 이전의 힘든 일들을 무사히 마치고 '잘 풀릴' 텐테 말이다.

할머니께서는 혹시 내게 인생의 힘든 고비나 앞길이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서 쉽게 아파하거나 쓰러지지 말라는 교훈을 주려 하신 것은 아닐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강하고 곧은 심상을 주문하하신 게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문득문득 떠올리면서도 그동안 관상이나 사주 따위에 결코 휘둘리지 않았다. 점집은커녕 점집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대신 나는 무한한 낙천과 긍정으로 무장한 채 이 힘든 세상의 한 고비를 지금껏 잘 버텨오고 있다. 그런 심상을 가질 수 있게 해준 할머니가, 그래서 자주 그리워진다.

전직 정치인들의 얼굴. 이들 관상은 어떠한가.
 전직 정치인들의 얼굴. 이들 관상은 어떠한가.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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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 정치인들의 관상을 통해 정치 지형을 엿보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운명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며, 성형수술을 통해 관상을 좋게(?) 바꾸고,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정치가, 그리고 우리들 각자의 운명과 일상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술이라도 거하게 마신 뒷날엔 더욱 가관으로 변하는 내 얼굴이 나 자신이 보기에도 혐오(?)스럽다. 그 퉁퉁 부은 얼굴이며, 부스스한 머리 꼬락서니라니. 도대체 그 얼굴로 무슨 일을 해먹겠느냐는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도 그 얼굴로 45년을 나름대로 꿋꿋이 살아왔다. 무섭고 두려운 병마와 사고로부터도 벗어난 얼굴이다. 그러니 내 관상은 그런 대로 봐줄 만하지 않는가.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심상의 가르침 덕분이 훨씬 크겠지만 말이다. 관상을 위해서든, 신상이나 심상을 위해서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마음 씀씀이를 거듭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한 어두운 시절이다. '심상보다 더 좋다는 덕상(德相)을.' 이 나라 대통령님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어 하는 말이다.


태그:#관상, #외할머니, #운명, #백범 김구, #심상(心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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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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