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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예쁜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하는가?
▲ 호박꽃 누가 이 예쁜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하는가?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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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못 생긴 꽃의 대명사로 '호박꽃'을 이야기한다. 속담 중에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이 이런 인식을 대변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은 아침에 갓 피어나는 호박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이들의 무지(無知)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화창한 아침 햇살을 받고 피어난 호박꽃을 본 사람이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갓 피어난 호박꽃에 벌이라도 찾아들면 호롱불을 밝힌 듯한 호박꽃의 넉넉한 품에서 행복해하는 벌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라! 자연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얼마나 큰 풍요로움을 주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호박은 꽃도 이파리도 열매도 큼지막하다. 넓은 호박잎에 가려진 애호박을 찾기란 보물찾기와도 같다. 애호박을 그리도 샅샅이 땄건만, 어느 틈엔가 늙은 호박이 떡하니 자리 잡고 "나 여기 있소!" 당당하게 사람의 눈길을 끈다. 이쯤 되면, 애호박으로 먹기도 그렇고 해서 늙을 때까지(다 익을 때까지) 뒀다 따는 게 좋다. 애호박은 애호박대로, 늙은 호박은 늙은 호박대로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호박순은 하루가 다르게 퍼진다. 저렇게 갓 올라온 호박순을 삶아 된장이나 양념장을 더해 쌈으로 먹으면 맛나다.
▲ 호박순 호박순은 하루가 다르게 퍼진다. 저렇게 갓 올라온 호박순을 삶아 된장이나 양념장을 더해 쌈으로 먹으면 맛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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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은 열매만 먹지 않는다. 연한 호박잎을 쪄서 쌈장과 함께 쌈을 싸먹으면 밥 도둑이 따로 없을 정도다. 연한 줄기에 작은 호박이라도 곁들여 있으면 그 또한 얼마나 맛난지!

호박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다양하다. 먼저 호박고지가 있다. 애호박을 얇게 썰어 말린 다음 나물로 먹는다. 늙은 호박은 굵게 썰어 말린 다음 백설기나 시루떡 같은 곳에 넣을 수도 있다. 호박무름이라고도 한다. 애호박은 풋풋한 나물의 맛이 나지만, 늙은 호박에서는 단맛이 난다. 동글동글 말라가는 호박고지나 가을 녘 빨랫줄에 걸려 말라가는 호박고지는 아름다운 사진 한 컷의 풍광 그 자체였다.

된장국에 넣어 먹거나 새우와 함께 볶아 먹으면 딱 좋을 만큼의 애호박
▲ 애호박 된장국에 넣어 먹거나 새우와 함께 볶아 먹으면 딱 좋을 만큼의 애호박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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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김치는 흔하지 않지만, 애호박과 호박순을 썰어서 양념을 넣고 버무려 담근 김치다. 주로 간장으로 간을 하지만, 고춧가루와 간장을 적당하게 조합하면 색다른 김치로 밥상에 올릴 수 있다. 또, 빼어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호박범벅이다. 호박과 팥·콩 등을 섞어 찹쌀가루를 넣고 끓이면 별식이 된다. 찹쌀가루 대신 밀가루를 널어 끓이기도 했으며,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에는 아주 좋은 영양식이 바로 호박범벅이었다. 한겨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박범벅 한 그릇에 살얼음이 동등 뜬 동치미 한 그릇이면 행복한 겨울밤을 보낼 수 있었다.

호박씨는 또 어떠한가? 늙은 호박을 자르면 호박씨가 보석처럼 박혀있다. 잘 여문 놈은 종자로 두기도 하지만, 호박씨를 발려서 잘 말려뒀다 하나둘 까서 먹기도 하고 살짝 볶아서 먹기도 했다. 호박씨는 작아서 한입에 털어 넣는 기쁨을 맛보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까야 한다. 하나씩 먹는 맛도 좋지만, 한 줌 털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씹는 맛도 좋다.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 넣는다'는 속담은 '애써 모은 것을 한꺼번에 털어 없앤다'는 뜻도 있지만, 잣이나 호박씨나 해바라기씨처럼 작은 것을 한입에 털어 넣는 맛은 직접 그 작은 씨앗을 까는 수고를 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맛이기도 하다.

호박죽은 범벅과는 조금 다르다. 삶은 호박을 짓이겨서 팥이나 쌀가루를 넣어 끓이면 서양식 수프 같다. 물론, 호박 특유의 노란 빛깔은 천연의 색으로 호박죽을 먹으면 내 마음의 빛깔도 그렇게 은은한 아름다운 빛으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빛깔이다.

호박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 호박은 길죽하지 않고 둥근 종류의 호박이다.
▲ 호박 호박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 호박은 길죽하지 않고 둥근 종류의 호박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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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에 결혼을 해서 25년 동안 동고동락을 한 내 아내는 호박죽을 잘 끓인다. 위에 열거한 것 중에서 아내가 가장 맛깔스럽게 내어놓는 음식 중 하나다.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호박잎 삶은 것을 좋아하시고, 무엇보다도 서리를 맞은 후 다시 새순을 내고, 꽃을 피워 맺은 작은 호박이 들어간 것을 좋아하신다. 끝물, 호박은 서리를 맞으면 죽지만, 그 이후에 잠시나마 다시 생명을 얻어 열매를 맺은 그것이 가장 맛난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호박은 뭐하나 버릴 것이 없다.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니 여느 채소처럼, 가격이 폭등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서민을 위한 신의 선물이 아닐까 싶은 대목이다. 게다가 생김새는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하다. 세상만사 이렇게 살아가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일까? 모난 사람은 꺾이기 쉽지만, 동글동글 원만한 사람은 어디서나 살아남는다. 조금 바보스러워 보이고, 때론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살아남는 것이 잘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잘 익은 늙은 호박, 장식용으로도 훌륭하지만, 겨울에 호박범벅이나 호박죽을 만들어 먹어도 좋고, 껍질을 깍아 잘 말리면 시루떡이나 백설기 등에 넣어 먹을 수도 있다.
▲ 늙은 호박 잘 익은 늙은 호박, 장식용으로도 훌륭하지만, 겨울에 호박범벅이나 호박죽을 만들어 먹어도 좋고, 껍질을 깍아 잘 말리면 시루떡이나 백설기 등에 넣어 먹을 수도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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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에는 호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컹물컹한 듯도 하고, 씹는 맛도 없는 것 같아서 그랬다. 나보다 10년 연배인 형님은 호박을 좋아했다. '그게 뭐나 맛나다고?' 했는데, 나도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고부터 물컹물컹한 호박이 좋아졌다. 그전에도 먹긴 했으되 호박의 진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이제야 그 맛을 알게 된 것이리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이에 따라 좋아하는 음식도 달라지는 법이니까. 음식은 그냥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양념으로 먹는 것이다. 추억으로 버무려진 음식, 그것이 따뜻한 추억이면 더 맛날 것이다.

누가 그들을 못생긴 것의 대명사로 만들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못생긴 것이 얼마나 기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들 역시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 사이에서 못 생겼다고 손가락질받는 이들이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 그런 점에서 이 땅의 못난 사람들,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이들, 죄인들과 함께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했던 예수는 진짜 참사람이었다.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참사람.

호박지짐으로 먹기에는 조금 늙은 호박이지만, 이렇게 잘라 호박고지를 만들면 좋은 반찬이 된다.
▲ 호박고지 호박지짐으로 먹기에는 조금 늙은 호박이지만, 이렇게 잘라 호박고지를 만들면 좋은 반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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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에 호박고지가 말라간다. 제 몸에 있는 물기를 빼어낼수록 달아지는 비결, 나를 비워야만 더 충만해진다는 '텅 빈 충만'의 진리를 온몸으로 행하고 있다.


태그:#호박, #호박죽, #호박범벅, #호박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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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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