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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우리 땅에서 가장 흔한 나무이면서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기도 하다. 애국가는 물론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에도 등장하고, 한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데다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자란다. 그중 천연기념물(명목) 소나무는 이 땅의 대표적 자연유산으로 씩씩한 기개와 지조·충절을 상징한다. 명목 소나무의 장구한 수명, 크고 늠름한 자태, 아름다운 조형미는 그에 어울리는 여러 이야기들과 함께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소나무는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광화문·숭례문의 복원에 쓰인 금강송(혹은 황장목·춘양목)에서 해풍으로부터 바닷가 마을을 지켜주는 곰솔(해송), 내륙지방에서 자라는 육송(陸松), 한시에 흔히 나오는 낙락장송(落落長松), 조선시대 세조에게 벼슬을 받은 정이품송, 단종의 한과 슬픔을 간직한 관음송… 그중 백송(白松)이라는 소나무 이름이 눈길을 끈다. 한자처럼 하얀 소나무라는 의미 때문인지 호기심과 상상력을 일으키는 이름이다.

중국이 고향인 흰 소나무

백송은 어릴 적엔 회청색, 나이를 먹을수록 흰색을 띄는 희귀한 소나무다.
 백송은 어릴 적엔 회청색, 나이를 먹을수록 흰색을 띄는 희귀한 소나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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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은 어릴 때는 거의 푸른 빛깔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흰 빛깔이 차츰차츰 섞이기 시작한다. 점점 흰 얼룩무늬가 많아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하얗게 된다. 사람이 하얀 머리가 나면서 늙어가듯, 백송의 일생은 이렇게 하얀 껍질로 나이를 표시한다. 노거수(老巨樹)란 말이 잘 어울리는 나무다. 백송이란 이름 외에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불리며, 한글전용을 하는 북한 사람들은 흰 소나무라 부른다. 토종 생물의 생태계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여느 귀화식물과 달리 백송은 생장력이 약해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희귀식물이다.

백송은 북경을 비롯한 중국 중서 북부에만 자라는 특별한 나무다. 예부터 궁궐이나 사원 및 묘지의 둘레나무로 흔히 심었다고 한다. 현재 북경 계태사(戒台寺) 앞에는 당나라 초에 심었다는 나이 1300여년, 높이 18m, 둘레 6.4m에 이르는 거대한 백송이 자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중국에 간 사신이 갔다 올 때 가져와 심은 게 수백 년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수령이 오래될수록 줄기가 하얗게 되는 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밖에 자라지 않을 정도로 생장도 느리고 번식도 어려운 희귀한 나무지만 초록 껍질을 하나씩 벗어가며 결국엔 흰 얼룩무늬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나무다. 이렇게 자람이 늦고 흰 껍질이 독특해 웬만한 굵기의 백송은 특별 보호목이 될 정도다.

천연기념물은 순서와 중요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1호부터 10호 중에 여섯 점이 백송이란 사실은 그런 백송만의 특별한 속성을 나타내준다. 현재 남한에 다섯 그루, 북한은 개성에 한 그루의 백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들 중 충남 예산의 한 그루를 제외하면, 자라는 곳은 모두 서울 경기 지방이다. 중국 왕래를 할 수 있는 고위관리가 주로 서울 경기에 살았던 탓이다.

추사 김정희와 인연이 깊은 백송

국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서울 통의동 백송, 1990년 돌풍에 쓰러져 결국 그루터기만 남았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서울 통의동 백송, 1990년 돌풍에 쓰러져 결국 그루터기만 남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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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백송은 태풍에 쓰러지기도 하고 뿌리 주변의 복토작업 후 갑자기 고사하기도 했다. 서울에는 현재 두 그루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8호는 종로구 재동에, 제9호는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백송나무였던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은 1990년 돌풍에 쓰러진 후 고사돼 그루터기만 남았다. 이밖에도 천연기념물 제5호였던 서울 내자동 백송은 제6호였던 원효로 백송, 제7호였던 회현동의 백송이 고사돼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

추사 김정희는 백송과의 인연이 특별하다. 김정희의 증조 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사위가 되면서 지금의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이란 대저택을 하사받았고 김정희는 여기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열 살 전후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졸지에 대종가의 종손이 된다. 이곳은 원래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곳으로, 정원 한 구석에는 숙종 때 심어진 백송 한 그루가 이미 자라고 있었다. 김정희는 어린 나이에 받은 엄청난 충격을 백송을 어루만지며 달랬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으로, 1990년 7월 돌풍에 넘어져 버릴 때까지 살아있었다.

순조 9년(1809) 늦가을, 24살이 된 청년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북경에 가게 되자 수행원이 돼 따라나선다. 2개월 남짓한 북경 생활 동안 어릴 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백송이 시내 여기저기서 흔히 만날 수 있음을 기뻐했을 터. 귀국길에 그는 솔방울 몇 개를 골라 짐짝 속에 넣는다. 1810년 3월 중순 어느 날 충남 예산의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영의정을 지낸 고조 할아버지 김흥경의 묘소를 참배하고, 가져온 백송을 정성껏 심는다. 그 백송은 오늘날 천연기념물 106호가 돼 묘지를 지키고 있다.

서울에도 이 소나무가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 재판소 뒤뜰에서 살고 있는 천연기념물 흰 소나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 재판소 뒤뜰에서 살고 있는 천연기념물 흰 소나무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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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풍상을 겪은 노거수(老巨樹)다보니 여기저기 몸이 성한 데가 없다.
 수백 년 풍상을 겪은 노거수(老巨樹)다보니 여기저기 몸이 성한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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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재동의 백송은 헌법 재판소 뒤뜰에 살고 있다. 정문에서 수위 아저씨에게 백송을 보러 왔다고 하니 별 다른 질문 없이 출입증을 내준다. 아마도 백송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건물을 돌아서자 600년 동안 만고풍상을 겪은, 두 갈래로 갈라진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노거수 백송을 처음 봐서 그런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느낌 있다'. 나무줄기 여러 군데 수술 자욱이 있지만 흰 살결이 무척 곱고 기품이 느껴진다. 밝고 깨끗하면서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함이 들어있다. 멀리 떨어진 큰길에서도 나무줄기가 희게 빛나 보인다. 높이 17m, 밑동부분의 둘레는 3.8m인 이 소나무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백송이다.

백송이 있는 자리는 조선 영조 때의 재상이자 뒷날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주춧돌을 놓은 조상경의 집이었다. 고종의 등극을 결정적으로 도운 조대비와 대원군이 안동 김씨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정복고를 시도할 때 백송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이 무렵 백송 밑동이 별나게 희어지자 대원군은 개혁정치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 뒤 이 자리에는 경기여고와 창덕여고가 차례로 들어왔다가 나갔고, 지금은 심심찮게 뉴스의 근원지가 되는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조계사 대웅전과 운치있게 어울리는 서울 수송동 백송
 조계사 대웅전과 운치있게 어울리는 서울 수송동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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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환경이 안좋아 생육이 걱정되는 서울 수송동 백송
 주변 환경이 안좋아 생육이 걱정되는 서울 수송동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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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또 하나의 명물 천연기념물 제9호 백송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옆에 있다. 조계종 본찰(本刹)답게 거대한 처마를 가진 대웅전과 어우러져 더없이 운치있는 모습이다. 치렁치렁한 가지를 하늘로 펼쳐놓고 있는 장대한 회화나무가 이웃 친구처럼 우뚝 서있어 덜 외로워 보인다.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백송은 높이가 14m 정도며, 밑동부분의 둘레는 1.85m 정도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원줄기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한편으로 길게 위로 올라가면서 나 있다.

백송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수송동의 백송은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 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 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가 나무 주변이 주차장으로 사용돼 자동차 배기가스로 인한 매연으로 인해 나무의 생육이 지장을 받을 것으로 보였다. 좋지 않은 환경 때문인지 이미 말라죽은 가지들과 이런저런 수술 자국들로 나무의 모양은 기형이 됐다. 일부분은 받침대에 의존해 서 있다. 과연 500년을 살아온 이 백송은 얼마나 더 살까 하는 걱정이 먼저 떠오른다.

이에 문화재청은 1977년부터 백송의 종자를 채종,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에서 발아시켜 관리를 해온 백송의 종자를 후계목으로 증식시키는 등 생물학적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노거수(老巨樹) 백송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백송 껍질, 용의 비늘같다.
 백송 껍질, 용의 비늘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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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울시 온라인 뉴스에도 송고하였습니다.



태그:#백송, #천연기념물,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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