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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로 분장한 이들이 카메라를 향해 좀비 흉내를 내고 있다.
 좀비로 분장한 이들이 카메라를 향해 좀비 흉내를 내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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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이 거리에 나섰다. 한 둘이 아니다. 700명에 가까운 좀비 무리가 런던 시내 한복판을 활개치고 돌아다녔다. 좀비들이 떼거리로 거리에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좀비(Zombie)는 원래 서아프리카의 전통 종교인 부두(Voodoo)교에서 왔다. 부두교에서 좀비는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온다. 그런 점에서 좀비는 저승과 이승 사이를 떠도는 한국의 '원귀(寃鬼)'와 같으면서 다르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이라는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 좀비와 원귀는 같다. 하지만 원귀는 이미 '죽은 몸'이고, 좀비는 '되살아난 몸'이다. 원귀는 원통한 사연을 품고 스스로 구천을 방황한다. 반면 좀비는 주술사에 의해 불려나와 노예로 부려진다.

좀비는 1932년 <화이트좀비>에 등장한 이후 '좀비 영화'라는 독자 영역까지 구축했다. 영화에서 좀비는 '사람들을 마구 해치는 살아있는 시체'로 묘사되곤 한다. 주술사에게 불려나와 노예로 부려지는 좀비의 원형에 '극적 변용'이 이뤄진 셈이다. 이 때문에 좀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무섭고 잔인하고 괴기스럽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인 루이스(맨 오른쪽)와 그의 친구들도 '좀비 데이'에 참가했다.
 고등학생인 루이스(맨 오른쪽)와 그의 친구들도 '좀비 데이'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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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1시께(현지 시각), 영국 런던 마블아치(Marble Arch)에 좀비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약 700명의 좀비가 떼로 모였지만 공포에 떠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되레 곳곳에서 웃음과 장난이 그치질 않았다.

물론 이들은 진짜 좀비가 아니다. 좀비로 분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좀비 분장을 하고 모인 까닭은 '세계 좀비의 날(World Zombie Day)' 런던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다.

세계 좀비의 날은 좀비 문화 팬들이 굶주림과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지난 2006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처음 시작했다. 피츠버그에서 이 행사를 처음 시작한 까닭은 '좀비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로메로 감독이 피츠버그에 있는 먼로 몰에서 <새벽의 저주, 원제:Dawn of the Dead>를 촬영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열린 '좀비의 날' 행사를 주관한 데이비드(David)는 "현재 런던은 물론 뉴욕과 파리, 도쿄 등 세계 50 개 이상의 도시에서 좀비의 날 행사를 치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오늘 행사 현장엔 약 700명이 나와 있지만 페이스 북을 통해 참가 접수를 한 이는 2000명 이상"이라며 "참가 신청을 한 이들은 이후 저녁 8시까지 런던 곳곳에서 행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에 맞춰 올 것"이라고 말했다.

주최 측은 노숙자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을 돕는다는 행사 취지에 맞게 기부금과 음식물을 현장에서 기부 받았다. 참가자들은 다양했다. 가족과 함께 온 이도 많았고, 학교 친구들과 함께 온 이들도 있었다.

'세계 좀비의 날' 런던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데이비드가 참가자들에게 주의사항을 얘기하고 있다.
 '세계 좀비의 날' 런던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데이비드가 참가자들에게 주의사항을 얘기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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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좀비의 날' 행사에서는 기부금과 함께 먹을거리도 기부받고 있다.
 '세계 좀비의 날' 행사에서는 기부금과 함께 먹을거리도 기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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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11명과 함께 온 수잔(Susan)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참가했다. 그는 "좋은 취지로 행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도 좋아하고 또 재밌어한다"며 좀비의 괴기스런 표정을 익살맞게 표현했다.

고등학생인 루이스(Louise)는 친구 5명과 함께 왔다. "친구의 추천으로 올해 처음 참가했다"는 루이스는 "큰돈은 아니지만 기부금을 내서 힘든 이들을 도와줄 수 있어 기쁘다"며 "무엇보다 친구들과 함께 해서 즐겁다"고 말했다.

여덟 살 샘(Sam)의 가족은 작년에 이어 온 가족이 모두 참가했다. 샘과 엄마 아빠, 누나 두 명 등 모두 다섯 명이 각각 기부를 했다. 기부에 맛들인 '수상한 가족'이었다. 샘의 가족들은 내년 좀비의 날 행사에도 참여할 계획이라고.

마블아치에서 행사를 시작한 참가자들은 런던 시내를 행진했다. 행진은 피카딜리 서커스 등 모두 5구역에서 진행됐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하는 행사지만 사람들이 무서움과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분장이기에 주최 측은 참가자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시민들에게 과한 몸짓은 하지 말고, 교통신호를 잘 지키고, 술은 삼가라는 것 등이다.

좀비로 분장한 아빠 등에 업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좀비의 날 행사를 둘러보는 어린 아이.
 좀비로 분장한 아빠 등에 업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좀비의 날 행사를 둘러보는 어린 아이.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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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기부 행사에 참가한 여덟살 샘의 가족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기부 행사에 참가한 여덟살 샘의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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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떼거리의 시내 행진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은 순간 놀라면서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친구와 함께 있던 롭(Rob)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며 "다음 행사에는 친구 6~7명과 함께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엔 인권위가 조사한 전 세계 노숙인 수는 약 1억 명에 달한다. 한국의 노숙인 수는 모두 1만3262명, 인구 1만 명 당 약 2.73명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노숙인 복지시설 협의체와 민간단체가 지난 2012년 10월 조사한 것이다.

한국의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은 "노숙이라는 한계상황으로 내몰린 원인은 무척 다양하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불평등한 사회구조"라며 "노숙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 문제로 돌리지 말 것"을 호소한다.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상태를 유지하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일거리가 급감하면서 노숙에 이르게 된 사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뎃잠조차 편히 잘 수 없는 노숙인들에게 다시 겨울이 오고 있다. 한뎃잠보다 더 서러운 것은 싸늘한 시선일 것이다. 괴기스럽지만 우스꽝스런 분장으로 행진하는 '좀비 행사'가 굶주림과 노숙인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진 못한다. 하지만 이런 행사는 노숙인 문제를 공동체가 풀어야할 숙제로 고민하게 한다. 사람 살리는 '착한 좀비'가 많이 늘어나야 하는 까닭이다.

지하도로 내려가는 '좀비의 날' 참가자들.
 지하도로 내려가는 '좀비의 날'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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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분장을 한 이들이 런던 시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좀비 분장을 한 이들이 런던 시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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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좀비, #노숙인, #기부, #런던,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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