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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표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표지.
ⓒ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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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이라는 말이 단순한 꾸밈이나 의도적인 홍보 전략에서 나온 수사로 알았다. 이런 수사는 사실 큰 의미도 없고 신뢰도 없다. 그런 말 속에 책의 권위를 담아 판매 부수를 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사사키 아타루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들고 펼쳐 저자와 만나는 순간, 사사키 아타루에게 보내는 수사가 결코 홍보용 꾸밈말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단언컨대 그는 비범했다. 책을 읽는 묘미를 이토록 찐하게 내밀어주다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1970)에 실린 시 구절 하나를 인용한 것이라고 했다. 책 내용과의 연관성과는 상관없이 이 얼마나 발랄한 제목인가. 또한 이 책엔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저자에 의하면, 이 책은 2010년 2월, 일본 시부야에 있는 한 바에서 좀 특별한 독자인 사사키 시로라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 닷새간의 어떤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강의를 글로 묶은 책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 독자의 요청

애초에 그는 <야전과 병원-푸코, 라캉, 르장드르>를 데뷔작으로 출간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600쪽이 넘는 분량의 사상서인데도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2년 동안 출판사에서 입문서나 알기 쉬운 길잡이 책을 출판하자는 요청이 많았지만, 오만하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사절하다가 2년 만에 이 책을 내놓았다. 저자의 두 번째 책인 것이다. 2년 동안 집요한 출판 요청을 강하게 거절해 왔다는 고백에서 저자의 고집과 진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에 담긴 사상의 응축성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닷새 밤이다. 닷새 밤 동안 사사키 아타루는 그가 반복해서 '읽었던' 생각들의 그물을 펼쳐놓는다. 사로잡히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그의 그물은 바로 '읽기와 혁명'에 대한 담론이다. 책을 시작하는 첫째 밤에 저자는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내놓는다.

그는 일본에서도 교육 수준과 경제 수준이 모두 낮은 도호쿠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자신도 고등학교를 중퇴한 사람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홀연히 세상에 나타난 그에게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질문들을 통해,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한다. 그것은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았고, 누구를 부하로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읽기와 혁명'이라는 담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자가 보인 이런 생각들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건 '지식과 정보'에 대한 사유이다. 저자는 스스로 정보를 차단하면서 살고 있으며, 그렇기에 '질문'한다는 것이다. 정보가 차단되면 자신이 정말 옳은지 어떤지 알 수 없게 되고, 대체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정보가 말해주는 대로 행동하면 그 질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사람들은 정보를 모으고, 무엇보다 정보통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보를 모으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것'이라는 명제를 저자는 던진다. 질문하지 않아도 되며, 정보와 지식이 주는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누군가의 부하가 되거나 누군가를 부하로 두는' 행위가 아닌가.

이런 정보와 지식에 힘입어, 비평가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고, 전문가는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고 저자는 강하게 비판한다. '비평가/전문가'에 대한 비판은 철학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며 더욱 분명히 한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는데, '개념(concept)'이란 '잉태(conceptu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란 무언가를 질문하고 낳는 사람이며, 아무 것도 낳지 못하고 정보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는 '비평가/전문가'와 구별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일인가."

저자가 던지는 이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이 이 책의 핵심이고 반복이다. 그러나 이 핵심에 접근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우리의 기본적인 상식과 인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상식을 파헤치며 비집고 들어와서 전혀 낯선 인식들이 들어와 앉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것이 '읽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저자의 역설은 이렇게 표현한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본문 42쪽)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라고 한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다.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라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이며, 이것이 저장해두고 검색기만 돌리면 되는 정보 읽기와 다른 점이라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읽기가 그만큼 엄중한 행위라는 것이다.

저자, 읽고 쓰는 기법 일반이 모두 문학... 이로써 문학자는 혁명가 

그리고 저자는 읽고 쓰는 기법 일반이 모두 문학이기 때문에 철학자든 과학자든, 경제학자든 글을 읽고 쓰는 행위를 한다면 모두가 문학자라며 문학의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라틴어의 용례로 더 거슬러 가면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주석을 달고,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라는 것임을 밝힌다. 이러한 정의로써 문학자였기에 혁명가일 수 있었던 루터를 조망한다.

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 혁명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떠올리는 그 혁명보다 저 멀리에 있는 혁명으로부터, 더 오래되고 더 광대한, 그리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혁명으로부터.(본문 67쪽)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혁명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사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형상은 모두 여러 혁명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한 현재라는 의미이다. 그 중에 저자는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즉 대혁명에 주목한다.

당시 교회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을 때, 루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고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 성서를 읽었다고.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다고.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썩어빠진 세상의 질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이렇게 저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말한다.

루터는 언어의 사람이므로 그는 읽고 또 썼다. 먼저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쓰고,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모든 분야에 글을 써서 127권을 저작을 남긴다. 그래서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한다. 대혁명이 성취되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 저자는 반복한다. 그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다시 읽는다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하다고. 책을,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일.

됐나요?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결코 다릅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겁을 집어 먹고 있는 겁니다.(본문 113-114쪽)

아, 이 얼마나 유쾌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말인가. 나는 이 일본의 신예 사상가에게 빠져든다. 이런 관점은 신선하다 못해 신기하다. 어찌 이 뿐인가. 사사키 아타루는 다음날 밤에도, 그 다음날 밤에도,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에게서 '읽어라'는 계시를 받고 이슬람의 예언자가 된 무함마드의 혁명과 11세기에 600년 동안 사라졌던 <로마법 대전> 50권이 발견되어, 그 법전을 읽고 고쳐 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중세 해석자 혁명-혁명 같지 않아서 더욱 진정한 혁명-을 저자는 풍부한 역사적 안목과 독창적인 해석으로 설파하고 있어, 그 명쾌함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다시 정리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현상은 중세 해석자 혁명, 무함마드 혁명, 루터의 대혁명의 젖줄에서 나온 결과이며, 이 모든 혁명의 본질은 읽고 쓰기, 즉 문학이었다는 것이 요컨대 저자의 핵심 논지이다. 이를 수용하든 거부하든 독자의 자유이지만, 읽는다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가슴 깊이 새겨 넣을 수 있게 한다.

사사키 아타루는 일본 사상계에 예외적인 사람일까, 책을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일본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오밀조밀하고 정밀하기는 하지만, 큰 호흡과 발자국으로 활달한 전망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사키 아타루는 나의 선입견을 깬다. 그것만으로 즐겁다. 닷새째 되는 날, 마지막 밤에 그가 말한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이 그의 전망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을 천천히 읽기 바란다. 그리고 또 읽고, 다시 읽고. 초조해 하지 말고, 천천히, 깊이, 그와 동행하기 바란다. 어쩔 수가 없다. 나도 읽었으므로, 나도 읽어버렸으므로.

덧붙이는 글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송태욱 옮김, 자음과 모음, 2013년 2월 25일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이룸)(2012)


태그:#문학과 혁명, #마르틴 루터, #무함마드, #중세 해석자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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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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