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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s are natural!(한국인들은 자연스럽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공감했던 말, 그리고 되찾고 싶었던 말이다. 지나치게 바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요즘 많이 잊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경치, 자연을 즐기는 것, 꾸밈없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가치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속살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외국인 친구들은 사람, 풍경에 대해 물었을 때 제일 처음 이 말을 건넨다. 물론 서울의 숨 쉴 틈 없는 빌딩숲은 제외하고 하는 말이지만.

'내추럴'에서 멀어지는 우리, 걱정스럽다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겉그림.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겉그림.
ⓒ 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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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al', 참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는 이 말에서 우리가 너무 멀어져가는 것이 걱정스럽다. 서양 음악과 우리 음악이 어떻게 다른지 소개하는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말이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한국인의 음악은 자연의 소리를 모방한 것, 따라서 정확히 계산된 박자에 따라 곡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음악을 연구하고, 나뭇잎 떨리는 소리나 해변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으며, 짐승들의 울음소리나 새들의 노랫소리도 음률로 가다듬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음악을 억지로 그 고저장단에 따라 나눌 필요가 있을까? 음악은 음악이 모방하는 그것 자체와 똑같이 자유로워야 한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갈구는 교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육에 대해 걱정하는 이라면 길모어의 오래된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조선 사람들의 지적 능력은 우수하나 단순히 기억력만을 기르는 학습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식의 학습은 단지 문장에 의존해서 차후에 사용 가능하도록 하는 저장 작업에 불과하다고. 그 말이 현재의 우리 교육 현실에서도 여전히 공감된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혀야 하는 것들을 서둘러 암기하게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배움의 속도를 존중하지 않는 억지스런 교육 환경은 우울한 청소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요즘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을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독일 사학계에서 나치즘을 탈색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독일 지성계는 그 꼼수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사실을 교훈 삼아 역사 왜곡에 대해 긴장과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기억해야 할 역사를 잊거나 왜곡하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직무 유기이며 무책임한 범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위험한 학자들의 맹목적 신념 아래 놓이지 않기를, 역사를 정권 유지의 도구로 삼으려는 지도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치열한 자기 반성이 있은 후에야 건강한 역사적 감수성이 자리잡을 수 있고, 보다 질 높은 교육, 평화롭게 공존하는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똑똑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복잡한 의회 제도의 규율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데 매우 빠르고 이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서유럽의 노련한 의회 지도자들도 깨닫지 못하는 절차상의 문제 등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을 보고 매켄지는 크게 감탄했다. 그러나 독립 협회가 해체되고, 외세의 힘을 빌어 동학을 누르는 왕실을 바라보며 그는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의 역사를 보며 우리는 자괴감에 빠진다. 건강한 민중들의 움직임은 권력 유지에 위태로움을 느낀 왕실에 의해 번번히 막히고, 개혁의 기운은 역사 속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데 어떻게 자존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냉정과 정열을 함께 갖추고 있고, 친절하고 악의를 모르며,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는 우리는 왜 이렇게 자연스러움에서 멀어져 정신없이 부대끼며 살고 있는 걸까? 문 밖에 나서는 것도 두려워질 정도로 그악스러운 삶, 방향 모르고 치닫는 삶을 버거워하는 이들이 늘어만 가는데 그걸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가 없다. 아주 오래전 외국인이 우리 민족에게서 발견했다는 그 '무서운 잠재력'이 분명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적 감수성은 보이지 않는다.

청순하고 세련된 미, 자연스러운 미를 가졌다고 칭송되던 그 아름다운 한국 여성들은 왜 성형 왕국의 충실한 소비자가 되고만 것일까? 한국 여성의 독립적이고 강인한 성격을 스웨덴 여성과 비교하는 저자의 말에 일면 공감하기도 하지만 무언가 더 소중한 가치를 잃고 강해지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연스러움, 내면의 평화보다 보여지는 것들에 집착해야 잘 사는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현실을 접할 때마다 무언가 한참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행복할 틈도 없고 다들 불안하다는데 어떻게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

'겸허한 자존감', '착한 강인함'이 필요하다

과거사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면서 맹목적으로 강해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제동 장치 없는 폭주 차량처럼 치닫는 우리의 열정을 제어할 만한 차가운 이성이 필요한 때가 지금인 것 같다. 내가 남보다 우위여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사람들 하나 하나의 성장과 행복, 신념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여야 진정 '겸허한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높이 사는 '착한 강인함'은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처음 시작었을 때 학자들이 거리낌 없이 그것을 '천민자본주의'라 칭하고 비판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던 기억이 있다.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 통칭할 때, 실제 잘못은 엉뚱한 사람들이 저질러 놓고 배운 것 없고 먹고 살기 힘들었던 천민에게 역사적 책임을 미룬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권력과 이익에 눈 멀어 더 큰 질곡의 역사를 만들었던 지도자들을 탓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억울함의 실체에 대해 이 책은 시민혁명을 경험한 유럽 외국인의 입을 통해 확실히 말한다. 한국은 부지런하고 순박했던 보통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사대주의, 관료제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특권층의 부패와 전근대적, 반개혁적, 보수적 태도가 가능성 있는 국민을 괴롭혀 온 실체라고 말이다.

저자는 먼지 풀풀 날리는 오래된 책 속에서 소박한 우리 평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를 찾아 객관적으로 쓰려 노력했다. 그 결과 우리의 잠재력, 긍정적 가능성을 밝혀내는 데는 큰 성공을 거둔 것 같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감정적 비판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고, 구한말에 집중하느라 우리가 하루 하루 숨쉬고 있는, 보다 절실하고 치열해야 할 현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이른 시일 안에 저자의 생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도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책으로 엮여 나왔으면 한다.

요즘 세계적인 진보 지식인들이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그런데 조금도 자랑스럽지가 않다. 우리의 역사적 퇴행을 걱정하고 힘을 보태기 위한 방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현대철학 석학 알랭 바디우가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서 시집을 읽으며 침묵 시위를 했고, 마이클 샌델, 슬라보예 지젝도 분향소에 들렀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강정 마을을 찾아 반전 메시지를 전했고, 놈 촘스키 등 미국의 진보 지식인 25명은 이미 몇 년 전에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우리나라,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평화를 담보할 수 없는 우리나라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럴 때 '착한 강인함', '겸허한 자존감'이 빛을 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세계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을 이뤄 온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우리 삶의 근간을 지키는 중요한 시작이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대한민국 외교 이야기 - 박수길 대사의 외교관 36년, 한국 외교의 회고와 전망

박수길 지음,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2014)


태그:#나무와바람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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