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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아프니까 청춘"인 20대의 성장통이 아니다. 그것은 이 거대한 시대 변화의 한 표현이면서 또한 이 나라 모든 자리에서 힘없는 자를 행하여 쉼 없이 자행되는 착취의 한 형태일 뿐이다. 청년들은 서로 손을 잡아야 하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함께 공부하고 깨닫는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면, 반역하고 땀 흘리는 기쁨으로 더러 몸이 뜨거워질 수만 있다면, 우리 몸에 꽂혀 있는 은행과 핵발전소, 온갖 쇼핑몰들의 플러그를 하나씩 뽑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자유이자 해방이 아니겠는가('책을 펴내며' 중에서).

고민하는 청춘들과 함께 하는 공부의 길
▲ 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 고민하는 청춘들과 함께 하는 공부의 길
ⓒ 한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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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경남 밀양의 밀성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2011년 교직 생활을 마감하고,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일꾼으로 활동하며 지역 어르신들의 투쟁을 돕고 있는 이계삼. 그가 10대와 20대에게 도움을 주고자 쓴 책 <청춘의 커리큘럼>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고통'을 딛고 '자유와 해방'의 길을 가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방향' 전환을 얘기한다.

이 책은 '방향'에 관한 책이다. 이계삼은 누구나 가리키고 따라가는 방향을 거부하고, 우리에게 다른 방향이 있음을, 다른 삶을 방식을 찾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그래서 주류 언론과 지식인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석유 정점(peak oil)과 농업, 핵발전소 문제를 응시하며 가리킨다. 그리고 그 방법은 E.F.슈마허, 웬델 베리, 더글러스 러미스, 도로시 데이, 하워드 진, 다카기 진자부로 같은 중요한 사상가와 지식인들이 지나간 길을 더듬어 보여주는 것이다.

시효 지난 좌파 이념, 저자의 대안은?

책은 3부로 크게 나누어 놓았다. 작은 제목이 각각 '공부의 이유', '이 시대를 공부하다', 그리고 '희망을 공부하다'이다. 이 제목들의 공통분모가 '공부'인 것을 보면, 저자가 인식의 전환과 성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아직도 의식 있는 많은 청년들은 여전히 좌파 이념에 기울어져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좌파 이념이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회 정의의 신념 체계로서는 유효하지만 시대의 사상적 좌표가 되기에는 시효가 지났다고 보았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슈마허와 웬델 베리, 더글러스 러미스 등의 사상을 제시한다. 저자는 슈마허에 대해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기도 했지만 간디와 동양사상에 이끌려 명상을 실천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뛰어넘는 중도 사상으로 현대적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는 매우 선구적인 사상가"라고 평가했다.

이어 저자는 슈마허를 '작은 것의 가치'를 제창한 생태학적 경제사상가로 설명하기엔 다소 부족하다며 슈마허를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성찰한 구도자이며, 자신이 제창한 변혁의 가능성을 구현하기 위해 일생토록 분투한 실천가로 자리매김했다고 보았다.

특히 "현대사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기술의 성공으로 발생한다"고 말한 슈마허가 기술발전을 자연법칙의 하나로 긍정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분명한 선을 그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지난 대통령 선거 3차 TV 토론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에 주목했다.

이 토론회에서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우주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며, 달에 착륙선을 보내겠다는 박근혜에게 저자는 실소한다. 나로호 개발에만 5205억 원이 들어갔는데 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비용은 얼마가 들까? 그리고 달에 태극기를 꽂아서 대체 무얼 하자는 걸까? 저자는 이 대목에서 화재로 사망한 파주 장애인 남매, 그리고 고흥의 할머니와 손자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장애인 남매와 가난한 조손 가정을 도울 수 없다면 달에 갈 수 있는 기술이 있어서 무엇하나며 탄식한다.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복잡한 제어 기술이 작동하는 핵발전소 같은 거대 플랜트와 대규모 송전시스템의 '주역'은 한국전력과 한수원의 '극소수 공학기술자'란 사실을 간파하면서 이러한 기술의 지배를 거부한다. 그리고 기술의 진보에 제한을 가하고 기술을 소수 전문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품으로 돌리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특히 지면을 많이 할애한 슈마허의 사상은 웅숭깊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 새롭게 정립할 제3의 사상체제는 슈마허의 사상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슈마허에게 중요한 것은 진보와 성장이 아니라 자립과 고용과 같은 덕목이다. 그는 노동과 명상의 일치를 근간으로 근대 경제학의 기본 전제인 '이기적 인간'을 인정하지 않고 오늘날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형 기업을 몸소 실천한 사상가였다.

10년만 흐른다면 농사짓는 인구가 사라지고 만다

이어 저자는 스티브 잡스라는 최첨단 인간의 정반대편에 있는 미국 농부 웬델 베리를 통해 석유와 농업을 좀 더 깊이 있게 파고든다. 웬델 베리는 팔순이 다 된 고령이다. 잡스가 실리콘밸리의 총아로 세계의 각광을 받으며 내달려오는 동안, 베리는 1960년대 이후부터 고향 켄터키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43세였던 1977년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전통 방식의 농사를 지어왔다. 이는 철학교수 윤구병이 교수직을 사임하고 변산으로 내려와 공동체를 만들어 농사짓는 모습과 겹친다.

그는 농사꾼이지만 산업기술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에세이와 문학 작품을 발표해온 저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나도 저자처럼 그의 글을 읽었을 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뿌듯함과 감동을 받았다. 웬델 베리의 다음 말은 웬델 베리를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명언이다.

컴퓨터의 사용이 새로운 생각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새로운 생각이다(본문 39쪽).

우리가 웬델 베리에게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얘기는 '먹을거리를 스스로 거두어 먹자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자유로워진다. 민주주의의 기반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하다. 그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중산층이 민주주의의 기반이 아니라고 한다. 중산층은 경제 추이에 따라 몰락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러면서 부와 권력이 소수에 집중될 수밖에 없어 민주주의는 다만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웬델 베리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소농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자는 앞으로 최대 10년만 흐른다면 농사짓는 인구는 사라지고 만다고 진단하며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이제는 농업에 대한 지식도 농경적 삶에 대한 기억도 없는 세대가 버려진 땅에서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살림을 되살리는 문제, 농업에 대한 만인의 책임의식을 일깨워야 할 필요는 대단히 긴급하다. 정치운동도 언론의 노력도 책임 있는 지식인의 노력도 교육자들의 노력도 모두 절실하다. 진보 정당은 농업적 의제를 중심에 걸어야 한다. 아이들이 농사를 배우고 농민의 삶을 당연으로 받아들이는 학교가 곳곳에 만들어져야 한다.(본문 52쪽)

농업은 석유정점 사회와 맞물린다. 저자는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사상을 통해 석유 없는 세상을 엿본다. 석유로 졸부가 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떠도는 농담은 차라리 슬프다.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탈 것이고, 내 아들의 아들은 낙타를 탈 것이다."(본문 141쪽)

이 농담 만큼 석유 고갈 시대를 적절히 비유하는 말이 또 있을까.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놓은 모든 문명은 석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석유 고갈은 지난 200년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할 것이다. 지금의 각종 기술과 공학은 석유를 이용하는 하드웨어일 뿐이다. 재생가능 에너지 역시 석유가 없으면 지속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다시 농사다. 저자는 거꾸로 가야 할 때에는 거꾸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농의 삶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농사를 짓고 전통적 삶의 기술을 복원하고 지역공동체를 되살리는 전환 외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사실상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석유시대의 종말은 다만 암울함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2003년 태풍 '매미'를 겪고 난 뒤에 독서동아리 아이들과 겪은 체험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태풍 '매미'가 지나가는 그 시간에 아이들 대부분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과 본원적인 삶에 대한 깊은 긍정과 낙관으로 가득 한 다음 글은 참으로 아름답다.

태풍이 밀양 땅에 도착한 무렵부터 곧장 전기가 끊어졌는데, 미리 준비해둔 촛불로 지낸 그 하룻밤이 대부분 아이들에게 무척 평화롭고 좋은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바깥에는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어떤 아이는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로부터 가족들을 향한 따뜻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다른 어떤 아이는 사이가 좋지 않은 식구들과 맺힌 것을 풀었고, 또 어떤 아이는 촛불을 켜놓고 홀로 일기를 쓰면서 태풍이 지나가는 밤을 지새우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전깃불도 컴퓨터도 음악도 책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되니 결국 식구들이 촛불 아래로 모여들었고, 그 자리는 알 수 없는 따뜻함과 경건함이 내내 흘렀다는 것이다. 우리의 밤을 밝혀주던 이 휘황한 불은 곧 꺼질 것이다. 그러나 결핍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모일 것이며,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것이며 스스로와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본문 147쪽).

저자가 농사, 석유 정점과 함께 이 책에서 다룬 또 다른 주제는 탈핵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보여준 체르노빌은 너무나 끔찍했다. 저자는 우리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겪으며 전혀 다른 시대로 왔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하며, 한계를 아는 것이 윤리이고, 총체성에 대한 점검을 하지 않는 지성이란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일갈한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계삼이라는 매우 영특하고 생각 깊은 논객의 커리큘럼을 따라 배웠다. 그의 글은 지극히 산문적이지만 시적인 감동을 던져주었고 여러 분야에서 그의 논지는 거침없다. 배우고 나니 나도 청춘이 된 듯한 느낌이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책을 읽으며 '사상의 힘, 지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것 말고는 없다'고 한 저자의 말에 새삼 공감한다. 

저자는 지금 고향인 밀양에서 탈핵평화를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 책 속에서 무한한 자부심과 긍정으로 품었던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학교도 준비하고 있다. 인문학과 농업으로 기쁘게 삶을 열어갈 수 있음을 그는 몸으로 보일 것이다.

며칠 전, 내가 일하고 있는 대안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그에게 초청특강을 부탁했다. 그러나 밀양 송전탑 공사가 10월에 강행될 것 같다고, 마음 한 자락도 여유가 없어서 가까운 합천조차 올 수 없다며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밀양 송전탑 현장은 아마도 그에게 '사상의 거처'가 되어줄 것이다. 마음과 기운으로 깊은 성원을 보냈다.

덧붙이는 글 |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한티재, 2013년 5월 20일, 1만 5천 원



청춘의 커리큘럼 - 고민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길

이계삼 지음, 한티재(2013)


태그:#석유 정점, #슈마허, #웬델 베리, #사상의 힘, #밀양 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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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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