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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상 1팀과 개인상 2명이 선정되었습니다.
▲ 현수막과 상패 단체상 1팀과 개인상 2명이 선정되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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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울산본부에서 제4회 87노동자 대투쟁 정신계승 시상식과 함께 단병호 전 위원장 특강이 있으니 관심있는 조합원은 참석바랍니다."

지난 25일 문자를 받고 민주노총 울산본부 홈페이지를 검색했습니다. 노동계 활동에 대해 관심 없는 것도 아닌데 솔직히 그런 노동상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누가 그런 노동상을 받는지 보니, 87노동상 단체상은 건설노조울산건설기계지부 레미콘총분회가 받았고, 개인 수상자로는 천의봉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과 심영수 플랜트건설노조울산지부 조합원이 선정되어 있었습니다.

천의봉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사무국장으로 불법파견 투쟁을 해온 노조간부였습니다. 그는 296일간 명촌송전철탑에 올라 농성을 하며 현대차 불법파견 문제를 전 사회적으로 끌어올려 수상자로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분들도 치열하게 노동자 권리를 찾고자 노력한 게 인정되어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저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부당해고자로서 참석했습니다. 순박한 청년 천의봉씨가 의미있는 노동상을 받는데 같은 노조 조합원으로서 축하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90년대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만드는데 공로자이고 그 중심에 서있었던 위원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단병호 전 위원장이 오신다 하니 겸사겸사 가보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조, 어디로 갈 것인가?
▲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초청강연회 민주노조, 어디로 갈 것인가?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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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저는 동구에서 북구 비정규직센터 강당까지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오후 5시, 일을 마친 뒤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갔는데, 담당자가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7시에 시작한다고 하니, 많이 일찍 도착했습니다. 1시간 넘게 뒷자리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단병호 전 위원장이 도착하고 노동상 수상자들이 도착하니 7시가 좀 넘었습니다. 단체상 받는 레미콘노조와 플랜트건설노조 조합원은 왔는데 천의봉씨는 안 보였습니다. 사회를 맡은 분의 설명을 들은 후 그가 못 온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천의봉 동지는 1개월간 허리 치료를 받은 후 지금 고향에 가서 요양 중이라 오늘 노동시상식엔 오지 못했습니다. 대신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우상수 사무처장이 대리하여 시상하겠습니다."

행사가 시작되고 시상식은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매년 시상자를 선정하여 노동상을 준다고 했습니다. 시상식을 하기 전 사회자가 시상자 선정 기준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87노동자대투쟁 정신계승상은 올해로 4회째이며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만든 상입니다. 올해 7월 25일부터 9월 12일까지 울산지역 단위 노동조합과 지역 노동시민사회단체에서 추천된 단체와 개인에 대한 심사를 진행했습니다. 심사기준은 1)노동운동과 지역민중에게 끼친 기여가 높은 개인이나 단체 2)동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 헌신성이 본받을 만한 개인이나 단체 3)차별철폐와 평등구현의 87정신계승에 앞장선 개인이나 단체입니다."

철탑농성 296일간 진행하여 현대차 불법파견을 전세계에 알린 공로
▲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사무국장 시상 철탑농성 296일간 진행하여 현대차 불법파견을 전세계에 알린 공로
ⓒ 민주노총 울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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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 시상과 노동역사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인삿말을 하였다.
▲ 강성신 민주노총 울산본부장 인삿말 노동상 시상과 노동역사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인삿말을 하였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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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봉은 고향에 가 요양중이라 참석치 못해 우상수 사무처장이 대신 받았다.
▲ 87 노동상 주인공들 천의봉은 고향에 가 요양중이라 참석치 못해 우상수 사무처장이 대신 받았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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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패와 상품권, 꽃다발이 주어지고 간단한 소감을 듣고 시상식은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단병호 전 위원장의 특강을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그 어렵던 시절 어떻게 노조활동과 노동운동을 해왔는지 궁금했고 수십 년 노동운동 해오면서 무얼 얻고 잃었는지도 알고 싶었습니다. 참석한 서른여명의 눈동자가 무대로 쏠렸습니다.

"엘리베이터 타고 이곳으로 올라오는데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민주노조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제가 강연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문구를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산으로 가면 되지 뭐... 오늘 제 이야기는 경험한 분들은 되새겨 보고 87년 투쟁 무경험자는 민주노조 운동이 그렇게 치열하게 이어져 왔구나 하는 것을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단 위원장은 그렇게 운을 땐 뒤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후 26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 아시죠? 그때 전국에서 100만여명이 시위에 참가 했었습니다. 노태우씨가 6·29 선언을 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했지요. 그전인 6월 18일 김영삼 씨는 평화시위 하겠다며 정치인은 뒤로 빠졌어요. 6·29 선언으로 직선제는 관철했지만 노동 현실을 무시한 결과 7월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7월 이후 3400여개의 노조가 만들어 집니다. 88년엔 190만여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합니다. 87년 그땐 선파업 후협상으로 노동조합 요구가 관철되었어요. 지금은 상상도 못할 격렬한 투쟁이 있었습니다. 창원에선 가투가 벌어지고 화염병이 날아 다녔고, 울산에선 중장비를 앞세워 시청까지 가두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세계화 추세에 맞는 역량있는 노동조합 대표를 키워내야 한다고 역설
▲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초청강연회 세계화 추세에 맞는 역량있는 노동조합 대표를 키워내야 한다고 역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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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위원장은 80년 광주항쟁 실패후 87년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90년 국가 통계에 나타난 걸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생산현장 곳곳에 취업해서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했다고 보면 됩니다. 10만여명이라 하는데 실제론 1만에서 2만여명이 전국 산업현장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6월 항쟁 때문에 7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진 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게 터졌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이것을 노동자 역동성이라 이야기 합니다. 노동자는 어디선가 한 번 터지기만 하면 봇물 터지듯이 연쇄반응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87년 이전엔 여성노동운동이 활기차게 진행되었지요. 그러다 87년 이후 우리 사회 노동운동 구조가 바뀝니다. 여성 중심에서 남성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노동자가 제대로 힘을 가지고 조직되고 투쟁하면 법도 무력화 시킬수 있는 것 입니다."

88년부터 단위별 노동조합에서 협의체가 꾸려지고 전체 중앙조직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위 노동조합은 그룹별, 업종별, 지역별로 협의체가 만들어지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88년 5월 1일. 그동안 3월 10일 근로자의 날만 기념하던 노동계가 5월 1일 노동절 행사를 강행합니다. 서울에서 정부의 공안탄압을 뚫고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우선 시급한게 노동악법 개정투쟁이었습니다. 88년부터 우리는 노동악법 철폐와 건설 전노협을 구호로 내걸었지요. 우리는 전국 대표자 회의를 숨죽여 하며 전노협 건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3가지 의제로 고민했습니다. 1)시기 이르다. 조직역량,운동경험이 부족하다. 2)한국노총에 들어가 한국노총을 민주화 하여 흡수하자. 3)부족하지만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3번째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한국노총은 모두가 알다시피 정부의 사조직이 된 노동조합 조직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특성에 맞는 노조 협의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게 전노협이었습니다."

모두 깊이 공감하는 강연회 였다.
▲ 30여명이 참석 모두 깊이 공감하는 강연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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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11월 13일. 민주노동조합 전국 협의체는 전태일 열사정신 계승 대회를 처음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경찰 추산은 2만명으로 발표하고 전국회의는 5만여명으로 발표 했다고 합니다.

"뭐 5만은 좀 뻥튀겨 발표한 것이고요. 그때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집회를 했는데 4만여명이 넘으면 더이상 못들어가요. 우리는 대표단 100여명이 모여 혈서를 썼어요. 그 글자가 노동해방이란 글자였습니다. 우리는 그 혈서로 된 대형 현수막을 앞세우고 여의도로 행진했습니다. 대단했지요. 우리가 행진하는 곳마다 거리서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었습니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위상이 매우 높았던 시기 이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만들어진 현총련이 자기위상을 바로잡고 계속 나아갔더라면 오늘날 노동계 구조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현총련은 공도 있지만 과도 있습니다. 많이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지요."

극심한 공안탄압을 뚫고 90년 1월 20일 전노협 깃발이 나부끼게 됩니다. 민주노조 운동하는 노동자 대표자가 모여 전국 중앙조직이 탄생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일부러 민자당이 만들어지던 날을 잡아 전노협을 띄웠습니다. 민자당은 차량을 가지고 다니며 전노협은 빨갱이 집단, 국가위협세력 이라고 방송하고 다닐 정도로 탄압이 심했었습니다. 전노협 상근 활동가는 모두 신문이나 우유를 돌리며 무급으로 상근 활동을 자청했었습니다. 저는 동아건설에 다니다 해고 되었는데 복직투쟁보다 전국 조직 만드는 게 더 시급한 문제라 복직투쟁 대신 전노협 건설에 뛰어든 것입니다."

단 위원장은 가정이 있었으나 모든 짐을 아내에게 떠맡기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거 같았습니다. 그는 거창한 노동해방 같은 큰 틀을 가지고 노동운동 한 게 아니라 했습니다. 그는 당장 1만 원 구하는 게 시급했다고 합니다. 버스비도 있어야 하고 점심값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부는 전노협에 대해 집중 탄압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다니던 회사도 마찬가지 였다고 합니다. 그는 현총련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고 있어 그런지 실망도 컸다고 합니다.

"대기업 노조는 덩치 크고 힘 있다고 거만하게 굴면 안됩니다. 현총련 차원의 투쟁때 전국 노동단체에서 물심양면 도와 준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전국 노동자의 희생과 헌신을 생각할줄 알아야 합니다. 울산 투쟁을 지원하다 연대에 나섰던 중소기업 노조가 수도없이 깨졌습니다.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기업 노조 조합원의 권리도 없을 것이라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95년 11월 민주노총이 탄생했습니다. 단 위원장은 "양적 성장은 했을지 모르나 질적으론 후퇴 했다"고 평가 했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고 아쉬워 했습니다. 그리고 96,97 노동법 개정투쟁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으나 97년 말부터 찾아온 경제위기로 노동운동도 침체기와 위축기로 접어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87년 이후를 가장 큰 노동운동의 위기로 봅니다. 여기에는 4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노동운동 대표성을 못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노조 조직률은 10%에 지나지 않고 그중 민주노총이 4% 정도 조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2)정체성 문제가 심각합니다. 노동운동을 해오면서 게급성과 투쟁성이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봅니다. 처음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시기엔 한국노총과 차이가 분명했고 컸었는데 요즘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3)이념, 노선의 부재도 있습니다. 95년 민주노총 탄생 때 강령이 민주노동운동의 통일성과 지향성이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민주노총 강령은 그대로 입니다. 4)심각한 리더십 부재 현상입니다. 2004년 이후 임기 채운 지도부 없었습니다. 비리에 연류되어 집행이 중단된 경우도 있습니다."

단 위원장은 민주노조운동을 활성화 하려면 90년대와 같이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구조는 많이 변해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가 120만이나 되고, 비정규직 노동자중 여성 비율이 70% 입니다. 또한 등록된 장애인만도 340만명에 이릅니다. 이들 장애인은 선천적인 경우 10%고 후천이 90% 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 약자문제 노동운동이 나서야 합니다. 환경문제도 심각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정당성이 확보되고 위상이 높아집니다."

"우리는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문제 또, 노동시간 단축문제를 놓고 투쟁을 해나가야 합니다. 노동운동이 정치 방침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중투쟁과 정치투쟁을 병행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정치조직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뢰가 많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진보후보 단일화 하고 노동계는 진보로 표를 모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진보 정치는 그 토대가 넓지도 깊지도 않습니다. 제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노동을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단 위원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의 의미, 민주노총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란?, 민주노조 그리고 노동자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 등을 주제로 2시간 넘게 강의를 했습니다. 한때 대한민국 민주노동운동계 대표로 활동했던 그가 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고민과 노동운동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지혜와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태그:#민주노조, #울산, #단병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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