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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자 말

사르나트 불교 유적지 전경
 사르나트 불교 유적지 전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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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루피요."
"뭐! 말도 안 돼요. 100루피로 해 주세요."
"100루피? 그거야말로 말도 안 돼지. 200루피 이하로는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겠소."
"150루피 이상이면 차라리 걸어가고 말겠어요."

하루는 이렇듯 긴장 서린 흥정으로 시작된다. 바라나시에서 13km 떨어진 사르나트로 가기 위해 오토릭샤가 5대 정도 늘어서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우리 주위에는 어느새 십여 명의 릭샤왈라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볼록 나온 배를 거만하게 내민 몸집 좋은 릭샤왈라와 몇십 분 동안 입씨름을 벌였다. 모여든 릭샤꾼들 중 최고 권력자로 가늠되는 이 릭샤왈라는 200루피 이하로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며 못을 박았다. 그는 주위의 릭샤왈라가 자신이 제시한 것보다 낮은 가격에 우리를 채가지 못하도록 틈틈이 그들의 눈을 마주치며 억지 동의를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젊은 릭샤꾼의 걱정어린 표정... 마음이 약해진다

13km에 200루피는 아무래도 너무했다. 우리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릭샤꾼들을 떠나 발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흥정 대열에는 끼지도 못했던 서열 낮은 젊은 릭샤꾼이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얼마면 가겠소?"
"100루피요. 대신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 태우면 안 돼요. 사르나트에서 우리를 기다렸다가 다시 태우고 돌아오셔야 해요."
"좋아요. 타세요."

젊은 릭샤꾼은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든 다 들어주겠다는 듯이 몸을 굽히며 우리를 태웠다. 우리를 태운 작고 동그란 오토릭샤는 가기 싫다는 듯 툴툴거리며 바라나시를 떠났다.

릭샤 앞에 달린 먼지낀 백미러 사이로 젊은 릭샤꾼의 걱정어린 표정이 비쳤다. 흥정에 잘 끼지도 못하는 이 릭샤꾼이 하루에 얼마나 벌 수 있을까. 다시 마음이 약해진다.

"근데 있잖아. 우리가 사르나트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정말 이 릭샤꾼 기다리게 하고 다시 타고 올 거야?"
"…. 아니. 차마 그러진 못하겠지."
"그렇지? 사르나트에 도착하면 그냥 보내자. 대신 200루피 주자."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럴 거면 애초에 흥정은 왜 하는지. 우리는 릭샤꾼에게 200루피를 지불하고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라고 했다.

"아니에요. 기다릴 수 있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둘러보고 오세요."
"저희가 불편해서 그래요.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세요."

릭샤꾼은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먼지를 툴툴 날리며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우리는 사르나트의 먼지 낀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밑부분만 덩그러니 남은 불교 유물들

붓다가 첫 설법을 전했다는 곳에 세워진 다멕 스투파(Dhamek Stupa)
 붓다가 첫 설법을 전했다는 곳에 세워진 다멕 스투파(Dhamek Stupa)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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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트는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을 펼친 곳이다. 붓다가 태어난 네팔의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인도 동부의 보드가야, 그리고 열반한 장소인 쿠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로 꼽힌다.

6세기에 세워진 다멕 스투파(Dhamek Stupa)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6년간 같이 고행을 수행하던 5명의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다는 곳을 기념하고 있다. 붓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5명의 승려는 승가(출가수행자의 교단)를 결성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한다. 얼마 있지 않아 60명으로 늘어난 승려들은 인도 전역으로 보내진다. 고통과 번뇌의 원인인 집착을 버리고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 불교의 가르침. 그것이 처음 세상으로 나와 전파된 곳이 바로 이곳, 사르나트다. 

인도에서 불교의 전성기는 인도 최초로 통일국을 형성했던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 왕이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군주로 이름났던 아소카 왕은 무력을 동반한 정복 끝에 현재 인도 땅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왕국을 계속 넓혀가던 아소카 왕은 즉위 8년째 되던 해, 막강한 부를 가진 칼링가 왕국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전쟁은 아소카 왕이 이끄는 마우리아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 더 넓은 왕토와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칼링가 전쟁에서 벌어진 전쟁의 비참함과 죄악, 생의 고통을 지켜본 아소카 왕은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에 왕은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무력에 의한 통치가 아닌 다르마, 즉 법에 따른 통치를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도 전역에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명문화한 아소카 석주를 세우게 된다.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사르나트의 아소카 석주가 그중 하나다. 지금은 기단부의 흔적만 덩그러니 남아 표지판을 유심히 보지 않고서는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의 통치 아래 비약적으로 팽창한 불교는 인도 각 지역을 넘어 스리랑카, 미얀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지만, 8세기 중반 이후 인도땅 안에서는 그 내용이 심하게 변질된다. 힌두교의 성장과 이슬람교의 박해로 인해 불교와 관련된 많은 유물은 아소카 석주와 같이 기단부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게 된다. 현재 인도의 불교 신자는 인도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붓다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다마라지까 스투파(Dharmarajika Stupa)는 본래의 위엄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밑부분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지금의 인도 사회에서 불교의 위치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본래 30m 높이에 달했다던 이 스투파의 대부분은 18세기에 바라나시의 건축물을 짓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었고, 붓다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은 모두 갠지스 강으로 버려졌다고 한다.

옳고 옳지 않음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사르나트 전경
 사르나트 전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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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일본, 티베트, 스리랑카, 미얀마, 한국 등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의 사원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니, 이제껏 본 적 없는 허름한 헛간들이 모인 빈민가가 나타났다. 안과 밖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허름한 헛간 옆에는 어디선가 길어온 물로 머리를 감는 한 아이가 있다. 거리 한쪽에는 지난밤 한 가족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을 이불이 널려 있다. 아이와 아이 가족의 침실이자 부엌인 어두침침한 헛간 안에는 한 엄마가 아이를 안고 울음을 달래고 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진 우리는 평소보다 걸음을 빨리해 길을 걸었다.

사원 쪽에서 우리를 향해 걷고 있는 한 엄마와 어린 딸이 보였다. 엄마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딸에게 자신이 안고 있던 갓난아기를 건넸다. 딸은 자기 몸 크기만한 아기를 힘겹게 안고서는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10루피?"

아이는 자기 키의 4배는 되는 우리를 올려다보며 어린 동생을 안고 남은 작은 한 손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우리에게 내민 손을 잠시 거둔 사이 아기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린 동생을 울리기 위해 팔을 꼬집어 대고 있었다. 우리의 동정표를 사기 위함일 터다. 나는 자신의 어린 딸에게 그런 일을 시켜가면서까지 돈을 구걸하고자 하는 엄마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옳지 않은 행동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의 어린 딸에게 어린 동생을 꼬집게 해서까지 구걸을 시켜선 안 되지 않나. 마음이 무거워진 더스틴과 나는 엄마의 행동을 비난하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옳고 옳지 않음이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엄마의 소원대로, 어린 동생을 꼬집어야 했던 어린 딸의 소원대로, 고통스러운 세상에 이제 막 태어나 젖을 얻기 위해 꼬집힘을 당해야 하는 갓난아기의 소원대로, 우리 주머니 속에 가득한 돈 중 10루피 정도 쥐여 주었다면…. 적어도 이 아이들이 오늘 하루만큼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사르나트 불교 유적지 전경.
 사르나트 불교 유적지 전경.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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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이 나와 연결되어 있고 '나'와 무관한 '남'은 없다는 세상의 이치인 연기(緣起).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이치에 따라 상호 관련 속에서 변하면서 임시로 그렇게 존재할 뿐이며, 영구불변하는 실체(實體)는 없다는 무아(無我).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기에 공(空)한 법(法: 존재). 그렇기에 고정된 성품(自性 ·자성)이 없어 공(空)한 사물. 그렇기에 "있음(有)"과 "없음(無)"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난다는 중도(中道).

이러한 존재의 실상에 대한 바른 안목을 깨우치고 나와 너의 구별을 넘어서 절대적인 선(善)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붓다의 첫 설법이 이뤄진 이곳. 순례를 온 불교 신자들은 기둥 뿌리만 남은 유적을 빙빙 돌며 허기진 이웃은 잊은 채 정성스레 기도를 올린다. 오늘 먹일 자식들 밥을 얻기 위해 자식을 이용해야 하는 엄마를 비난하는 우리는, 돈과 욕심이 가득한 주머니와 우스꽝스러운 카메라를 목에 건 바보 같은 관광객에 불과하다. 기둥 터만 남은 이곳의 풍경이 연기(緣起)의 가르침은 잊고 속 빈 기도만 쥐고 있는 이곳의 신자들과 나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허울만 있는 나의 모습과 절터 뒤편 빈민촌의 진한 삶의 대비, 그리고 어린 딸에게 끝내 쥐여주지 못한 10루피가 앙금처럼 내 가슴에 남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뒷자석 우리는 어리석고 불쌍한 중생이다

사르나트에 견학온 인도 학생들
 사르나트에 견학온 인도 학생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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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릭샤꾼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힘이 빠진 우리는 더는 흥정을 하고 싶지 않아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르나트와 바라나시 사이를 오가는 경전철의 가격은 고작 2루피(약 40원). 가이드북에서 안내하고 있는 시간에 맞춰 기차역으로 갔지만 안내원도 없고 안내소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다 시간을 보내며 누군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표 주세요."

우리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기차간 부스 안의 아저씨에게 표를 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 티켓 노 티켓"만 반복했다. 이렇게 먼지만 툴툴 날리는 동네에 누가 탄다고 기차가 벌써 없나. 저기 지나가는 저 기차는 뭔가. 다른 동네에서 매진됐다는 건가. 온갖 논리를 구현해 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입씨름이 피곤해 기차를 타기로 한 거니 그만두기로 했다.

버스 막차 시간도 이미 지나버린지라 할 수 없이 릭샤를 탔다. 왠지 힘이 빠진 우리는 릭샤꾼이 제시한 금액에 순순히 동의하고 릭샤에 올랐다.

"150루피는 내겠어요. 다른 사람을 태우지 않는 조건이에요."

동그란 오토릭샤의 정원은 앞좌석의 좁은 운전석 하나와 뒤쪽의 두 사람이 앉으면 꼭 끼는 좌석을 합쳐 3인이다. 하지만 인도의 거리를 걷다 보면 그 작은 오토릭샤에 앉고 또 앉고 매달리기까지 해 무려 10명 가까이 되는 무지막지한 인원이 타고 달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한 시간여 가까이 그런 끔찍한 상황 속에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릭샤꾼에게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을 태우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뒷좌석에는 못 앉게 할게요. 앞좌석에만 조금 태우면 안 될까요?"

거절할 순 없지 않은가. 릭샤꾼은 바라나시로 바로 가지 않고 릭샤와 차와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로 릭샤를 몰았다. 도시를 건너는 다리 밑에는 한 떼의 사람들이 오리무중으로 모여있었다. 이미 9명을 태워서 인원이 넘치는데도 승객을 더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릭샤들이 줄을 서 있었다. 사람들은 2루피, 3루피씩을 내고 릭샤에 오르고 내렸다. 150루피면 다른 사람이 내는 돈의 50배가 넘는 돈이다. 우리는 우리의 뒷좌석만은 사수하기 위해 앞좌석에 끼이고 매달린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고 잠자코 앉았다. 삼라만상이 다 연결되어 있다더니….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앉아있는 앞좌석의 형상이 마치 붓다가 말하던 그 연기(緣起)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돈을 더 냈다는 이유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뒷좌석에서 고집을 부리고 앉아 있는 우리는 아직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난 공(空)한 법(法: 존재)과 중도(中道)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고 불쌍한 중생이다.

바라나시의 풍경
 바라나시의 풍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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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어수룩한 저녁 무렵. 오토릭샤는 사람과 차와 소들이 엉켜있는 무아(無我)의 거리를 지나 먼지를 가득 피우며 바라나시를 향해 나아갔다. 유난히 성스러운 밤이다. 불교의 유적지와 힌두교의 사원 사이사이에 꿈틀거리는 삶의 생명력이 가득한 거리다. 사실 성스러움이란 건 교회나 절터가 아닌 시장 바닥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던가. 부처나 시바 성상의 모습이 아니라 내 수저에 생선살을 발라 올려주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서 나를 보고 어린 동생을 꼬집는 아이의 모습과 나의 삶을 연결할 수 있는 성숙함을 얻기까지. 이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길은 다시 떠나고, 호되게 겪고, 부단히 생각하는 것밖에는 없을 것 같다.


태그:#사르나트 , #인도 불교 , #붓다, #바라나시 ,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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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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