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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과실 품꾼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당연히(!) 집안은 가난하다. 부모는 중산층의 태도를 혐오하면서도 다른 여느 부모들처럼 자식이 중산층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식은 우여곡절 끝에 제법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간다. 하지만 과실 품꾼의 자식으로서 학교 다니는 일은 만만치 않다. 결국 자식은 대학을 그만두고 30여 년간 철저하게 육체노동자의 삶을 산다. 저자의 간단한 삶의 이력이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배경이 무엇일까.

소득이 높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일상의 문제가 줄어들거나 삶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녀의 학력을 높여 사무직에 종사하는 중산층으로 편입시키는 일은 육체노동자로서 자신의 삶과 그 가치를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일이었다. (8쪽)

저자 레그 테리오의 옹골찬 내면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대학 그만두고 30여 년간 철저하게 육체노동한 저자

<노동계급은 없다> 표지.
 <노동계급은 없다> 표지.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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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선택한 육체노동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일하는 부두노동이었다. 이 책은 그런 저자 자신의 육체노동 일대기이자 미국 유수의 국제 항만창고 노동조합(ILWU)과 함께한 경험에서 얻은 노동운동의 이면에 관한 기록이다. 노동 르포르타주의 진수이자 추천자 중 한 사람인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원장의 말을 빌려 평가하면, '노동운동 미시사'의 전범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동 현장에서 30여 년간 단련된 육체노동자의 글이어서일까. 슴슴한 듯하지만 입에 착착 와 감기는 미묘한 맛의 풍자와 해학. 건조한 서술 문체의 이면에 담긴 사라져가고 쇠락해가는 육체노동에 대한 저자의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는 맛도 일품이다. 책장을 펼치면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문장들 하나하나에 저자의 숨결과 손길이 느껴진다.

저자는 줄어든 일자리, 그리고 육체노동을 통해 얻은 삶과 문화 그리고 윤리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저자가 바라는 바는 명백하다. 그는 노동자에게 비극적인 현재 상황이 타개되기를, 그리하여 미국이 바뀌고 육체노동자의 운명이 달라지기를 바란다. 또한 육체노동자의 문화와 윤리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이 책에는 30여 년의 육체노동과 노조활동에서 얻은 노동의 참된 의미와 노동운동의 지혜가 두루 담겨 있다. 가령 저임금·비숙련 노동을 내주는 대신, 수익이 높고 창조적이며 흥미로운 고숙련 작업들을 늘리는 정책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루 8시간 동안 좁은 방에서 홀로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 아주 재미있다고 마지못해 인정한다손 쳐도, 이는 많은 미국의 산업들과 육체노동자 계급을 파괴하려는 의심스러운 거래가 아닐 수 없다. (101쪽)

나는 저자의 이런 분석을 전방위적으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들려주고 싶다. 대기업·첨단기술 중심의 고부가 가치 산업을 통해 많은 부를 획득하면 낙수효과를 통해 사회 전체가 잘 살게 된다는 논리가 지금 자유무역협정에 찬성하는 이들의 주된 논거다. 하지만 자유무역의 결과는 전통적인 산업의 쇠락과 단순·저임금 노동계층의 몰락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자유무역의 과실이 과연 누구에게 얼마만큼이나 돌아가는지 우리 모두 차분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최근 주요 산업국에서는 비용 절감과 경영 합리화를 명분으로 공장 문을 닫은 후 작업 공정을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자리를 수출하여 이득을 보자는 주장도 꽤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사례는 세계화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지극히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저자는 이들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미국인의 일자리 하나를 외국에 수출하지 않고 자국에 '보존'하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물품을 외국에서 생산해 들여오면 그것을 더 값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사익을 추구하는 특권층은 사무직 노동자와 육체노동자를 불문하고 모든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일자리를 중국에 수출하고 그곳에서 생산한 상품을 다시 수입하는 행위는 어떤 경제적 논거로도 뒷받침될 수 없다. (211쪽)

노동 시간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과거에는 일을 필요해서 했지 불필요한 일은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공장으로 들어간 농부들은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여가시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공장주들이 '노는 것은 손해'라는 생각으로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일을 시키면서부터였다.

저자는 그 12시간의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150년의 격렬한 투쟁이 이어졌다고 본다. 그뒤 노동자들은 8~10시간 근무, 마침내 주5일 근무제까지 쟁취한다. 저자는 점차 자동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근무시간을 이보다 단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불합리한 노동생산성(노동시간당 산출되는 상품 및 서비스의 양) 개념을 기준으로 하는 작업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경제 시스템 전체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에서다.

노동자 정당 없는 미국... 한국과 꼭 닮았네

인간에게 노동은 어떤 것일까. 빅토르 위고는 노동이 생명이자 사상이요 광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의 노동과 노동자는 이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저자가 기계화와 현대화 계획의 주된 목적을 작업 과정의 효율적인 감축이 아니라 노동자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본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대다수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는 거추장스러운 비용의 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서 툭하면 파업을 불법으로 몰고, 노동자들을 범법자 취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럴수록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특히 진보적인 노동자 정당은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두 거대 정당이 번갈아가며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다. 이들 두 정당은 노동(자)정당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미국에서 노동계급은 누구도 대표하려 들지 않는 계급이 돼버렸다. 왜 상당한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닌 미국에 명실상부한 노동(자)정당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부분적으로는 노동조합 지도부 탓이리라. AFL-CIO(미국노동총연맹 산업별 조합 회의)의 지도부는 더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행하기 위해, 항상 자체 구성 요소인 노동자를 경시해왔다. 즉 민주당을 지키고 민주당을 집권 정당으로 만드는 일을 우선시했다. (273쪽)

미국의 이런 모습은, 노동·진보 진영이 '비판적 지지' 때문에 선거 때마다 혼란스러워하는(?) 대한민국의 풍경과 꼭 닮아 있다.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노동자'가 대다수인 나라에 노동자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번듯한 노동(자)정당이 없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자칭 노동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진보'라는 이름을 쓰는 정당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들은 갈가리 찢긴 채 서로 앙숙이 돼버린 지 오래다. 노동자를 결집시키고 노동운동의 중심축이 되어야 할 노조는 자신들만의 좁은 울타리에 갇힌 채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있다. '노동(운동)'이나 '노조'라는 말은 주류 언론의 사명감 넘치는 착색 작업 덕분에 '불온한' 단어 목록의 한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물론 강한 노동(자)정당이나 거대한 규모의 노조가 노동자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보장은 없다. 저자도, 가령 좋은 노동조건이나 임금을 강성한 노조 덕으로 보는 견해는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자가 먼저 있고 노조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각자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의식이 투철한 노동자들이라야 강한 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부두노동자들이 일종의 복(가령, 저자가 일하는 미국 서부 연안의 일반 부두노동자가 1998년에 번 돈은 약 7만 7000 달러로, 이는 같은 산업 분야 이사들의 급여와 맞먹는 수준이다-기자 주)을 누리는 게 단지 운 때문일까. 단적으로 말해 운수는 아무 관련이 없다. (중략) 이 모든 노동환경은 그들이 자신들의 조직적 힘을 자각하고 활용하고 이용한 덕에 만들어올 수 있었다. (296쪽)

우리나라 정규직 노동자의 노조가입률은 14%에 불과하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33%(591만여 명)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가입률은 겨우 1.7%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노조는 '강성·폭력노조'로 악명이 높다. 기업 활동의 발목을 잡는 훼방꾼 이미지도 강하다. 노조에 가입해 활동하면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는 말도 예사로 듣는다. 그 사이에 대다수 순진한(?) 노동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잉여 계급'이 돼버린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상황이 심각한 이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우리 삶에 필수적인 노동을 지키려면 노동이 하나의 권리로 간주되어야 하며, 노동권도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노동은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가능한 평등하게 나뉘어야 한다. 이것은 숙련 노동과 비숙련 노동, 육체노동과 서비스 노동 등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정체성 자각과 조직화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홀로 있는 노동자는 위기의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관계 없는 그들끼리 무한 경쟁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자발적인 사내 모임이든 노조든 동료들과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그렇게 자신을 조직이나 사회와 연결해주는 끈이 탄탄할 때 고용주나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노동생산성이니 국가 경쟁력이니 하는 것들도 늘어나는 법이다. 세계적인 강소국인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노조가입률이 70%대에 이르는 사실을 전경련 회장님들은 과연 어떻게 해석할까.

덧붙이는 글 | <노동계급은 없다> (레그 테리오 지음, 박광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13. 8. 28. | 320쪽 | 1만 4천 원).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동계급은 없다 - 부속인간의 삶을 그린 노동 르포르타주

레그 테리오 지음, 박광호 옮김, 실천문학사(2013)


태그:#<노동계급은 없다>, #레그 테리오, #노동조합,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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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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