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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문제가 급기야 정치권에 의해 이념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성향을 운운하기 전에 사실 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쓰레기'일 뿐이라는 비판이 넘쳐나는 가운데, 현행 8종 교과서 중 7종의 좌파 교과서에 맞선 유일한 우파 교과서라며 치켜세우는 이들도 있다. 교과서 한 권이 우리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어떨까. 학교에서 아이들은 교과서를 통해 공부를 하고 세상을 배워간다. 거칠게 말해서 교과서를 상품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최종 소비자다. 교과서를 저술한 학계의 입장과 직접 수업을 하는 교사의 견해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교과서를 처음 접한 아이들이 그 내용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는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그래서 지난 17일 고등학교 2학년 한국사 수업에서 그 내용을 확인해봤다.

기실 수업시간 교과서를 읽어가며 수업하는 교사들은 많지 않다. 대개 교과서는 예습이나 복습할 때 읽어보도록 유도하고, 수업시간에는 교사가 미리 만든 파워포인트 자료나 학습지 등을 활용한다. 가르쳐야 할 내용에 비해 수업시수도 적고, 수업시간도 짧아 그저 칠판에 판서하며 수업하는 것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또, 교사는 자신만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미 정립돼 있지만, 어린 아이들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에 가깝다. 곧, 교사는 어느 정도 '편견'이 몸에 배어 있어 교과서 내용에 크게 좌지우지되지는 않지만, 역사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교과서 서술은 토씨 하나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역사의식 형성에 절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교학사 교과서는 '훌륭한' 수업 자료가 돼주었다. 교사로서 아이들의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수준과 해독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빔 프로젝터를 통해 교과서에 수록된 전문과 사진 자료, 설명 등을 보여주고, 읽고 난 느낌 그대로를 발표해보라고 했다.

우선, 교사의 입김을 철저히 배제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중간에 개입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혹, 발표 내용을 성적에 반영할라치면, 교사의 눈치도 보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할 것이므로, 그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았다. 수업이 아닌 놀이로, 오늘 하루 그냥 '자습'하자는 취지로 아이들에게 보고 느낀 그대로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했다.

사건 발생 연도나 인물, 사진 등의 사실관계가 틀리거나 인터넷 검색 사이트 등에서 그대로 베낀 경우가 수두룩하지만, '오타'인 셈치고 추후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아이들에게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보여준 건 수록된 사진과 그에 덧붙여진 설명, 그리고 교과서 본문 서술로, 아이들마다 읽고 난 '첫 인상'을 나누려는 게 목적이었다.

"교과서와 다큐멘터리 중에 대체 어떤 게 진실인가요?"

이번에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 판 한국사 교과서
▲ 교학사에서 발행한 한국사 교과서 이번에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 판 한국사 교과서
ⓒ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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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230쪽. '일본은 식민지를 자신들의 체제와 문화에 일치시키는 '동화주의'를 채택하였고, 나아가 '융합주의'를 적용하였다.' 괜히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굳이 보여주려 했던 서술은 아니었다. 다른 문장을 보여주려 페이지를 넘기는 찰나에 '눈치 빠른' 아이가 대뜸 질문을 했다. "선생님, 융합주의가 뭐예요?"

기실 교사인 나도 생소한 용어다.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선생님 역사 전공자 맞아요?"라며 되레 면박을 줬다. 융합주의란 학계에서 검증된 바 없는 낯선 용어다. 교과서 집필진들이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해 임의로 끌어다 쓴 '신조어'라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자칫 무능한 교사로 낙인찍힐 뻔했다.

260쪽의 '일제 시기 고등 교육기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일제와의 협력도 필요하였다'는 서술. 이 문장에서 아이들은 '도'라는 토씨에 주목했다. 만약 '협력이 필요했다'고 쓰면 너무 노골적이니 교묘하게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여건상 일제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은근히 일제를 두둔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278쪽. '1930년대 명동 거리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시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명동 거리의 생활 모습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아이들은 단박에 이렇게 반문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일제 때 비롯됐다는 이야기잖아?" 이구동성이건 아예 일제의 식민 통치를 미화하는 수작이라고 흥분했다.

293쪽. '이승만은 당시에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방송을 함으로써 국민들과 더욱 친밀하게 되었고, 광복 후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곳곳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힘에 부치는 듯 떨리는 목소리가 특징이었던 당시 이승만의 연설을 흉내 내며 깔깔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존경했던 지도자는 백범 김구라고 배웠는데, 아닌가요? 그래서 예전 10만 원 권 화폐 모델로 가장 많이 추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는 여운형인가가 당시 미국이 생각한 대통령감이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요. 그건 그 사람이 당시에 가장 인기가 있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한 아이는 집에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본 적 있다면서 이렇듯 혼란스러워했다.

"명색이 교과서인데 설마 거짓말을 서술하지는 않았을 텐데, 교과서와 다큐멘터리 중에 대체 어떤 게 진실인가요? 아무리 역사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지만, 사실을 왜곡했다면 둘 중 하나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닐까요?"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도 4·3과 5·18 이야기에 눈을 번쩍...  

그러나 그 부분까지는 약과였다. 교실 내 아이들을 분노로 들끓게 만든 건, 제주 4·3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편파적으로 기술한 부분에서다. 학교에서 해마다 4·3사건을 주제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는데다, 광주에 사는 고등학생이니 5·18에 대해서는 교과서가 아니라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다.

305쪽에 제주 4·3사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남로당의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기관을 습격하였다. 이때 많은 경찰들과 우익 인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 보자마자 아이들은 스크린에다가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영화 <지슬>을 단체 관람하고, 수학여행 때 직접 들은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네요. 5·10 총선거에 반대한 건, 어떻게 이룬 해방인데 분단된 정부 수립을 획책하느냐는 제주도민들의 반발인데,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도록 숨긴 거잖아요."

"왜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벌어진 미군정의 무차별 발포 사건에 대한 소개는 없는 거죠? 그게 4·3사건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고 현지 해설사 분이 설명해주셨는데."

"대체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남로당이 가해자, 경찰과 우익 인사,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양민이 피해자라는 구도잖아요? 4·3평화기념공원과 유족들은 당시 군인과 경찰, 우익 세력에 의해 양민 대부분이 희생됐다고 강조했는데. 그들이 거짓말을 한 건가요?"

백문이 불여일견. 제주도에서의 4일간의 수학여행은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4·3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듯하다. 아이들은 교과서 내용의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는가 하면 집필자의 의도조차 간파해내고 있었다. 여태껏 별 관심 없다는 듯 꾸벅꾸벅 졸거나 시큰둥해 하던 아이들도 4·3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하나같이 눈을 번쩍 떴다.

326쪽.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진압군이 투입되면서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다. 충돌은 유혈화되었고, 시위대의 일부가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점거하였다.' 토끼눈을 치켜뜨고 응시한 아이들은 모두가 허탈해했다. "그러니까 시위대가 문제라는 거네요. 그들의 폭력만 강조되고 있으니 말이에요."

"교과서를 쓴 사람들은 영화 <화려한 휴가>도, 영화로 만든 인기 웹툰 <26년>도 안 본 모양이죠? 당시 진압군으로 인해 고립되고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그 흔한 도난사고 한 건 발생하지도 않았고, 다친 사람들을 위해 앞다퉈 헌혈을 했던 공동체의 모습을 기리지는 못할망정 무장에 도청 점거라뇨?"

"발포 명령으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학살됐고, 이미 신군부의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 판결을 받았는데 왜 그런 이야기는 없는 거죠? 죽어간 이들이 묻힌 곳은 이미 국립묘지가 됐고,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우뚝 서는 등 역사적 평가가 끝났는데, 교과서 내용은 그걸 인정 못하겠다는 것 같아요."

"한국사 교과서 권위 실추되기 전에 검정 취소하는 게 마땅"

교학사 한국사교과서가 '친일·독재 미화'로 파문을 일으키는 가운데,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교학사에서 양진오 대표이사를 비롯한 회사 간부들이 입장을 밝힌 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 파문 교학사 입장발표 교학사 한국사교과서가 '친일·독재 미화'로 파문을 일으키는 가운데,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교학사에서 양진오 대표이사를 비롯한 회사 간부들이 입장을 밝힌 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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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 끝종이 울렸는데도 아이들의 발언은 계속됐다. 근래 들어 이렇게 활기찬 수업은 처음이었다. 비록 교과서가 아닌 인터넷과 스크린을 통해서이지만, 역사를 암기과목으로만 여겨 지루해하던 아이들이 교과서 내용을 분석하고 집필진의 성향을 간파해내고 있었다. 지도안에 따른 교사의 별도 강의 없이, 교과서를 읽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 교육이 된 셈이다.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교육부가 '오류투성이'인 이 교학사 교과서를 비롯한 8종의 모든 교과서를 수정 보완하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했더니, 아이들은 교육부의 '의도'가 뭔지 알겠다면 비아냥거렸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데, 교육부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교육부가 교학사 교과서 집필진들에 구린 데가 있나보다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오류가 300건 정도라면서요? 교과서 전체 쪽수를 감안하면, 평균 매 쪽마다 한 건씩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건데, 참 어이가 없네요. 더욱이 많은 국민들로부터 일본 우익 교과서보다 더 하다는 조롱을 받는 교과서인데, 그게 수정한다고 될 일인가요? 채택을 하고 말고를 떠나, 한국사 교과서의 권위가 실추되기 전에 검정을 취소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수업 총평하듯 한 아이가 내뱉은 말이다.


태그:#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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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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