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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커트 20000원, 실장님 커트 30000원, 원장님 커트 40000원…'

화려한 인테리어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촌스러운 가격표가 매장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원장님'의 스타일링 솜씨가 다른 디자이너에 비해 2배의 가격을 지불해도 좋을 만큼의 효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어숍 매장의 봉건성을 엿볼 수 있는 단상이리라.

이 봉건성이 지배하는 헤어숍은 제훈(가명, 21)의 일터이다. 채용과정에서 으레 진행하는 면접 절차도 없었다. 구인광고를 보고 연락을 준 제훈에게 몇 가지 신상을 묻던 디자이너는 다음날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 대신 출근을 하라는 간결한 지시를 내렸다.

첫 출근부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친절했다.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디자이너들은 이것저것 알려주기 위해 열심이었고, 가장 심하게 친절한 이는 이 매장의 원장이었다.

그녀는 제훈에게 다가와 "직원들에게 네가 나의 친척이라고 소개했다"며 그런 체하라고 했다. 처음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 과도한 친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째는 헤어숍에 남자 일손이 대단히 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태프들이 1주일을 못 버티고 도망가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를 보조하며 새 염색약을 짜내던 제훈은 문득 이 매장에서 3개월을 버틴 스스로가 대견하게 여겨졌다(제훈에게는 이곳이 첫 일터이다). 염색약과 파마약이 뒤범벅 되어 눈에 띄게 상해가는 손이 마치 훈장 같았기 때문이다.

약품에 닿는 부분의 피부는 어느새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한 선배는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이 제훈에게 노랗고 뚱뚱한 바셀린 통을 건넸다. 좋다는 의약품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촌스러운 통에 담긴 바셀린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이 약을 만들었다는 미국의 화학자 로버트에 대한 찬사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화려함과 월급은 비례하지 않는다

장주영 대전청년유니온 위원장이 21일 오후 대전 서구 타임월드네거리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미용실들의 스텝 노동착취실태를 규탄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자료사진).
 장주영 대전청년유니온 위원장이 21일 오후 대전 서구 타임월드네거리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미용실들의 스텝 노동착취실태를 규탄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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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목길마다 자리를 잡고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던 헤어숍들은 그 구수함을 포기하고 하나둘씩 화려한 옷을 입었다. 대로변에 휘황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낸 대형 프렌차이즈 헤어숍들은 압도적인 화사함과 서비스로 중무장한 채 고객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갓 우려 낸 블랙커피가 대접되고, 기다리는 손님을 위한 인터넷 서비스가 마련 되었다. 직원들의 일사불란한 서비스와 친절함은 상대로 하여금 존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고, 고객은 여기에 보답이라도 하듯 높은 비용을 기꺼이 지불했다. 물론 매장의 화려함, 고객이 지불하는 금액과 직원들이 받게 될 보상은 절대 비례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말이다.

청년유니온(위원장 한지혜)은 지난 2012년 10월부터 약 4개월 간 헤어숍에서 근무하는 스태프들의 근로 조건을 조사한 바 있다. 대부분 20대 초반으로 이루어진 청년들이 헤어숍이라는 현장에서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는 처참이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박준뷰티랩', '준오헤어' 등 유명 프렌차이즈 매장을 포함한 198개 매장을 조사하였으나 스태프에게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지급한 사업장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단 한 곳도. 이들 헤어숍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의 평균 시급은 약 3000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사 시점의 최저임금인 4580원에 턱없이 못 미치는 금액이다. 참고로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5년의 최저임금이 3100원이었다. 헤어숍의 젊은 스태프들은 박물관에나 보내버려야 할 시급을 받아가며 고객들에게 15만 원짜리 볼륨매직을 시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 선에서 그치면 참으로 다행일 텐데 그렇지 않다. 헤어숍 스태프들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64.9시간에 달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쉬는 시간 없이 오후 8시에 퇴근하고, 이 생활을 주6일 동안 하면 얼추 저 시간이 나온다.

시도때도 없이 야근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직장인들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하루 종일 서서 일한다는 것이다. 근로자에게 1주일에 52시간 이상 일을 시킨 사업주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도 있는데, 이는 과도한 장시간 근로가 인간의 건강과 존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에 시달리는 스태프들은 자연스레 다양한 질병과 싸우게 된다. 앞서 제훈의 손을 새까맣게 만든 피부병은 모든 스태프들이 경험하는 통과의례이며, 이 외에도 손목골절, 허리디스크, 하지정맥류 등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근골격계 질환들이 기다리고 있다. 청년유니온에 임금체불 상담을 받으러 온 한 스태프는 근로를 제공하던 중 류마티스 관절염이 발병하여 헤어디자이너로의 꿈을 포기했다고 털어놓았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폭력

지난 2월 18일, 미용실 스테프 근로조건 고발 기자회견이 열렸다.
 지난 2월 18일, 미용실 스테프 근로조건 고발 기자회견이 열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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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숍의 처참한 노동환경을 고발한 청년유니온의 문제제기는 정당했고, 이를 방치하기에는 고용노동부의 명분이 부족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5월 20일부터 31일까지 7대 프렌차이즈 헤어숍 207개 매장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하였으며 여기에서 확인된 약 2억 원의 체불임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지난 수십년 간 악조건 속에 방치 된 헤어숍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근로감독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소중하다. 고용노동부는 앞으로도 헤어숍 매장의 노동관계법령 위반 사실에 대한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밝혔으니 지켜볼 일이다.

스태프들의 근로환경에 대한 사업주의 항변은 간결하다. 업계 관행이라는 것이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수십 년 간 다리에 핏줄이 맺히고 손이 새까맣게 썩어가는 젊은 스태프들에게 희생과 절망이 강요돼 왔다. 그리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 야만적인 관행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면을 빌려 헤어숍을 지휘하는 원장님들께 정중히 간언을 드린다. 업계의 관행은 민주주의로 빚어낸 법률의 지엄함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앞으로도 업계의 관행을 발판삼아 헤어숍 스태프들에게 시급 3000원을 지급하기를 원하신다면 앞으로 있을 총선에 출마하여 국회에 입성하시는 것이 좋겠다. 물론 '헤어숍 관행법'이 통과될지 여부는 다른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에게도 가벼운 제안을 드리고 싶다. 우리의 아름다움을 가꿔주는 헤어숍 직원들에게 인간적인 존중과 친절을 함께 나누는 것은 어떨까. 머리를 예쁘게 만져주셔서 고맙다. 고생많으셨다. 이 가벼운 친절의 한마디가 이 땅에서 일하며 꿈꾸는 젊은 청년들의 삶을 회복시킬 열쇠가 될 것이다.


태그:#미용실, #헤어숍, #고용노동부, #청년유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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