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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역사와 정의' 앞에서
▲ 라정현 월간 <시사경제> 대표 그의 작품 '역사와 정의' 앞에서
ⓒ 라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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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신당이 지지율 25%를 넘었다. 세상에 없는 정당이다. 서류상 존재하는 회사를 우리는 '페이퍼 컴퍼니'로 부르듯, 안의 신당을 '페이퍼 파티'로 불러야 하나?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래프 상에만 존재하니까 '그래프 파티'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 2013년 8월 5일 라정현

페이스북을 훑어보다 촌철살인 같은 문장에 스크롤을 멈췄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써내려간 이야기에 온 정신이 팔렸다. 그의 이름은 라정현, 올해 만으로 마흔셋인 대한민국의 아저씨다.

그런데 크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제대로 된 직업 하나 갖기 힘든 세상에서 공적인 직함만 다섯 개였다. 광고를 디자인하고 시를 쓰며 취재를 하고 잡지(월간 <시사경제>)를 발행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안중근과 신채호를 주인공 삼아 인사동 갤러리에서 팝아트 예술작품까지 선보였다. 주제는 '역사와 정의'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나 다를까. 분홍색 와이셔츠에 색감 좋은 조끼, 반듯하게 빗어 올린 머리까지. 한눈에 봐도 그는 '다른 매력'을 가진 아저씨였다. 지난 11일 가을비 내린 인사동 거리에서 다섯 개의 직업을 갖고 사는 남자 라정현(43)씨를 직접 만나봤다.

"예술가가 보면 시사도 경제도 다르게 보인다"

그의 등단 작품 <가을밤의 향연>
▲ 시인 라정현 그의 등단 작품 <가을밤의 향연>
ⓒ 라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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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겨울, 처음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때까지 20년을 온전히 광고와 디자인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변화가 필요했다. 뭔가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는 이를 시로 표현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운이 좋았다'는 말을 보탰다. '시인 라정현'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1년 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평소 그의 광고 기획과 디자인, 그가 쓴 글을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월간 <시사경제>의 초대 발행인이었다. 그는 라정현씨의 탁월한 '기획력'을 높이 샀다. 이어 월간 <시사경제>의 '대표'로 초빙했다. 말 그대로 광고 디자이너가 대한민국 시사경제를 다루는 월간지의 발행인이 되어달라는 요구였다.

라정현씨는 처음 제안을 듣자마자 '무리한 일'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이 보다 더 뜨거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결과를 놓고 보면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광고와 디자인은 항상 트랜드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연스레 사회적인 흐름을 읽어내야만 하고요. 그걸 반추해 보니, 시사경제를 읽는 눈과 광고를 만드는 일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상상만 해도 즐겁더라고요. 디자이너가 만든 시사경제 잡지라…."

그의 표정엔 마치 이십대 청년이 그려놓은 것 같은 뜨거움이 보였다.

"메이저가 다루지 못한 이야기, 그걸 파고듭니다"

라정현씨는 뒤늦게 출발한 만큼 미친듯이 달렸다. 매달 초면 각계각층의 전문가를 찾아 글을 요청했고, 광고 만들던 가닥으로 디자인과 편집을 직접 손봤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물이 월간 <시사경제>로 나온 것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는 자연스레 '언론인'이 돼버렸다. 글 청탁이 어려울 때,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며 글을 썼고, 하나 하나 따지듯 공부하며 기사를 작성했다. 2013년 9월호 <시사경제>에도 그의 기사 두 편이 녹아 있었다.

"새롭다는 건 '아직 모른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익히고 배워야죠. 도서관, 인터넷, 각종 언론기관, 배울 수 있는 곳은 무궁무진합니다. 그 점을 잘 이용했어요. 다만 결코 잊어선 안되는 사실은, 기획자로서 브랜드를 만든다는 점. 독자가 원하는 상품이 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요."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에 지난 1년의 뿌듯함이 스쳤다.

하지만 모든 게 마음 같진 않았다.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했다. 특히 발행인의 입장에서 아무리 좋은 글을 담아도, 팔리지 않으면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운영'이라는 단어가 떠나질 않았다. 라정현씨는 그때부터 더욱 발 벗고 나섰다.

"사람을 찾아 다녔어요. 메이저 잡지에서 다루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만의 특별한 스토리를 찾았습니다. 주목하지 않은 서민과 소상공인의 이야기를 집중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담아냈죠. 세상에 알리기만 하면 충분히 공감할 거라 생각했어요. 이 점이 주효했습니다."

"국정원 사태와 역사교과서 왜곡을 보면서..." 

대화가 깊어지자, 대한민국에서 '직업 5개를 갖고 산다는 건 어떤 의미'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계속 하다 보니 사람을 알겠더라고요. 조심스럽지만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에도 관심이 생겼고요. 그 속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도 시작된 거죠. 종국에는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국정원이 '역사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다른 한쪽에선 일본 우익 교과서보다 더한 친일교과서가 버젓이 등장하고 있고.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안중근 의사와 '조선상고사'를 지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단언컨대 그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두 사람의 정신을 담아냈다고 한다. 디자이너로, 광고기획자로, 시인으로, 기자로, 잡지 발행인으로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을 지금의 작품으로 표현해 낸 것이다.

그의 말대로, <역사와 정의>로 명명된 그의 팝아트 작품은 형언하기 힘든 진중함이 엿보였다. 굳게 다문 안중근의 입과 담담하지만 깊은 신채호의 눈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은 소통의 문제"

'소통'하며 살아오다 보니, 다섯 개의 직업을 갖게 됐다
▲ 다섯 개의 직업을 가진 남자 라정현 '소통'하며 살아오다 보니, 다섯 개의 직업을 갖게 됐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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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정현씨가 지금까지 다섯 가지 직업을 이어오며 결코 잊지 않은 사실 하나가 있다. 바로 '소통'이다.

"시를 쓰고 기사를 작성하고 잡지를 만들고 작품 활동을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안에서 존재 이유를 알아가는 거죠.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제대로 된 소통을 위해선 원리와 법칙이 요구됩니다. 일방통행은 소통이 아니죠. 그걸 어길 시엔 당연히 책임도 따라야 하고요."

그의 모든 활동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소통'이 보였다. 라정현씨에게 끝으로 '다섯 가지 직업 외 더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 후, '아직 모른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 의미 따지고 보면, '역사와 정의'가 바로설 때까지 계속 해야 할 것들을 찾아가겠다는 말과 같다. 그의 의지가 다시 한 번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과연 라정현씨는 얼마나 더 많은 직업을 새로이 찾게 될까. 우리사회에 '정의로운 소통'이 요구되는 이상, 그는 쉽게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계속 기대해본다.


태그:#라정현, #월간 시사경제, #국정원,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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