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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의 시에 귀원전거(歸園田居)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고문진보에는 귀전원거(歸田園居)라고 실렸는데 학자들은 도연명의 시를 묶은 도청절집(陶靖節集)을 근거로 귀원전거(歸園田居)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귀원전거는 인터넷에도 소개된 것이 많기에 여기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개인적으로 자연 속에 사는 시인의 마음과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기에 그의 시 세계에 공감하며 그렇게 살고자 하는 뜻에서 가끔 읽는 편이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농촌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은 것을 귀촌(歸村)이라고 한다면, 이미 준비된 '숙지원'이라는 공간에 집을 지어 이사한 것은 귀원(歸園)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해 2월 말 퇴직하고 숙지원 한 쪽에 4월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여 이사한 것은 지난해 8월 17일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어디서든 얼마나 다르겠냐면서 우리가 택한 농촌 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집터를 가꾸고 기다렸다는 점, 또한 우리가 여생을 보낼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집의 의미와 집을 바라보는 감회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1년을 훌쩍 넘겨 두 번째 추석 맞이를 앞두고 있다.

멜란포디움과 어우러진 보라색 과꽃이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꽃밭 관리는 아내의 몫이다.
▲ 과꽃 멜란포디움과 어우러진 보라색 과꽃이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꽃밭 관리는 아내의 몫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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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원 1년, 농촌 살림살이가 다 편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승용차가 없으면 광주는 물론 읍내 출입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장이 멀리 있어 불편하다. 광주에서 구입한 물건의 서비스를 받을 때도 행정구역상 시외라는 점 때문에 출장비를 더 청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억울한 일이다.

택배를 부칠 때 일일이 우체국이나 택배 회사로 직접 찾아가야하는 것, 서점이나 여타 문화 공간과 먼 것도 아쉽다. 도시에 비해 모기가 많고 가끔 뱀과 만나는 것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반대로 좋았던 점은 더 많았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안심할 수 있는 채소 등을 자급자족하는 것은 작은 즐거움이었다. 부부가 협동과 분업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 가는 삶도 편안했다. 정년 후 몸과 마음을 쉬지 않고 꾸준히 놀이처럼 일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불편한 교통 사정을 이유로 원치 않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면죄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외출할 일이 줄어드니 옷에 신경 쓸 일이 없고, 술이 따르는 외식을 피할 수 있으니 건강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 밖에 식품비, 기름 값, 각종 공과금도 적게 들어 직장에 있을 때보다 고정 소득이 줄어든 형편에서 가계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자두나무 밑에 퇴비를 쌓아두고 보니 든든하다. 화학비료는 쓰지 않는 대신 가축의 분뇨를 발효시킨 퇴비를 쓴다.
▲ 퇴비 자두나무 밑에 퇴비를 쌓아두고 보니 든든하다. 화학비료는 쓰지 않는 대신 가축의 분뇨를 발효시킨 퇴비를 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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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 무엇보다 좋은 점은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직장에 근무할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사하기 전, 광주에서 숙지원을 오가는 데도 항상 바빴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고 하지만 이동하는 시간도 왕복 한 시간을 잡아야 했고, 청소·빨래 등 집안일 보고 간식이라도 준비하다 보면 시간에 허둥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원 이후, 오가는 시간 이상의 여유가 생겼다. 또한 주말에 집중했던 일을 분산하는 방식으로 날마다 일을 하다보니 여름철에는 새벽에 일어나 두어 시간만 일을 해도 예전보다 숙지원을 단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텃밭 농사 수준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엄청난 여유였다.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은 텃밭 일을 더 할 수 있는 여유라는 뜻도 있지만,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더 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덕분에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뽑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서 그들의 생각을 듣고, 사는 모습을 보는 시간도 늘었다. 주변이 온통 산이라 준비 없이도 걸음만 떼면 '산책'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시간을 자주 가질 수도 있게 된 점도 변화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직장 생활이란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항상 시간에 쫓기고 사람에게 부대끼는 생활이다. 
또 자신이 누군가의 주관적· 객관적 평가의 대상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귀원은 시간과 타인을 의식해야 하는 긴장에서의 해방이었다. 출근이 늦었다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밭에 무엇을 심건 눈치 안 봐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홀가분한지. 또 수확이 많건 적건 그것으로 평가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나를 편하게 했다.

농촌은 마을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불편만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났을 때 기본적인 예절만 지킨다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는 곳이다. 농촌 마을은 이제 자연적인 1차적 집단으로서의 사회적 공동체가 아니다. 1년에 한두 번 울력이나 마을 행사에 참여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립 밖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도 괜찮은 2차적 관계의 집단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농촌 마을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지 않고 그런 격차로 인한 눈에 보이는 차별도 거의 없는 사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객관적인 평가에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살아 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참깨 베어낸 밭을 뒤집어 퇴비를 깔고 비닐멀칭을 하여 마늘을 심을 밭을 만들었다. 완전한 수작업이었다.
▲ 마늘밭 참깨 베어낸 밭을 뒤집어 퇴비를 깔고 비닐멀칭을 하여 마늘을 심을 밭을 만들었다. 완전한 수작업이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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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일이란 아무리 약속 시간 내에 마치자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여름 볕에 고추 말리기, 말린 고추를 마른 수건으로 닦고 꼭지를 따서 보관하는 일, 열흘에 한 번쯤 잔디 깎기, 잔디 깎는 기계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예초기로 밀어내는 일은 뚝딱 해치울 아침 해장거리 일이 아니다. 그리고 텃밭에 심었던 것을 거두어 말리고 버릴 것을 버리는 일, 꽃밭의 시든 꽃대를 치우고 계절에 맞추어 새로운 꽃을 심는 것도 아침 시간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밭에 거름을 뿌려 뒤집고 김장 무와 배추 심을 밭을 만드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보니 이슬이 마른 오전이나 해가 저무는 저녁 시간에도 호미를 잡고 괭이를 잡아야할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건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다. 일을 하다가도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일이요, 당장 급한 일이 아니면 싫다고 버텨도 누가 강제하는 일도 아니다.
아등바등 시간에 쫓기지 않고,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편하게 일하고 편하게 쉴 수 있었던 곳. 지난 1년, 우리에게 숙지원은 그런 기억의 공간이었다.  

지난 8월 아내와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떠나기 전, 긴 여행에 대비하여 부지런히 풀을 매고 잔디를 깎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계신다고 하지만 연로한 탓에, 주인 없는 참깨 밭과 고추밭은 이웃 아주머니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한참 풀 세상인 여름철에 거의 2주간 집을 비웠으니 숙지원의 모습이 어떠했겠는가.

예상은 했지만 쇠비름은 방석만큼 널찍하게 자리를 잡았고, 환삼 덩쿨은 세상을 만났다는 듯 주변의 나무들을 감고 있었다. 아내는 쇠비름을 잡아내고 나는 나무에 감긴 환삼 덩쿨을 걷어냈다. 아내는 꽃밭의 풀을 뽑고 나는 무와 배추 등을 심을 가을 채소밭을 일구었다. 아내는 잔디밭을 매고 나는 잔디를 깎았다. 아침 시간에만 일한다는 묵시적인 합의는 잠시 양해 사항이 되었다.

2주일의 일이 밀린 셈이었으니 9월 초까지도 평소보다 2배쯤 일을 했을 것이다. 이제 거의 정리했다. 고추는 아직 말리는 중인데 다 합하면 30근쯤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 가족이 먹고 남을 양이라고 한다. 다만 한 말을 목표로 했던 참깨는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농사가 어디 농부의 뜻대로만 이루어질 일인가.

백일홍은 여름의 끝자락임을 알려주고 있다. 마당의 잔디도 푸른 빛을 잃었다.
▲ 백일홍 백일홍은 여름의 끝자락임을 알려주고 있다. 마당의 잔디도 푸른 빛을 잃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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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무리 없이 편안하게 농촌에 연착륙했다고 자평한다. 그리고 우리가 꿈꾸었던 대로 자연의 변화에 감동하고 즐겁게 일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고 회고한다. 태어나서 농촌 살림을 해 본 적이 없던 아내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80% 만족하는 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벽이면 나보다 먼저 일어나 호미를 잡는다. 텃밭이며 꽃밭의 풀매는 솜씨가 야무지게 보인다. 무엇보다 건강을 많이 회복한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금년 추석 명절에도 고속도로에 귀성 차량이 넘칠 것이다. 무엇이 많은 사람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이는지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한 것은 농어촌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회귀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형편, 그리고 농촌은 살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포기한다. 정부의 잘못된 농업 정책으로 목 좋은 대부분의 땅은 도시인들 소유가 되었고, 노동력을 잃은 늙고 가난한 농민들만 남아 농촌을 지키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느 정도 고정 수입만 있다면 '국민행복시대'라고 강조하면서 오히려 불편을 주는 정부에게 행복을 구걸할 필요 없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농촌이라고. 또 작은 정성과 기원을 담아 자신의 의지로 자연의 한 부분을 경영하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농촌이라고. 그리고 자연 속의 농촌은 살아온 날들을 회고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더러는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생의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곳이라고.

비록 가진 것이 많지 않을지라도 사물에 얽매임 없이 청정하게 산다면, 회한없이 가는 세월을 보내고 담담하게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면 결코 추한 여생은 되지 않으리라. 다시 한 번 도시에서 할 일을 못 찾은 은퇴자들과 은퇴 예정자들에게 전원으로 돌아가는 귀원(歸園)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필통, 다음카페 한종나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귀원 1년의 소회, #연착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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