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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9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대전충청입니다. [편집자말]
한 노인이 생전 육영수씨의 활동을 담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위쪽 왼편 사진이 어린 박지만씨의 모습이다.
▲ 육영수 생가 한 노인이 생전 육영수씨의 활동을 담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위쪽 왼편 사진이 어린 박지만씨의 모습이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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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 시인 정지용은 자신의 시 향수에서 "넓은 벌 동쪽 끝에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간다"고 노래했다. 과연 향수의 무대가 시인의 고향이었는지 과문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의 생가 동쪽 끝으로 10여 분을 올라가다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외가, 그러니까 육영수 생가가 나온다.

얼마 전 지역 언론에는 일제히 '관람객들이 넘쳐나는데 생가 주변에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대책이 시급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는 박사모 등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관람객들이 급증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 열기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나 의아했지만 언론이 거짓말 할리는 없을 터, 그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가을 건들바람에 하늘 높아진 9월 초 일요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육영수 생가를 찾았다.

"큰일 아니오? 온통 나라가 간첩 천지가 되었으니..."

교동집 작은 아씨로 불리던 그는 1950년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았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열중하고 있는 관람객들.
▲ 육영수 생가 교동집 작은 아씨로 불리던 그는 1950년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았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열중하고 있는 관람객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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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자가 도착한 현장은 의외로 한산했다. 생가 앞 주차장에 버스가 한 대가 세워져 있었으나 모두 인근 마성산으로 등반을 떠나 텅 빈 상태였다. 또 조상묘에 벌초 하러 오는 길에 찾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가족단위 방문객 승용차 10여 대가 주차해 있을 정도였다.

두 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대구와 울산에서 올라온 등산객 버스 2대와 금산 인삼시장에 가는 길에 들렀다는 성남에서 내려온 버스 1대를 볼 수 있었다. 기자가 취재한 하루 시간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날 단체 관람객들은 대부분 50~60대 이상으로 보였으며, 대략 20여 분 내외의 바쁜 일정으로 이곳을 스치듯 다녀갔다.

그럼에도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주변을 돌아보는 표정들은 사뭇 진지했다. 때로는 눈물을 훔치는 노인들도 있었다. 특히 그들은 결혼 전 육영수씨의 옥천 생활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보였으며, 삼삼오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관심과 화제로 이어가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대구에서 올라온 한 노인은 방문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아 막말로 박정희 대통령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육영수 여사 싫어하는 사람 봤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분이 그렇게 일찍 가시다니 참 마음이 아프지요…" 하고는, 대뜸 "그런데 기자양반 큰일 아니오? 지금 우리나라가 온통 간첩 천지가 되었으니…" 하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하였다.

이후엔 기다리던 관람객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듣던 바와는 달리 한산한 분위기가 궁금하여 관리소 관계자를 찾았다. 옥천군청 관광개발팀의 조도형 관리담당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정신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라면서 "아마 대략 잡아 하루에 1천 명 정도는 왔었다고 봐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통령 선거 직후에는 하루에 버스만 90여 대 이상이 온 적도 있으나, 5월경부터는 방문객이 급격히 줄어들었다"라며 "하지만 무더위가 지나간 만큼 다시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오늘 같은 분위기로 봤을 때 앞으로 어떨지 가늠하기 힘들어 보였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북적거릴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한적했다. 생가를 방문한 한 노인이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다.
▲ 육영수 생가 북적거릴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한적했다. 생가를 방문한 한 노인이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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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전을 보낸 후 문득 생가 정문에 놓여 있는 세 권의 방명록이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관람한 사람들 대부분이 방명록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혹은 진지하게 적고 나갔기 때문이다. 과연 저 사람들은 무엇을 저렇게 진지하게 남기고 가는 것일까? 최근 기록된 한 달여간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훌륭한 국모님의 집에 오니 감개가 무량 합니다."
"당신 따님께서 나라 발전과 영광을 위해 노심초사 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육영수 여사님과 박정희 대통령의 명복을 기리며 박근혜 대통령의 건강과 현명하신 정치를 바라며 제발 종북세력을 완전 척결(해 주시길) 바랍니다."

충성을 다하겠다는 글귀가 자주 등장했다. 육영수씨를 국모로 생각한다는 글도 많이 보였다.
▲ 육영수 생가 방명록 충성을 다하겠다는 글귀가 자주 등장했다. 육영수씨를 국모로 생각한다는 글도 많이 보였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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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에 기록된 대부분의 글들은 육영수씨를 '국모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말한 것들이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담은 글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또한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씨, 박근혜 대통령을 하나의 인물상으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충성을 맹세한다는 문구가 유난히 많았다는 점이다(아마 누군가 처음 관련 문구를 적었을 것이고, 이후에 사람들이 계속 따라 쓴 것인 듯).

그리고 또 이곳 방명록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과감하게 자신의 아파트 동호수는 물론 집 전화나 휴대전화번호 등 민감한 개인정보까지 공개했다는 점이다. 문득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선생님 이렇게 개인정보를 노출 하시면 불안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기자의 말에 울산에서 왔다는 민아무개씨는 "개인정보, 에이 그런 거 관계없지요 뭐…,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이거 청와대에서 복사해갔다가 나중에 감사장이라도 하나 오면 고마운 거지 뭐. 아니면 문자라도…"라고 말했다.

"무지 부잣집이었나 봐요?"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 육영수 생가. 폐허로 방치되던 가옥을 2010년 옥천군이 37억을 들여 현재와 같이 3천여평 규모로 복원한 후 2012년 개관하였다.
▲ 육영수 생가 사랑채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 육영수 생가. 폐허로 방치되던 가옥을 2010년 옥천군이 37억을 들여 현재와 같이 3천여평 규모로 복원한 후 2012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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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엄마죠? (집이) 무지 크네요!"
"정지용 시인보다 더 큰 궁궐에서 사셨군요…."
"(어린이의 삐뚤빼뚤한 글씨) 부자였나 봐"

사실 이번 취재의 목적은 육영수 생가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생가 자체의 크기나 지리적 위치 또는 육영수씨의 과거 행적 취재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취재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대통령 외할아버지는 정말 큰 부자였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는 말에 따르면, 대통령의 외할아버지는 인삼중개업 등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육영수 생가는 1918년 그의 부친이 1600년대부터 내려오던 99칸 저택을 구입하여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에 집안에 별도의 차고를 두고 벤츠 자가용과 트럭, 대형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가히 그 재력을 짐작할 만하다.

북적거릴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한산한 생가 앞도로 모습. 뒤에 보이는 건물이 1918년 당시 벤츠와 트럭, 대형오토바이를 보관하던 차고의 모습이다.
▲ 육영수 생가 북적거릴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한산한 생가 앞도로 모습. 뒤에 보이는 건물이 1918년 당시 벤츠와 트럭, 대형오토바이를 보관하던 차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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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65년 부친이 작고하고, 1974년 육영수씨마저 사망한 이후로는 친정집 식구들끼리 상속 분쟁 등으로 세금이 체납되거나 집이 붕괴되는 등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2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후 우여곡절 끝에 옥천군이 후손들로부터 기부채납으로 양도 받아 37억여 원을 들여 복원하고, 2011년 5월 개관한 것이다.

어느덧 2013년 초 가을 어느 일요일, 이렇게 하루 취재 일정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육영수 신화가 어느 부분 상징 조작일 수 있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음에도, 그날 대통령 외가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오갔다. 좋든 싫든 간에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육영수 생가 취재를 마무리하고 나서면서 이날 육영수 생가를 찾았던 관람객들이 자신들의 집인 대구나 울산, 성남 등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근혜 대통령이 밝힌 화합과 소통, 배려의 정신 하나쯤 가슴에 새겨봤으면 하는 소박(?)한 기대를 해봤다. 그리고 찾는 이 없어 쓸쓸한 정지용 생가 거리를 찾아볼 셈으로 발길을 옮겼다.

옥천 육영수 생가 바로 옆 인근에 현대시의 시성이라 불리는 정지용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다.
▲ 정지용 생가 옥천 육영수 생가 바로 옆 인근에 현대시의 시성이라 불리는 정지용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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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육영수 생가, #박근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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