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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겁나던데요."

대학을 휴학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며 한 달 째 동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아들녀석이 어제 저녁 내게 말했다.

아들의 말에 따르면, 평소 조용한 성격의 소시민 풍인 식당 주인과 그의 아내, 그리고 주방일을 보는 식당 주인의 이모가 점심 손님을 기다리며 서로 주고 받는 말이 너무 겁이나더라는 것이다.

마침 TV에서 나오는 '이석기 내란음모' 수사 소식을 시청하던 식당주인이 "야, 저새끼 진짜 죽일 놈이네"라고 하자 나이지긋한 이모는 "저런 새끼는 나무에 매달아 몽둥이로 쳐 죽여야 한다"며 흥분했다는 것이다. 아들은 '이 대화에 끼여들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 지 모르겠다' 싶어 침묵했다고 한다. 평범한 요즘 애들인 아들의 생각까지 이 글에 적고 싶지는 않다.

아들의 말 "와! 겁나던데요"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자유청년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8월 3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내곡동 국정원 앞에서 통합진보당의 내란조작 공안탄압 규탄대회에 맞불집회를 열고 내란음모를 주도한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을 규탄하며 북한 인공기와 이 의원의 사진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벌이고 있다.
▲ 보수단체, 이석기 의원 규탄 화형식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자유청년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8월 3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내곡동 국정원 앞에서 통합진보당의 내란조작 공안탄압 규탄대회에 맞불집회를 열고 내란음모를 주도한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을 규탄하며 북한 인공기와 이 의원의 사진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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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아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요즘 주변에서 듣는 말들은 이 식당에서 나온 말들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나는 담배며 소주, 음료수 등 물건을 살 때면 꼭 동네 골목슈퍼 몇 곳을 도는데, 그 이유는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자고 하는 취재 본능(?)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동네 가게 주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달 말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작한 후 연일 터져 나오는 소식들은 동네 소시민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 같다. 중소상인들은 낮이든 밤이든 TV를 틀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하필 내가 가게에 들를 때면 꼭 '이석기 수사 소식'이 비쳐진다. 그런데 동네 곳곳에서는 날이 갈수록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을 욕하는 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참 재미있는 것은, 엊그제까지 "먹고 살기 힘들다"고 토로하던 모습은 간 데 없고, "이석기 나쁜 놈"이라는 주제의 말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이상하리만치 꼭 가게 한편에는 TV가 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솔직히 동네 슈퍼 뿐 아니라, 내가 자주가는 순대집 아줌마와 그곳에서 떡뽁이를 먹고 있던 청년, 약국 주인, 심지어 횟집 주방장도 비슷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런데 평소 동네 가게에서 몇몇이 모여 소줏잔을 기울일 때 그들이 했던 말을 상기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놈의 세상 '혁명'이라도 일어나 확 뒤비지지 않나"라며 자신의 각박한 현실을 토로하는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지금 "이석기가 혁명이라고 했다"며 광분한다.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 소위 '이석기 내란 음모 녹취록' 전문이라는 것을 읽어보기는 했지만, 나는 실제로 그들이 내란을 일으키기 위해 혁명을 도모하고, 권총과 폭탄을 제조해 유류시설을 폭발시키려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동네 사람들의 생각도 대동 소이한 것 같다. 사람들이 광분하는 것은 '이석기이기 때문'이다. 짐짓 두렵고 우려감 마저 든다.

추억 : 학생 운동 해본 적 없는 내게도 '빨갱이'란 딱지가

'내란음모' 혐의로 현역의원 사상 12번째 체포동의안이 처리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4일 저녁 국정원 직원들에 의해 강제 구인돼 수원지법으로 이송되고 있다.
 '내란음모' 혐의로 현역의원 사상 12번째 체포동의안이 처리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4일 저녁 국정원 직원들에 의해 강제 구인돼 수원지법으로 이송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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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 다닐 때 소위 '운동'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솔직히 오히려 학생운동을 하는 녀석들을 보면 "참 배부른 놈들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의 경우지만, 실제로 좀 산다는 집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전두환과 민정당에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진 기억이 난다.

"전두환이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계엄군이 여학생을 난도질 했다"는 소식을 나도 듣기는 했지만, 나와 같은 대다수 80년대 초반 학번 대부분이 그렇듯 무장한 전경을 향해 돌을 던지고 파출소마다 쳐진 쇠망에 화염병을 던질 용기나 여력이 없었다.

학생운동권 출신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등록금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한숨을 마다하고, 잡혀갈 것이 우려되는 사회문제에 직접 참여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뒤 나는 그들의 용기와 참여의식에 존경심이 들었고, 그들에게 미안하고 늦게 나마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어느날, 전혀 그들과 진영이 다를 것 같은 내게도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는 일이 생겼다. 하지만 당시 나는 부인하지도 않았고, 그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도 않았다. 내가 한 일이 개인 영달과 부귀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역일간지에 근무하던 2004년, 신문사 경영진의 권력 다툼이 빌미가 돼 동료 몇 명이 해고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지 않아도 '사이비' 기자를 강요하던 사주에게 대항할 기회를 찾고 있던 나와 동료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사주 퇴진운동에 나섰다.

참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와 동료기자들 자체가 그동안 노동자에 대한 기사를 '소발에 쥐 잡듯이' 써온, 말그대로 강자편에서 써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우리에게 해고 위기가 닥치니 노조가 만들어지고 생소하기만 하던 '투쟁'이라는 말이 우리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솔직히 노조라는 개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내가 노조위원장이 된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창피한 일이다.

3개월의 파업과 직장폐쇄로 갈림길에 처한 우리는 결국 승부수를 던졌다. 사주를 몰아내는 길만이 우리가 살길이기에, 신문사 대주주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나의 학교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배는 당시 울산교육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쥔, 지역의 최고유지였다. 선배의 입김은 대주주에게도 통한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선배에게 "대주주에게 부탁해 사장을 바꿔달라고 요청해 달라"고 사정사정했다. 우리의 사정이 딱했든지 선배는 대주주를 만난 모양이다. 며칠 후 선배는 내게 "대주주가 그러는데, '빨갱이 같은 놈들 말 뭐하러 들어주나'라고 핀잔만 들었다"는 것이다.

생전 처음 듣는 '빨갱이'라는 소리에 다소 의아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북한에 동조한 적도 없고, 오히려 북한독재체재를 비토하던 나와 동료들이 어느날 '빨갱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광풍 말고, 진짜 중요한 현실을 봐야

서론이 길었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이렇다. 우리 사회는 기득권에 대항하고, 나아가서는 보수적 사고에 반하는 언행을 하면, 그가 누구든, 과거 무엇을 했든, 소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는 묘한 풍토가 정착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나와 대다수 소시민들이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학생운동을 통해 사회참여를 못한 것을 낙인 찍으면 안 되듯이, 이석기 의원이 과거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민혁당 사건에서 유죄를 받았다고 해서 현재의 그를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석기 의원을 두둔하거나 통합진보당을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사태가 터진 후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이 민주진보 진영에 간곡히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우리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며 오히려 화를 낸 것을 나무라고 싶다.

중요한 것은 우후죽순 늘어난 대형마트에 매출을 뺐겨 못살겠다고 토로하던 중소상인들과, 비정규직을 남발하는 대기업의 횡포에 못 살겠다며 민주진보 진영에 도움을 요청하던 서민들이, 지금은 정작 자신의 어려움은 잊은 채 '이석기 내란음모'라는 광풍에 휘말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루빨리 광풍에서 벗어나 촛불을 통해 이 사회가 직면한 진짜 중요한 현실을 다시 바라보기를 바랄 뿐이다.

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국정원 시국회의 주최로 '국정원 대선개입·정치공작 규탄 제11차 범국민촛불대회'가 열렸다.
▲ 청계광장 밝힌 '제11차 범국민촛불대회' 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국정원 시국회의 주최로 '국정원 대선개입·정치공작 규탄 제11차 범국민촛불대회'가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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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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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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