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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산이 제일산이 된 근거는?

제일산
 제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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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각을 내려가면서 처음 만나는 암벽 글자가 제일산(第一山)이다. 오른쪽에 "도광(道光) 임진(壬辰) 동(冬)"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1832년 겨울에 새겼다. 글을 쓴 사람은 "무현장군(武顯將軍) 영남(嶺南) 서경초(徐慶超)"다. 그럼 그는 왜 제일산이라고 썼을까? 제일이라는 말은 명대의 서하객(徐霞客)이 <무이산일기>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이 봉우리가 정말로 제일이다(此峰固應第一也)"라는 말을 사용했고, 이 문장을 차용해서 서경초가 제일산이라는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서 "무량수불", "진재기정(眞宰奇情)", "선범혼합(仙凡混合)"이라는 세 가지 각자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불교와 도교 사상의 공존을 보여준다. '무량수불'은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님이다.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다고 한다. '진재'는 하느님 또는 조물주다. '기정'은 기이하면서도 정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 두 각자 아래 새겨진 '선범혼합'은 선계와 속계가 혼합되어 있다는 뜻으로 도교적인 개념이다.

쇠똥구리
 쇠똥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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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도마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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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지나면 중정공원(中正公園)이라는 패방을 만나게 된다. 중정은 장개석의 호로, 천유봉을 자주 찾아 이곳을 중정공원이라 이름붙인 것 같다. 패방을 지나면 계단과 오솔길을 통해 국민당길이 이어진다. 내려가면서 보는 경치는 올라올 때 보는 경치와는 사뭇 다르다. 웅혼하다기보다 아늑하고 포근하다. 길에서 나는 똥덩어리를 밀고 가는 쇠똥구리도 보고, 한여름의 햇살을 즐기는 도마뱀도 만난다. 쇠똥구리는 느릿느릿 먹이를 굴리고, 도마뱀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무이산 골짜기 마을 무이동천

무이동천 진원화
 무이동천 진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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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2/3쯤 내려오자 구곡계를 내려가는 뗏목이 보인다. 내려오는 중간 중간에 대나무 군락이 있다. 중국 사람들도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육림(育林)과 양죽(養竹)을 강조하는 표지판을 세웠다. 육림은 나무를 가꾸는 것이고, 양죽은 대나무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골짜기의 좁은 공간을 이용해 차나무를 심었다. 무이산 암차가 유명하다 보니 산자락에 공간만 있으면 차나무를 심은 것이다.

길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 무이동천(武夷洞天)이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무이동천은 무이산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으로, 경치가 좋은 곳에 동천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인다. 그리고 이곳을 승진원화지동(昇眞元化之洞)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중심 되는 단어가 진원화다. 진원화는 도교의 이상향을 말한다. 그러므로 승진원화지동은 이상향으로 올라가는 동네 또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는 광서(光緖) 신묘년 2월에 썼으니 1891년 작품이다.

선장암 (일명 쇄포암)
 선장암 (일명 쇄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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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길을 다 내려오면 비교적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동쪽으로는 직립한 암봉들이 우뚝하고 서쪽으로는 구곡계가 흘러내려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 비교적 평평하고 넓은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천유봉을 오르거나 내려오는 사람들이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산을 오르지 않는 사람들은 아예 이곳에서 자리를 깔고 놀기도 한다.

그 암봉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선장암(仙掌岩)이다. 선장은 천자(天子)의 몸 뒤를 가로막아 주는 부채를 말한다. 좌우로 폭이 넓고 상하로 높이 역시 대단한 이 암벽은 위에서 아래로 수십 개의 줄이 처져 있다. 그런데 이 줄이 마치 부챗살처럼 보여 선장암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은병봉
 은병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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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구곡계 양쪽으로는 무수히 많은 암봉들이 직립해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정확한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보통 1곡에 다섯 개 정도의 봉우리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그 중 이곳 6곡 주변에는 향성암(响聲岩), 오암(梧岩), 쇄포암(曬布岩), 천유봉, 은병봉(隱屛峰)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향성암은 소리가 울리는 바위라는 뜻이다. 오암은 오동나무 바위다. 쇄포암은 베를 말리는 바위다. 실제로 바위 모습이 베를 말리기 위해 펼쳐놓은 것 같다. 앞에서 말한 선장암이 바로 쇄포암이다. 어떤 사람은 그 바위를 부채살처럼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베바위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천유봉은 우리가 올라갔다 내려온 그 봉우리다. 은병봉은 숨어있는 병풍바위라는 뜻이다. 접순봉의 서쪽에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은병봉이라 부른다. 이 다섯 개의 바위 중 오암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벽립만인이 무슨 뜻일까?

벽립만인 각자
 벽립만인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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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암 또는 쇄포암에는 벽립만인(壁立萬仞)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암벽의 높이가 만 길이나 된다는 뜻이다. 선장암은 다른 암벽과 달리 직립해 있어서 더 높아 보인다. 또 6곡에서 바라볼 때 그 앞을 가리는 것이 없어 정말 길고 높게 솟아 있다. 그러나 만 길은 무슨 만길, 실제 높이는 120m다.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이 사용된 표현이다. 6곡과 맞닿은 선장암 바닥의 해발 고도는 289m이고, 최고봉의 높이는 409m이다. 그리고 이 글씨는 만력(萬曆) 을유(乙酉: 1585)년 여름에 진성(陳省)이 썼다.

벽립만인의 왼쪽으로는 세 개의 작은 글씨가 보인다. 앙지미고(仰之彌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견석면(見石面)이다. 이들은 각각 유불선 사상에서 나온 문구다. 앙지미고는 '우러러 보니 정말 높다'는 뜻으로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앙지미고라는 글씨는 산동성 태산(泰山)에서도 볼 수 있다. 나무아미타불은 불교의 대표적인 염불로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가고자 하는 염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선장암의 글자들
 선장암의 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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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석면은 선가적이고 도교적인 생각에서 나온 문장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이 석벽을 바라보니 도가의 진면목을 알 수 있구나(巨大無比的壁 知道家的眞目了)' 하는 문장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은 도교에서 시작, 유교를 발전시켰고, 나중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그렇지만 이들 종교가 서로 갈등하지 않고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말고도 무이산 곳곳에서 우리는 선범혼합과 유불선의 혼합을 느낄 수 있다. 

강택민이 쓴 시 '무이산에서 느낀 감회'

세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무이산 표지석
 세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무이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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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구곡계를 따라 나 있는 길로 걸어간다. 사람들의 표정이 다양하다. 나오다 보니 어느새 5곡 다리를 지난다. 점심 때가 가까워선지 주파이가 지나가지 않는다. 다시 전동차를 타고 무이산 풍경구의 남쪽 입구로 나온다. 그곳에는 '세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무이산'이라는 강택민(江澤民 : 1926-)의 휘호가 있다. 2008년 5월 1일 이곳을 방문해 쓴 것이다. 그리고 그 뒷면에 무이산을 보고 느낀 감회를 적은 오언율시가 적혀 있다.

구곡은 선경으로 흘러들고                         九曲落瑤池
천유봉은 무이산에 이름났네.                     天游著武夷
달빛은 선녀를 비추고                               流光凝玉女
푸른 하늘에는 노래와 시 물들었네.             翠色染笙詩
가득한 안개, 구름을 만들어내고                 萬嵐雲追動
무리 지은 배가 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네.      群舟風逐移
멀리서 부르는 어부의 노래 소리 들으며       漁歌廳唱遠
늦은 저녁 자리에 앉아 산수를 즐기네.         坐愛晩山枝

강택민의 시 '무이감회'
 강택민의 시 '무이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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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통해 강택민의 시적 경지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어렵지 않은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풍류와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택민은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을 수용해 공산주의 시장경제 정책을 펴,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어 나간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또한 외교적인 면에서도 미국, 유럽 등 서방국가와 교류와 협력을 강화했다.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에 이르는 90년대에 대미 유화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1992년 8월 그는 한중수교를 통해 대한반도 정책에 큰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강택민이 정권의 실세로 부상한 것은 1989년 6월이다. 천안문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조자양의 후임으로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 해 11월 그는 등소평으로부터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물려받으며 당과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3월 국가주석직을 맡아 이후 10년간 당정군을 총괄하는 최고 실권자로 군림했다.

그는 시진핑 시대가 개막된 현재까지도 정치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처럼 운치 있는 시를 짓다니 감탄할 일이다. 정치에서는 칼도 필요하지만, 이처럼 붓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태그:#무이산 , #천유봉 풍경구, #제일산, #무이동천, #벽립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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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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