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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화담 서경덕 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답니다.

"너는 왜 울고 있느냐?"
"네.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지난 20년 동안 장님으로 살아왔습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와서 길을 걷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천지 만물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기뻐서 집에 돌아가려고 하니까, 골목길은 여기저기 많기도 하고, 대문도 모두 같아보여서 제가 살던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집으로 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더듬거려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는 거지요.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보이지 않던 천지 만물의 형상과 빛깔이 눈앞에 나타나자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뒤죽박죽이 되어 헛된 생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고 자기 발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각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정상인'일까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 표지. 이 책의 저자는 시각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손으로 보는 풍요로운 문화를 만났다.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 표지. 이 책의 저자는 시각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손으로 보는 풍요로운 문화를 만났다.
ⓒ BF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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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암 박지원이 친구인 창애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정민 선생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라는 책에 소개돼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인용한 이유는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교훈을 전하기 위해서일 텐데 일본인 시각장애인 히로세 코지로의 책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를 읽고난 뒤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일화를 바라보게 됐다.

위 이야기는 20년 동안 시각을 사용하지 못하고, 다른 감각으로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시각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그동안 다뤄왔던 풍부한 감각들을 일시에 잃어버린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풍부한 감각들은 바로 시각을 닫아버릴 때 회복될 수 있다.

곧 시각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정상인이고, 시각을 사용하지 못하면 장애인이라는 고정된 생각을 뒤집는다. 정상인이 시각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감각이 되레 약화될 수 있고, 장애인은 시각을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다른 감각을 발달시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감을 얼마나,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차별은 '시각'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을 내세울 때 생겨나는 것이다.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는 매우 유쾌한 책이다. 시각장애인이 쓴 글이긴 하지만 어떤 그늘도 찾아볼 수 없다. 비장하지도 않고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외치지도 않는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장애인이 겪는 고통이나 노력이 아니라, 무모한 도전과 희망이 넘치는 재미난 삶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시각장애인? '만지는 일반인'!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안 좋았지만 일반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열세 살에 실명해 중학교는 맹학교에 들어갔다. 졸업하고 교토 대학에 진학해 일본사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서른세 살에 일본 국립 민족학박물관에 취직해 근무하던 중, '만지는 문자, 만지는 세계' 기획전을 추진해 일반인이게도 촉각이 주는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했다.

저자는 정상인을 '보는 일반인'이라고 하고, 시각장애인을 '만지는 일반인'이라고 명명했다. 이 새로운 개념은 정상인과 장애인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한다. 물론 이 또한 강요하거나 감정에 호소하기보다, '만지는 문화'를 폭넓게 보여주며 그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은 시각을 사용할 수 없는 약자가 아니라, 되레 시각을 사용하지 않아서 만지는 문화를 풍부하게 맛보고, 오감의 가능성을 개척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제공한다. 또한 시각장애인이 눈이 보이지 않아서 만지는 게 아니라, 만지는 행위를 통해 세계관과 인생관이 더욱 풍부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를 삶의 태도로까지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문화를 제안한다.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특별하고도 즐거운 촉 생활'이라는 문구는 얼마나 긍정적이고 밝은가. 백문이불여일촉(百聞而不如一觸),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만지는 것보다 못하다는 조어는 우리가 시각 우선의 견(見) 문화에 젖어 그동안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촉(觸) 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촉각은 시각에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저자는 "만지는 문화는 창조력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주장한다(이미지는 책 속에 삽입된 것임을 밝힙니다).
 저자는 "만지는 문화는 창조력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주장한다(이미지는 책 속에 삽입된 것임을 밝힙니다).
ⓒ BF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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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서 얻는 풍요롭고 심오한 세계'야말로 저자가 '만지는 박물관' 기획전을 열어 일반인에게도 문화재를 만질 수 있게 한 이유며 대학이나 미국 등 외국에서 '손 학문 워크숍'을 개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시각장애인만 특별 취급을 받기 때문에 만지는 게 아니라 박물관을 찾는 모든 사람이 손으로 작품을 느끼면서 만나는 세계를 제시한다.

"양적인 면에서 촉각으로 얻는 정보는 시각에 뒤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만져서 아는 세계의 심오함과 만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물의 온도나 재질과 같은 촉 문화는 창조력과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절대 시각에 뒤처지지 않는다."(본문 104쪽)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시각장애인은 보이지 않으므로 어둠 속에 있는 줄 알지만, 그래서 부정적이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어둠에 휩싸여 있는 줄 알지만, 시각장애인이 사는 세계는 어둠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저자의 경우에는 모든 색이 옅은 보라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낮이나 밤이나 똑같은 색이다. 불이 꺼지면 일반인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게 되지만 시각장애인인 저자는 그때도 오히려 옅은 보라색과 함께 한단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도전 정신은 활달하다. 야구를 즐기며 합기도도 한다. 프랑스·한국·미국 등을 다니며 국제 교류도 한다. 혼자 여행도 하고, 벚꽃이 피면 꽃구경도 즐긴다. 저자는 강연도 많이 다니는데,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공원에서 놀 듯 즐기는 강연을 한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각종 기획전과 워크숍을 열고, 책을 쓰는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곧 저자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지 않기에 드러나는 에너지가 아닐까.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의 역설

나는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를 읽고 때때로 눈을 감고 주변 사물을 더듬거리며 만지곤 한다. 눈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편리함과 빠른 포착 너머에서 퇴화되는 나머지 감각들을 되살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오감 회복이라는 차원을 넘어, 보는 문화·시각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속담까지 통쾌하게 뒤집는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말은 촉각의 특징을 잘 드러낸 말이다. 시각과 청각은 한순간에 공간의 정보를 파악하는데, 이와 달리 촉각은 손이 닿은 부분을 통해 얻는 단편적인 정보로 전체를 상상해야 한다.

손을 능동적으로 움직여 점에서 면, 면에서 입체로 퍼즐처럼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뒷면, 무게 질감 등을 만져서 느껴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심오한 세계가 열린다. 한 점을 느긋하고 찬찬히 만지는 것에서 자기 나름대로 형상을 만들어가는 상상력, 창조력이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의 역설적인 의미이다."(본문 177~178쪽)

덧붙이는 글 |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히로세 코지로 씀 | 정숙경 옮김 | BF북스 | 2013.06.10. | 9500원)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

히로세 코지로 지음, 정숙경 옮김, BF북스(2013)


태그:#시각장애인, #만지는 일반인, #촉문화, #손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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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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