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9년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릉의 보존이 완벽하고 제례가 계속 되고 있는 등의 이유로 선정되었다.
 2009년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릉의 보존이 완벽하고 제례가 계속 되고 있는 등의 이유로 선정되었다.
ⓒ 정태승

관련사진보기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이 주소지가 현재 우리나라 마지막 임금이면서 대한제국의 첫 황제이기도 한 고종황제와 그의 아내이자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공사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가 모셔진 곳이다.

서울에서 출발하게 되면 강북강변이나 올림픽 대로를 타고 가다가 외곽순환도로에서 남양주IC로 빠져나가게 되면 바로 찾을 수 있다. 광복절 오전에 찾은 홍유릉은 고요했다. 오전 9시 개장과 동시에 입장한 그곳에는 표를 받는 어르신과 청소를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만이 기자를 반겼다.

홍릉과 유릉이 모셔진 곳이라 해서 홍유릉으로 불리는 이곳은 입장해서 좌측으로 돌면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을, 우측으로 돌면 27대 순종과 원후 순명황후, 계후 순정황후의 유릉을 참배할 수 있다. 마침 유릉은 공사 중인 관계로 애초의 의도대로 홍릉만 관람하기로 했다.

고종의 재위기간이 몇 년 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려 44년. 1852년생인 고종은 일왕 메이지(明治)와 동갑내기이기도 하다는 사실 또한 아는 분들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왕은 비슷한 시기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운명을 갖게 된다. 채 오십 년도 지나지 않은 1910년 그 둘에게 그들이 통치하는 두 나라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 졌는가. 고종의 능 앞에서 묻고 싶었다. 도대체 44년 동안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황제가 유약하다는 사람들은 틀렸다."

고종의 밀사이자 대한제국의 국권을 위해 노력한 역사학자 호머 헐버트의 말이다.

자주색 홍살문 뒤로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상이 보이고 뒤로 보이는 집이 제례를 지내는 침전이다.
 자주색 홍살문 뒤로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상이 보이고 뒤로 보이는 집이 제례를 지내는 침전이다.
ⓒ 정태승

관련사진보기


이 말은 능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관람정보 팸플릿에 소개된 글이다. 앞 뒤 설명 없이 소개 된 이 글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선교사이자 언론인이었으며 한국에 20여년을 머물며 교육과 언론 관련 사업을 하던 인물이었다. 1905년 고종의 밀사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미국에 파견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07년 일본에 의해 추방되기도 한다. 일본에 저항하는 고종이 헐버트에게는 적어도 유약하게 보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미국의 외교관이며 1900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의 고문으로 활약했던 윌리엄샌즈(1874~1946)의 표현을 빌면 '그 불쌍한 황제는 내가 수립한 그 계획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첫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되어 있다. 심각한 부분이 더 있다.

'그(고종)의 철학의 골자는 자신이 백성의 주인이고 모든 것이 그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의회를 소집하여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개항 후 서양 의회의 외양적 틀을 수용해 1890년 11월, 처음으로 의회를 소집했다'는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의 저자 이숲의 설명이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왕실과 정부의 기능조차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중략… 아직 한국은 '입헌군주제'를 논하기에도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일왕 메이지는 근대화를 적극 수용해 왕실과 정부의 기능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때 우리의 고종은 '자신이 백성의 주인이고 모든 것이 그의 소유라는 철학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침전 뒤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되어 있는 능의 봉분이 멀리 보인다. 바로 앞에 보이는 울타리부터 출입제한구역이다.
 침전 뒤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되어 있는 능의 봉분이 멀리 보인다. 바로 앞에 보이는 울타리부터 출입제한구역이다.
ⓒ 정태승

관련사진보기


스코틀랜드계 영국인 신문기자였던 프레드릭 매켄지(1869~1931)는 고종을 유약하고 반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다.

'왕은 자신의 대권 하나 이외에는 어느 곳에도 마음을 의지할 수 가 없었다…. 중략 … 그의 충신들과 외교고문들이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고 노력한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그는 끝내 반진보적인 집단에다 자신의 운명을 내던지고 말았다'고 말이다. 반진보적인 집단은 을사오적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을 일컫는 것이다.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조약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12월 13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을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처단 요구가 드높은 외부대신을 되레 승진시키고 이완용에게 외교권을 준,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이덕일의 역사평설 <근대를 말하다>에 소개되어 있는 글이다. 고종은 이렇게 해놓고 뒤로는 미국으로는 허버트를 밀사로 파견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을사늑약의 무효를 천명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이미 외교에도 한 수 앞서 있었던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후 가쓰라. 테프트조약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국에 대한 통치권을 갖기로 합의한 상태였으니 고종의 정보력 또한 외교력과 마찬가지로 빵점이었다.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덕일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1896년 2월 11일 전격적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고종은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을 역적으로 규정해 경무청 문 앞에서 군중들에게 참살 당하게 했다.' 고종의 이중적인 정치 행보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일본을 역할모델로 삼아 부국강병을 도모하려 했던 애국적 친일파인 급진개화파의 김옥균과 온건개화파의 김홍집 등을 모두 죽여버림으로써 고종에게 남은 것은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매국적 친일파뿐이었던 것이다.

고종의 을사늑약 이후의 행보를 보자면 '체결 주범을 승진시키고 외교권을 주는 등 정권을 넘겨주는 한편 고종은 의병에게는 밀지를 내려 일본군에 대항하여 거병하게 했다. 그런데 각 지방의 진위대는 고종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진압했다'고 전한다. 아무렇게나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자는 식이다. 이는 팩트에 근거한 이덕일의 설명이다. '고종치세의 가장 큰 문제는 명확한 노선이 없었던 점과 개화파와 농민세력을 모두 제거했다는 점이었다'는 설명을 대하게 되면서 가슴이 미어진다.

지도자의 이중적 정치행보, 국제정세 파악 능력 부족, 전무한 신뢰프로세스, 대다수 백성들에 대한 애민철학 부재 등 고종의 치세기간 내내 이루어진 여러 행위에 대한 촌평이다. 이는 지도자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대하는 철학이 최소한의 도덕성, 정통성, 합리성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도자를 따르는 대부분의 민초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준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종이 아닐까 하는 해서는 안될 생각을 하게 된다.

1793년 "국민이여, 나는 죄 없이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단두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16세가 재위 19년 만에 그리 될 줄 누가 알았을 것인가. 시대를 잘 못 산 루이16세는 자기 자신이 뭘 잘 못했는지도 모른 채 죽었던 것이다. 선대의 왕들에 비해 사치와 향락도 덜 했으니 말이다. 시대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군주는 민초들에게 그렇게 대가를 물어야 했다.

물론 1910년 경술국치의 모든 책임이 지도자, 고종 한 사람에게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헐버트의 말대로 우리의 고종은 '유약한 인물'만은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는 국민과 나라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했고, 외부적으로는 청나라에, 일본에, 다시 러시아에, 또 미국에 기대어 외부의 힘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하려 했던 '의존적이고 자주적이지 못한' 군주였다. 광복절에 이 혹평 이 너무 잔인한가. 조선 개창부터 치면 518년 만에 멸망한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에게 할 말은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태그:#광복절, #고종, #이완용, #친일파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