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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한형석 선생의 유족이 살고있는 부산 서구 부민동 집. 집 현관에는 이 집이 독립유공자의 집임을 알리는 오래된 명패가 붙어있다.
 애국지사 한형석 선생의 유족이 살고있는 부산 서구 부민동 집. 집 현관에는 이 집이 독립유공자의 집임을 알리는 오래된 명패가 붙어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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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의 집"

바람과 빛에 깎여 흐릿해진 태극기 아래로 내려쓰인 검은 글자가 이 집의 주인을 말해주고 있었다. 몇 번의 못질을 해서 박아 놓은 쇠못의 녹물이 명판 위로 눈물자국마냥 짙게 배였다.

고만고만한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부산 서구 산복도로의 산비탈에 자리잡은 집에는 애국지사 고 한형석 선생의 유족이 살고 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신발 몇 짝을 벗어두기도 애매한 현관이 나왔다. 주방도 되고 거실도 되는 작은 방과 닿은 안방에서 고 한 선생의 부인인 강호전(92) 할머니가 힘든 몸을 일으켰다.

최근에도 혈관이 막혀 수술을 받았다는 강 할머니께 몇 번을 누워계시라 말씀을 드려도 그는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로 거절을 대신했다. 애국지사 한형석 선생은 29년간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일제강점기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을 지냈다. 당시 독립군들이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수없이 불렀던 <압록강 행진곡>을 비롯한 대다수의 독립군가가 그의 작품이다.

한형석의 아버지인 고 한흥교 선생 역시 독립운동가다. 이렇게 집안의 남자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 땅을 떠도는 동안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삶은 어려웠다. 장남 한종수(54)씨는 "독립운동을 했던 당사자 분들이 가족을 돌볼 형편이 안됐다"며 "아버지는 독립 후에도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최초의 아동극장을 만들어 전쟁 고아들을 교육시켰다"고 말했다. 한씨의 발걸음이 집 뒤편의 공터로 향했다.

아버지가 사재를 쏟아 부어 꾸려나갔던 아동극장은 허전한 터로 남았다. 창고로 쓰이는 조그만 방의 자물쇠를 따자 한 선생이 남기고 간 유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제습제 몇 개로 여름을 나고 있는 오랜된 문서들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한씨가 아쉬움을 말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지원이 손자까지로 끝납니다. 3대로 가면 지원을 끊는 거죠. 독립운동 관련법이 한시적이라서 그러는 건데 결국 3대가 되면 모든 게 끝나니깐 독립운동에 대한 것이 소외되고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광복절이 슬픈 독립유공자와 유가족들

지난 2012년 8월 29일 오후 박유철 회장을 비롯한 광복회원들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광복회관에서 열린 경술국치 상기행사에서 검정 넥타이를 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지난 2012년 8월 29일 오후 박유철 회장을 비롯한 광복회원들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광복회관에서 열린 경술국치 상기행사에서 검정 넥타이를 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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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비단 한형석 선생 유족의 이야기는 아니다. 부산지방보훈청의 관내 독립유공자·유족 생활등급별 현황을 살펴보면 올 7월을 기준으로 절반 가량의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훈처가 도시근로자 가계비 추계자료에 근거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생계유지층은 47.2%, 생계곤란층은 2.1%로 나타났다. 반면 생활수준이 여유가 있는 상층은 9.4%에 불과했다. 심지어 50만 원이 되지 않는 대통령표창 유족 보훈급여를 수령할 경우 기초수급대상자에 선정되지 못해 보훈급여 수령을 망설이는 경우까지 생긴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부산 지역 독립유공자 자손들은 한결같이 아쉬움을 나타냈다. 광복절을 앞둔 14일 만난 유족들은 광복절이 그렇게 기쁘지 않다는 말로 섭섭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손자인 안경하(74) 광복회 부산지부장의 말이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는데, 독립군 토벌대가 국군의 창설 멤버가 되는 게 우리나라입니다. 역사관이 없는거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국가를 건국했다며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까지 합니다. 그걸 보면 독립유공자 유가족들은 울분을 참지 못합니다. 어떻게 역사가 이렇게 됩니까?"

안 지부장은 이제 자신들까지 사라지면 광복회의 존속을 걱정해야 될 입장이라고 했다. 독립유공자의 손자까지 지원하는 보훈급여금이 끊기면 그 이후부터는 광복회를 지탱해줄 유족들이 없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70대인 안 지부장뿐 아니라 대부분의 독립유공자 유족이 고령에 접어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유족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듯했다.

"독립유공자 대우하자며 관련법 만든다더니..." 유족들 한숨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 보훈급여금의 수혜 범위를 늘리는 일이다. 국회에서도 이런 움직임에 공감하는 의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올 초 홍영표 의원 등 82명의 국회의원이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독립유공자 유족의 범위를 현행 손자녀에서 증손자녀로 확대하고, 만약 증손자녀까지 사망했을 경우 그 직계비속에게라도 응분의 보상과 예우를 해주자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이 법은 관계부처가 다른 유공자들과의 형평성 등을 지적하며 난색을 표시해 사실상 위원회 심사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폐기됐다.

이에 대한 수정안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 김을동 의원 등 16명이 14일 낸 개정법률안이다. 이 개정안은 최초로 유족으로 등록한 자가 손자녀일 경우 증손자녀나 가장 가까운 직계비속 1명까지 유족으로 인정해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자는 안이다. 일단 국회 내부에서는 수정안인 만큼 통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하지만 독립유공자 단체는 법률 개정에 기대와 아쉬움을 함께 나타냈다. 조양제(63) 광복회 부산지부 사무국장은 유족의 범위를 일부 확대하는 데는 환영의 입장을 전하면서도 "정부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해 예산 문제를 탓하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유공자와 유족을 볼 때는 예산 문제 보다는 현실감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를 하기 위해 기존 국가유공자 관련 법률에서 독립유공자 법률을 따로 제정해 운영해 오고 있지만 사실상 국회와 관계 부처의 의지 부족으로 존경과 예우를 갖자는 취지에 맞지 않게 되고 있다"고 전했다.

때문에 고령인 독립유공자들과 유족들이 사라지기 전에 정부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생계가 곤란한 독립유공자 유족들과의 결연을 추진하고 있는 민주당 부산시당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 당국은 국가유공자 예우에 대한 법류에 의해서만 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면서 "독립유공자 전담기구를 신설하고 예우 중심의 정책을 펴야 하며 독립유공자들의 업적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태그:#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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