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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베트남의 세계유산을 찾아가는 여행을 했다. 베트남 중부에 있는 후에, 호이안, 미선유적을 보았다. 이들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려고 한다. - 기자 말.

다낭 국제공항
 다낭 국제공항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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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30분에 다낭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일사천리로 출국장을 향한다. 입국신고서도 없고, 짐 검색도 없다. 출입도장만 하나 찍으니 바로 공항 밖으로 나온다. 지금까지 외국을 다니면서 이렇게 빨리 나온 경우가 없다. 베트남에서 한국 국민은 일등민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미국 여권이 모든 나라에서 무사통과였는데, 이제는 무게 중심이 동아시아로 넘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 이집트, 시리아, 이란 등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한국 국민이 대우를 받는 데는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힘이 크다. 세계경영을 추구했던 김 회장은 베트남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고, 베트남 경제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후 한국의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그 규모도 확대되었다. 둘째는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 대중문화의 수용이다. 베트남 TV채널 서너 군데서 한국 드라마가 방송된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는 한국문화를 이해하고 선망하게 되었다. 셋째로 최근 늘어나는 관광객도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용교(드래곤 브리지)
 용교(드래곤 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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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국제공항은 다낭의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시내까지 거리가 3㎞ 밖에 되질 않는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한강(汗江: Song Han) 건너 해안 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한강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며 보니 조명이 특이하다. 다리 전체를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다. 우리가 지나간 다리가 바로 용교다. 2013년 3월에 개통되었으니 4개월 밖에 안 된 신생 다리다. 길이 666m, 폭 37.5m의 왕복 6차선 다리다.

이 다리를 지난 버스는 북쪽 강변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린다. 그리고 한강교로 이어지는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 길이 바로 팜반동(Pham Van Dong) 거리다. 왜냐하면 길이 팜반동 해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버스는 한강과 팜반동 해변 중간쯤에 있는 호텔에 멈춘다. 호텔에 도착해 보니 오후 10시가 조금 넘었다. 비교적 빠른 시간에 도착했다. 나는 내일 여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다낭을 지나는 한강은 어떤 모습일까?

한강교
 한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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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나는 한강을 산책한다. 오전 11시에 미선유적지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팜반동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간다. 햇살이 눈부시고 뜨겁다. 양산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길 가운데 화단을 잘 가꾸어 놓았다. 부겐빌리아 꽃이 한창이다. 한 10분쯤 걸으니 한강교가 나온다. 이 한강다리는 다낭의 중심부에 놓인 가장 오래된 다리다. 2004년 8월에 개통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승용차와 소형차만 지나다닐 수 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시내 중심가로 들어간다. 다리 중간에서 남쪽과 북쪽을 살펴보니 두 개의 다리가 보인다. 남쪽으로 어제 밤 지나온 용교가 보이고, 북쪽으로 투안푸옥 다리가 보인다. 투안푸옥교는 중국의 기술진에 의해 2009년 7월 완공되었는데, 엔지니어링 기술의 부족으로 통행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길이가 1850m나 되는 대형다리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이 다리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강 하구에 있어 다낭 구시가와 송트라(Son Tra) 반도를 연결해준다.

투안푸옥 다리
 투안푸옥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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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넌 우리는 더위를 피해 '메모리'라는 이름의 강변 카페로 들어간다. 뮤지컬 <캣츠>의 대표곡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니 천국이 따로 없다. 시원할 뿐더러 한강 조망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강의 동쪽 다낭 신시가지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우리가 건너온 한강교의 모습도 아주 가까이 보인다. 이곳에서 우리는 커피와 망고 주스를 한 잔씩 마신다. 가격은 비교적 비싼 편이다.

날씨가 덥기는 하지만 우리는 잠시 카페테라스로 나와 한강을 살펴본다. 상류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흙탕물이다. 한강은 쾅남(Quang Nam) 지역을 흐른 다음 다낭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낭만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어 항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동안 미군의 해군기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베트남 중부로 들어오는 모든 인원과 물자는 모두 이곳 다낭 항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우리 청룡부대도 역시 다낭 항으로 들어왔다.

다낭의 과거와 현재

다낭항
 다낭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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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항은 현재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다. 남쪽의 호치민 시티에 있는 사이공 항이 가장 크고, 북쪽 하노이의 외항 역할을 하는 하이퐁 항이 두 번째로 크다. 다낭 항은 연간 300만t의 물동량을 처리하고 있다. 그 중 절반이 수출이며, 나머지 절반이 수입과 국내 운송이다. 최근에는 크루즈선도 들어오고 있다. 다낭 항은 18세기까지는 시골의 조그만 항구에 불과했다. 그때까지 베트남 중부 물류의 중심지는 다낭 남쪽에 있는 호이안 항이었다. 호이안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선박들이 드나들었고, 중국과 일본 상인들의 거주 지역까지 있었다.

다낭이 세계적인 항구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1787년 지아롱(Gia Long) 황제가 프랑스 루이 16세와 조약을 맺으면서 다낭 항을 프랑스에 할양한 때부터다. 그리고 1835년 민망(Minh Mang) 황제가 다낭을 제외한 모든 항구에 유럽 선박이 정박할 수 없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1847년과 1858년에는 베트남의 기독교도가 박해를 받는다는 이유로 다낭 항을 폭격하고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후 1954년까지 다낭과 항구는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름도 투랑(Tourane)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낭 비치
 다낭 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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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다낭은 하노이, 사이공, 하이퐁, 후에에 이어 다섯 번째 도시가 되었다. 1954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가 끝나면서 베트남 중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로 발돋움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을 통해 그 중요성이 훨씬 더 커졌다. 왜냐하면 미군의 공군과 해군기지가 이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다낭은 남북 베트남의 경계인 북위 17도선 아래인 16도선에 위치하고 있고, 대형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넓은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1972년 8월 베트남 전쟁의 지상전투가 끝나면서 다낭은 군사항에서 다시 무역항으로 그 역할을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 다낭은 베트남 중부의 경제와 물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현재 다낭에는 기계, 전기, 화학, 조선, 직물 등 제조업도 발전하고 있다.

안타까운 다푸옥 프로젝트

다낭의 현재
 다낭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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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은 현재 베트남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그것은 후에를 제쳤기 때문이다. 현재 다낭에는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가 속속 실행되고 있다. 해변 쪽으로는 리조트가 들어서고 도심에는 호텔과 오피스 빌딩이 들어서고 있다. 다낭 북쪽 해변으로 바다를 매립해 뉴타운을 조성하려는 다푸옥(Da Phuoc) 프로젝트가 한국 기업인 대원 칸타빌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현재 중단된 상태다.

다푸옥 프로젝트는 210ha 해안 매립지에 2억5000만$의 자본을 투자, 호텔과 리조트, 아파트, 오피스, 마리나, 골프장, 빌라, 학교 등을 짓는 대형 사업이었다. 33층짜리 아파트, 60층짜리 오피스 빌딩, 18홀 짜리 골프장, 요트를 즐길 수 있는 마리나, 컨벤션 센터, 국제학교 등을 지어 종합 뉴타운을 조성하려고 했다. 2011년까지 상주인구 4만 명, 유동 인구 3만 명의 신도시를 건설한다고 했으나 2012년에야 부지조성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바로 주택공사에 들어가야 하나 자금이 없어 사업이 답보상태에 있다.

다푸옥 프로젝트 조감도
 다푸옥 프로젝트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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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은 호치민시 홍카우와 안푸 칸타빌 사업이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어 좀 더 큰 다낭 다푸옥 사업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대원의 자금 사정이 좋아지거나 베트남의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야 사업이 다시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다낭 현지가이드인 강태욱 과장은 전한다.

베트남과 한국을 연결하는 800년의 인연

그리고 이곳 다낭에서 또 하나의 한국 사람이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화산이씨 이창근씨다. 화산이씨는 1009년부터 1225년까지 베트남을 통치했던 이왕조(Ly Dynasty)의 후손이 고려에 정착해서 생겨난 성씨다. 6대 왕인 영종 이천조(李天祚: Ly Thien To)의 일곱 번째 아들 이용상(李龍祥)이 1226년 측근을 데리고 베트남을 떠나 고려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花山)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 고종은 그를 화산군에 봉하고 그 지역에 살도록 했다.

그 후 화산이씨는 원나라 침입 때 공을 세웠으며, 이용상의 아들 이간(李幹)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말 이맹예(李孟藝)는 호조전서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이봉수(李鳳壽), 이장발(李長發) 같은 사람이 문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화산이씨는 그 후 황해도 신천군과 벽성군,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것 같다. 현재 화산이씨는 인천, 서울, 경기 지역에 많이 살고 있으며, 230가구에 1775명(2000년)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산이씨 종친회는 800년 전 인연을 바탕으로 베트남과 교류하고 있다. 1995년 이들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공산당 서기장인 도우모이 등이 이들을 환대했다. 베트남에서는 화산이씨를 베트남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며, 왕손으로 인정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베트남 인사가 한국을 방문할 경우, 화산이씨를 방문하는 것도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현재 화산이씨는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결과 화산이씨 이창근씨가 2009년 11월 베트남으로 귀화하는 일이 일어났다.

다푸옥 프로젝트 현장에 펜스가 처져 있고, 그 위로 대원 칸타빌 광고판이 보인다.
 다푸옥 프로젝트 현장에 펜스가 처져 있고, 그 위로 대원 칸타빌 광고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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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근씨는 현재 다낭에서 환경사업을 하고 있다. 폐비닐을 수거해 생활용품으로 재생하는 공장을 운영한다. 수거된 폐비닐을 하루 3t 가량 재생 가공해 30여 종의 생활용품과 농업용품을 생산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업에 문제가 생겨 현재 사업을 중단한 상태다. 이곳 다낭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한국기업과 한국 출신 베트남인의 어두운 이야기다.


태그:#다낭, #한강, #용교와 한강교, #다푸옥 프로젝트, #화산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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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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