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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8일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 원본.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8일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 원본.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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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에서 카운터로 일한 조선인의 일기가 전면 공개됐다. 최근 일본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을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 '고노 담화'를 부인하는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이를 정면 반박하는 사료가 공개된 것.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소장 정태헌)가 8일 고려대 문과대 B110호에서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는 1942년 여름부터 1944년 말까지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위안소의 '쵸우바'(카운터)로 일한 '조선인'의 일기장이다.

한국사연구소에 따르면 이 일기를 쓴 사람은 1905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대서업 등을 하다가 빚을 많이 지게 돼 1942년 처남과 함께 조선을 떠나 1944년 말까지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위안소 종업원 등으로 일했다. 일기의 주인공은 1979년 사망했지만, 연구소는 개인 신상을 밝히진 않았다.

병참 명령, 폐업 위안부도 위안소 복귀시켜

한글과 한자, 일본글을 섞어 쓴 일기에선 일본군이 위안부에 대해 직접 명령하고 통제한 상황이 드러난다.

1943년 7월 29일자 일기
"아라이씨와 병참에 가서 사쿠(콘돔)의 배급을 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번외(番外) 2, 3인 위안부 진찰을 시켰다. 이전에 무라야마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생활 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킨센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이 일기에는 후방지역인 싱가포르에선 한 위안소의 위안부들이 절반 가까이가 계약기간이 만료돼 각 출신국으로 귀환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전방지역인 미얀마에서 작성된 1943년 7월 29일자 일기에는 결혼을 해서 위안소를 떠난 위안부 출신 여성들에게 일본군이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 생활을 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박한용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이 대목은 위안소에 대해 일본군이 절대적인 명령권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또한 위안소에서 쓰이는 콘돔을 정기적으로 배급하는 곳도 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7월 26일자 일기에 위안부 신체검사도 군의관이 맡게 됐다는 내용을 고려하면 전방지역 위안소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관리 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안소가 매일 군에 영업내용을 보고한 정황도 나타나 있다. 이 일기 1943년 1월 12일자에는 항공대 소속 위안소의 수입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제출했고, 같은 해 8월 12일자에는 병참사령부에 영업일보를 제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위안소가 사실상 군의 관리 하에 있었고 민간인들은 단지 운영만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8일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의 박한용 연구교수가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 원본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8일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의 박한용 연구교수가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 원본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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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위안단' 동원 입증... "피해자 증언에 힘 실어"

1944년 4월 6일자 일기에는 "재작년(1942년) 위안대가 부산에서 출발할 때 제 4차 위안단의 단장으로 온 츠무라"라는 대목이 있다. 이전에도 1·2·3차의 위안부 동원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며, 조직적이고 대규모 동원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내용은 1945년 11월 미군이 미얀마에서 일본인 위안소 경영자를 붙잡아 심문한 내용을 담은 조사보고서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 보고서엔 '1942년 7월 10일 위안부 703명과 업자 약 90명이 부산항을 출발했다'는 내용이 있다.

박 교수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쪽에서는 살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 '믿을 수 없는 내용'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러나 이번 일기 내용이 문옥주 할머니와 같이 실제 버마(미얀마)에 끌려간 분들이 증언한 내용과도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어, 피해 당사자들이 얘기하는 진실에 대한 방증으로 힘을 싣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이 일기 중에선 1942년 분이 빠져 있어 위안부 동원과정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아쉬움도 있다. 10여 년 전 지방의 한 고서점에서 이 일기를 발굴한 오채현 타임캡슐박물관장은 연구를 위해 낙성대경제연구소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에 이 일기를 빌려줬다. 오 관장은 "위안부의 실체를 제대로 밝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무 조건 없이 원본을 제공하게 됐다"고 밝혔다.


태그:#위안소, #일기,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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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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