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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들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앞에서 '제헌절에 헌법정신 위배한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717 청소년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과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중고생 시국선언 "배운 것과 다른 현실에 분노한다" 중·고등학생들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앞에서 '제헌절에 헌법정신 위배한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717 청소년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과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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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미, 애비들이 다 빨갱이여. 이 더운 여름날 새끼들을 거리에 내모는 게 제정신이야. 애미, 애비들부터 잡어 가둬야 돼!"

언제부터인지 옆 자리가 소란하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갑론을박하던 초로의 어른들. 중고교 학생들도 거리로 나섰다는 식당 주인 말에 격한 반응을 쏟아낸다. 이야기의 결론은 뻔하다. '이게 다 빨갱이 탓'이라는 공감대가 만들어진 뒤에야 격론은 끝났다. 

나는 나서질 못했다. 그게 아니라고,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줄 아느냐고, 칭찬은 못할망정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따지지 못했다.

너희들과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비 내리고 더운 광장에 수많은 촛불이 모였고, 너희들은 국정원 앞에서 맨 몸으로 잘못을 따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쪽에서는 빨갱이를 들먹이고, 국민 참정권을 유린한 거악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젊은 청춘들, 너희들에게 미안하다

젊은 청춘들, 너희들의 저항과 문제제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먼저, 뜨거운 여름 길거리에 나서게 해 미안하다. 도둑맞은 민주주의를 직접 찾겠다고 나서는 너희들의 당당함. 잔뜩 움츠려 사는 기성 세대로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참여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남고자 했던 나태함을 털어내고, 젊은 청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다짐.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다.

양민을 학살하고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군부 독재를 연장하고자 기존의 헌법대로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고 발표한다. '4·13 호헌 조치'였다. 직선제를 열망한 국민들의 항거는 들불처럼 일었다.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를 외치는 시민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공돌이·공순이'로 불리던 노동자들도 어깨를 걸고 나섰다. 시민들의 두 달 넘는 투쟁으로 더는 버틸 수 없던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를 수용한다. 

26년 전인 1987년 6월 항쟁 이야기다. 그 전에 대학생 박종철, 이한열 등 많은 사람이 죽고 민주화 운동을 하던 김근태, 문익환 등 수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대통령을 국민 손으로 직접 뽑는 직선제는 오랜 싸움과 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서 피어난 민주주의의 찬란한 꽃이다.

직선제 쟁취는 그 시절 거리에서 싸운 수많은 사람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직선제 쟁취 이후 여섯 번째로 치러진 지난 19대 대선.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은 국민이 힘겹게 피워낸 민주주의의 꽃을 무참히 짓밟았다. 경찰은 이를 숨기려 애썼다. 26년 전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제대로 지키지는 못한 것 같아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청소년 도보 순례단이 28일 낮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정문 앞을 지나고 있다. 경남 산청 간디고등학교 등 대안학교 학생 10여 명은 이날 국정원을 출발해 광화문까지 도보 순례를 진행했다.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청소년 도보 순례단이 28일 낮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정문 앞을 지나고 있다. 경남 산청 간디고등학교 등 대안학교 학생 10여 명은 이날 국정원을 출발해 광화문까지 도보 순례를 진행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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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진정 어린 반성도 없다. 국회에서 문제의 진상 규명을 위해 여야가 국정조사를 합의했지만, 새누리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내세워 번번히 일정을 연기시키고 있다.

국정원 기관보고 비공개를 고집한 새누리당의 억지에 며칠을 허비한 국정조사 일정. 민주당의 양보로 정상화되나 했더니 증인 출석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좌초 모드'에 돌입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증인으로 세우려면 민주당 현역 의원도 증인으로 채택하라는 새누리당의 억지. 하나를 양보하면 또 다른 하나를 달라는 식이다. 이뿐 아니다. 휴가기간이라는 이유로 교섭 실무자였던 새누리당 권선동 의원은 지역구로 내려갔고, 가족과 해외여행을 간 국정조사 위원도 있다.

민주당의 전략 부재와 무능력도 큰 문제다. 그럼에도 국정조사를 파탄낸 책임은 누가 뭐래도 새누리당에 있다.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야당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여름휴가를 떠난 새누리당 국정조사 위원들. 지탄받아 마땅하고 단죄해야 할 대상이다.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럴 수는 없다.  

안전이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항의하던 2008년 촛불은 '명박산성'을 넘지 못했다. 이후 촛불에 대한 정부의 보복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일방적인 국정운영은 5년 내낸 이어졌고, 여러 언론 등 견제 기구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많은 국민은 다시 촛불을 드는 걸 주저하고 있다.

분노했다면 참여하라!

그러나 5년 동안 겪은 두려움으로 또다시 5년을 살 수는 없다. 국회의 국정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설사 여야가 국정조사장에 마주 앉는다고 해도 어떤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국민이 구경꾼으로만 남아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기를 주저한다면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 국정원과 경찰. 이명박 정권과 여당의 지난 과오는 면죄부를 받게 될 것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은 '빨갱이들의 괜한 트집'으로 정리될 수 있다. 결국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은 언제든 또 벌어질 수 있다.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진상규명 촛불문화제'에 수많은 참가자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시청광장 가득 메운 촛불시민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진상규명 촛불문화제'에 수많은 참가자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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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전 거리에서 쟁취한 민주주의. 이제 광장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외쳐야 한다. 젊은 청춘들은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서 싸워야 하고, 나와 같은 기성세대들은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1987년 6월 항쟁의 각오로 학생과 노동자, 청년과 노인이 어깨에 손을 얹고 광장을 메워야 한다.

광장에서 젊은 청춘들을 만나고 싶다. 내 어린 딸에게 "저기 있는 오빠 언니들처럼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다. 26년 전 "호헌철폐", "직선제 개헌"을 외치던 젊은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

"분노했다면 참여하라! 참여가 세상을 바꾸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분노하라>를 쓴 스테판 에셀의 외침은 우리 모두의 절박한 숙제이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우리 모두 분노의 물결이 되자.


태그:#국정원 대선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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