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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삼국지
 여류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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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누구나 아는 작품이고, 대부분은 읽었던 작품이지만 나이가 들면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전자오락실' 같은 느낌이다. 나도 꽤 많은 <삼국지>를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언제부턴가 사마천의 <사기>가 <삼국지>보다 더 재미있었다. 유명한 작가의 <삼국지>가 출간될 때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펼쳐보긴 하지만, 역시 마음속에는 '<삼국지>를 읽기에 난 너무 커버렸어'라는 생각이 강해질 뿐이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시 쓴 삼국지>를 읽었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불만'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기자 생활을 23년째 하고 있는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수년에 걸쳐 '편작'한 <여류 삼국지>를 읽고 삼국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여류(余流)란 편작자가 스스로가 붙인 이름으로 "스스로 삶의 방식을 탐구하고 방향을 세우고 그대로 살아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여류 삼국지>는 '내 스타일의 <삼국지>'라는 뜻이다. '여류 삼국지'라는 제목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삼국지>를 네 것으로 만들었나?' 나는 <삼국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내 방식으로 읽기보다는 정사에 기대고 문학작품에 기대고, 유명 작가에게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지>의 인물들은 나의 유비가 아니라 누군가의 유비였고, 조조 역시 다른 사람의 해석을 그냥 받아들였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여류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상에 갇혀서 <삼국지>를 그저 그런 작품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삼국지 속 '황건적', 편향적인 호칭이었네

<삼국지>가 나의 것이 된다는 말이 무엇인가. <삼국지> 속의 등장인물과 편견 없이 만나고 그 인물이 돼 보는 것이다. 내가 특히 <삼국지>를 멀리하게 된 까닭은 '유비' 때문인데, 촉한정통론으로 그려진 유비의 모습은 어릴 적에는 반공사상과 맞물리면서 영웅적인 지도자로 자리 잡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유치하게 느껴질 즈음 유비는 가식적인 인물이 돼 있었다. 양선희 작가가 편작한 <여류 삼국지>에서 유비는 처세를 위해서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 명분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다양한 영웅들이 들고 일어섰지만 유비는 브랜드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현덕은 명문호족도 아니고, 도적 떼로 출발하는 군벌도 아닌 그야말로 기성세대에서 찾을 수 없는 충의와 위민이라는 신개념 의군을 창설할 뜻을 내비친다."(<여류 삼국지> 1권 42쪽 중)

유비는 끊어진 유씨 가문의 뒤를 잇는 의로운 왕족에 머무르지 않고 난세에 세상을 호령할 야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출세의 야욕을 가지고 있는 당대의 평범한 장부'라는 묘사는 인물의 현실감을 준다. 그리고 '가문의 몰락을 방어하는 왕족'은 유비의 포지셔닝이지만 개인적 야욕과 명분이 분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비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긴 까닭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유기체로 보지 않고, 신화 내지는 화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황건적에 대한 접근 역시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썼다. 장정일은 아예 황건적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서술할 정도로 대중의 분노는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황건적(黃巾賊)이 아니라 황건기의(黃巾起義)다. 양선희는 이 장면에서 균형감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장각은 군 전체가 알아주는 수재였으나 한나라 말기 타락한 등용제도 탓에 벼슬에 오르지 못한 울분에 찬 인재였다."(<여류 삼국지> 1권 32쪽 중)

<여류 삼국지>를 쓰기 위해 작가는 그 동안의 소개된 모든 <삼국지>를 검토하고 정사의 기록을 살펴 논리적 모순과 과도한 관념을 벗겨 냈다. 이 덕분에 인물과 인물의 행동은 논리적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건의 전개 역시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때문에 '벤처기업'이니 하는 현대식 용어를 편작자는 마음껏 썼지만, <삼국지> 작품과 인물들을 침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고고학자가 현대의 공법을 이용해 당시의 유물을 재현하고 정확히 설명한 느낌이 들어서 드디어 나도 <삼국지>를 재평가할 기회를 얻었다.

유비가 생각한 '기회에 대한 자세'

<삼국지>를 다시 읽으며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은 현재의 눈으로 <삼국지>를 살펴보며 지속적으로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관념이나 문헌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만 잡을 수 있다면 <삼국지>는 별 볼 일 없던 시절부터 힘을 얻고 세를 불리는 시절까지 한 인물이나 세력의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겪는 일과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을 나와 대비시킬 수 있다. 예컨대 절세의 미인 초선을 이용해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해 겨우 기회를 잡은 사도 왕윤은 허무하게 기회를 놓쳐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백성들을 끔찍한 불구덩이에 빠트린다. 역적 동탁과 개인적인 인연으로 슬픔을 표시한 기재 채옹을 죽인 점과 이각과 곽사가 표문으로 사죄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몰아친 점은 뼈아픈 패착이다.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을 때 사람들은 흥분하기 쉽고 벌써 일이 이뤄진 것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다 기회를 잃는다.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취해야 할 최선의 조치만 취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지금 내 앞에 순식간에 기회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사도 왕윤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을까. 유비가 서주를 단념한 일이 떠오른다. 유비는 서주자사 도겸이 여러 번 간청해도 취하지 않고 도겸이 임종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임시로 받는 둥 하더니 곧바로 여포에게 서주를 넘긴다. 불만이 가득한 형제들을 설득하는 유비의 말 속에는 기회에 대한 바른 자세가 엿보인다.

"몸을 굽히고, 분수를 지키며, 하늘이 주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감정에 휘말려 헛되이 목숨을 걸고 일을 도모하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아야만 하늘도 기회를 주실 수 있다. 때를 기다리자꾸나."(<여류 삼국지> 1권 375쪽 중)

축구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기회가 넘어오는 경우가 있고, 기회가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공이 굴절돼 왔을 때 허둥대지 않고 우리 편에게 연결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기회를 잃지 않는다.

유비는 약할 때를 알았으니 강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희로애락은 반복되지만 여기에 임하는 자세는 한결같다. 고대의 영윤(令尹)이라는 인물은 세 번 재상의 벼슬에 올랐는데, 벼슬을 할 때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벼슬에서 물러날 때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자기 일을 꿋꿋하게 할 뿐이다. 이런 독해가 가능한 이유는 역시 편작자의 의도에 있다. 인물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일'을 중심에 두며 독자가 하고 있는 일과 <삼국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갈마들 수 있게 만든다.

이전까지 읽었던 <삼국지>와 다른 점

사도 왕윤이 기회를 얻었을 때의 사례와 유비가 기회를 얻었을 때의 일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인물들의 행동과 이에 따른 결과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안배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두 가지 일을 떠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직접적인 편작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이각과 곽사의 일을 이야기하며 편작자는 동탁과 여포의 일을 직접 거론한다.

"양표는 자신이, 왕윤이 성공한 계책을 실행한다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당시는 동탁 한 사람만이 강력했으므로 약자들이 힘을 모아 꼼수로 이길 수 있었다. 하나 이각과 곽사는 엇비슷한 권력과 무력을 가진 자들이다. 둘이 맞붙으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은 엄청나게 터져 나가게 돼 있다. 지금은 바로 황제도 왕새우 정도였다."(<여류 삼국지> 1권 327쪽)

하나의 일을 겪은 시점과 상황 그리고 사람 등만 다를 뿐 이치는 같기 때문에 <여류 삼국지>의 사건들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고 감정이입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읽었던 <삼국지>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까닭은 사건에 대한 다각적이고 치열한 분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류 삼국지>를 읽는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나는 <삼국지> 읽기에 다시 빠져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소셜북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여류 삼국지 1 - 도원에서 천하를 꿈꾸다

양선희 엮음, 메디치미디어(2013)


태그:#여류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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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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