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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문시 강나루에서 바라본 두만강 너머의 북한땅
 중국 도문시 강나루에서 바라본 두만강 너머의 북한땅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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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는 누구일까? 1935년 <매일신보>가 '애독자가 뽑은 남자 가수 5인'을 선정했을 때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사람은 채규엽이었다. 당시 채규엽의 인기는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음악평론가 선성원은 역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를 통해 채규엽을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로 인정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 가수는 누구일까? 박찬호가 짓고 안동림이 옮긴 <한국가요사 1>은 '1930년 <유랑인의 노래>, <봄노래 부르자>를 노래하고 데뷔한 채규엽'이라고 소개한다. 즉, 선성원의 '최초의 직업 가수'와 박찬호의 '최초의 유행 가수'는 같은 의미로 쓰인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는 채규엽

채규엽은 도쿄의 주오음악학교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1928년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열었다. 그 후 1930년 서울의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의 파티에 갔다가 여흥 시간에 노래를 불렀는데, 그 회사 경성 지사장인 핸드포드로부터 조선어 유행가를 녹음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채규엽이 직접 작사, 작곡한 <유랑인의 노래>가 탄생했다.

여름 저녁 시원한 바다를 차저
일엽편쥬 둥실 띄워라 달마지 가자
저 달마지 내 가심의 이 설음 풀가
아 - 나의 일생 고향이 그립기도 하다

어이여차 놀 저라 노래 부르며
넓은 바다 푸른 물 우에 정처 업시도
흘으는 저 달빛 따라 이 몸도 함게
아 - 나의 이 배 끗치 난 데 내 고향일까

대번에 유명세를 탄 채규엽은 일본까지 건너가 하세가와 이치로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다. 이치로(一郞)는 '첫째'라는 뜻이므로, 채규엽의 일본 이름은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 최초의 조선인 가수'라는 의미였다. 일본에서 채규엽은 <술은 눈물일가 한숨이랄가> 등의 히트곡을 연달아 터뜨리며 인기를 누리다가 1933년 귀국한다.

국내로 돌아온 채규엽은 각지를 돌며 '귀향 환영 음악회'를 연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이후 1939년까지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치솟는다. 하지만 채규엽은 일제의 전시 체제를 지원하기 위해 1940년에 만들어진 관제 조직인 대정익찬회 회원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비행기 헌납 운동에 앞장서는 등 친일 행각을 벌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기도 했다.

1949년 채규엽은 삼팔선을 넘었다. 자신의 히트곡인 <봉자의 노래> 등을 만든 작곡가 이면상을 찾아 월북했다는 소문이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소문은 그가 두만강 끝 탄광으로 끌려간 뒤 횡사했다는 전언이다. <유랑인의 노래> 2절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의 고향은 두만강 끝 탄광이었던 셈인가.

두만강을 중국에서는 무엇이라 부를까? 사진 속에 답이 있다. 사진의 강 건너 풍경은 북한의 것이다.
 두만강을 중국에서는 무엇이라 부를까? 사진 속에 답이 있다. 사진의 강 건너 풍경은 북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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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애창 대중가요 1위 <눈물 젖은 두만강>

두만강이라면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장성월이라는 소녀 가수가 처음 불렀고, 김정구 노래로는 1938년 2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된 <눈물 젖은 두만강>은 지금도 '국민 애창곡'의 지위를 한껏 누리고 있다. 1981년 MBC가 개국 20주년을 기념하여 조사한 '한국인이 뽑은 가요 100곡' 중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2013년 2월 9일 밤에 방영된 KBS2-TV의 <불후의 명곡> 설 특집 방송도 <눈물 젖은 두만강>을 내보냈다. 노래는 허각.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너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든 그 배는 어디로 갓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이는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 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옛님이 보고 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두만강의 뗏목. 사진 왼쪽의 뭍은 북한 땅이다.
 두만강의 뗏목. 사진 왼쪽의 뭍은 북한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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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엽, 극단 <예원좌>는 중국 동북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극단 일행은 두만강변의 작은 도시 도문의 한 여관에 머물렀다. 여관 주인은 조선사람이었다. 여관 뜰에는 늦가을을 맞아 단풍나무가 곱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밤, 단원 중 젊은 음악가 이시우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었다. 그때 옆방에서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방에서 나와 여관 주인에게 사연을 물었다. 여관 주인은 통곡하고 있는 그 여인의 남편과 잘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여인의 남편은 독립운동가였다. 여인은 남편이 일제에 잡혀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와 남편을 면회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일제에 총살된 뒤였다.

독립운동가 남편 찾아왔지만 이미 총살형

그날 밤은 바로 남편의 생일이었다. 여인은 빈 방에서 홀로 앉아 술 한 잔 부어놓고 제사를 올리려 했다. 여관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제물을 차려왔다. 여관 주인이 만들어준 제상에 술을 붓고 난 여인은 오열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연을 알게 된 이시우의 마음도 젖어내렸다. 두만강 푸른 물과 여관 뜰의 붉게 물든 단풍이 어우러지면서 이시우의 가슴에는 선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남편을 찾아 여인이 건너온 두만강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악상을 가다듬어 노래를 만들었다. 나라 잃은 겨레의 슬픔이 물길을 이룬 채 흘러가고 있는 것만 같은 <눈물 젖은 두만강> 앞에서 그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박찬호는 이시우가 1975년 2월 22일, 서울 효창공원 뒤 만리동 언덕 위 자택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선성원은 그가 채규엽처럼 월북했다고 기록한다. 그 탓에 <눈물 젖은 두만강>이 해방 이후 금지곡으로 묶였다는 것이다.

뗏목을 타고 두만강 안으로 들어가 북한쪽에서 바라본 도문 시 강나루의 풍경
 뗏목을 타고 두만강 안으로 들어가 북한쪽에서 바라본 도문 시 강나루의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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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곡이 어떻게 국영 방송을 계속 탔을까

월북 예술가의 작품은 1987년 해금될 때까지 출판이나 방송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이지 금지곡 <눈물 젖은 두만강>은 1960년대의 KBS라디오의 반공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주제곡으로 연일 전파를 탔다. 덕분에 <눈물 젖은 두만강>은 더욱 유명해졌고, 마침내 그 노래를 부른 김정구에게는 대중가수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는 영예가 주어졌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그런데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는 <박헌영 일대기>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의 노랫말을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 썼다고 밝혔다. 1928년 8월,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 중이던 박헌영은 아내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했다. 이 탈출 사건은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당시 두만강변에 머물고 있던 김용환이 그 소식을 듣고 노랫말을 지었는데, 뒷날 노래로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시우가 월북을 했다면, 박정희 정권은 어째서 그의 노래가 국영 방송을 타는 것을 눈감아 주었을까? 또 어째서 전두환 정권은 그의 노래를 부른 김정구 가수에게 훈장을 주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눈물 젖은 두만강의 주인공은 박헌영'이라고 밝힌 임경석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헤아려지지 않는 일이다.

관광객을 태운 뗏목이 북한땅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
 관광객을 태운 뗏목이 북한땅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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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와 만주를 오가는 강나루의 뗏목

백두산 관광을 가면 흔히 두만강의 도문으로 안내된다. 중국식 한자명 도문은 우리식 두만의 다른 표기이다. 도문시 상가들은 백화문과 한글로 적힌 간판이 반반 정도로 어우러져 있다. 역시 이곳은 만주와 함경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길목이라는 이야기이다.

여기까지 와서 뗏목을 아니 탈 수는 없는 일이다. 뗏목을 타면 사공은 두만강 건너편 북한땅의 풀잎들을 손에 잡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나그네들을 데려가 준다. 감히 발을 디뎌 그 땅을 밟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 일행들도 한결같이 팔을 뻗어 강아지풀, 억새, 버드나무 등 물가에 잘 자라있는 것들을 쓰다듬는 모습이었다.

"언제 또 와서 이렇게 만져보겠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잠깐 적막이 흘렀다. 모두들 무슨 감회에 젖어 있을까. 분단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들일 것이다. 그때 목청 좋은 한 사내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두마안가앙 푸른 무울에- 노 젓는- 배앳사아아아공- 흘러가안 그 예엣날에에 내 니임을 시이이있고 떠 나아아아가안 그 배애는 어디이로 가았소- 그리운 내 니임이이여 그-리-우운 내애 니이임이여 언제나 오오려어어어나아아."

덧붙이는 글 | 본문의 내용은 선성원 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현암사), 박찬호 저, 안동림 역 <한국 가요사 1>(미지북스), 임경석 저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를 두루 참조하였음을 밝혀둡니다.



태그:#두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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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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