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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7일 오후 9시 58분 베를린의 체에슈트라쎄. 나는 S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차는 신호에 따라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앞차의 붉은 브레이크등이 꺼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신호며 브레이크등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그 다음 순간 S와 내가 본 빨간 불빛이 신호등이나 브레이크등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하고 싶어서이다.

갑자기 빨간불이 번쩍했다.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 빛이 양 옆과 뒤를 감싸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단 한 번, 순식간이었기에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 몇 걸음을 괜찮다며 애써 디뎌보이듯 나는 나도 모르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S도 무언가에 홀린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너도 봤지?"

1분여가 지난 뒤 겨우 입을 뗀 S의 첫마디였다.

이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추하기 시작했다. 폭죽이라기엔 그 빛이 하늘과 땅을 뒤덮을 만큼 거대했다. 번개라기엔 그 색깔도 그렇지만 날씨가 너무 말짱했다. 우리의 상식 내에서는 짐작이 불가능했다.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자연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스무 살 때 만난 첫사랑 S... 그와의 이별은 힘들었다

나는 이 넓디넓은 우주에 우리가 유일한 생명체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깊게 파고드는 편은 아니다. UFO를 봤다거나 외계인을 만났다는 사람 이야기도 정신 나간 소리로 여기고 귀담아 듣지 않는다. S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우리는 이 설명할 수 없는 불빛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말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허황된 또는 진부한 것이 되어버릴 테고, 상대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분위기를 전달하려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테니까.

그날 새벽까지 이야기하다 불빛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도 못내 아쉬운지 S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둘이서 같이 봤으니까 환상은 아니었겠지?"

S는 내가 스무 살 때 만난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의 마지막, 즉 유일한 사랑일 거라 믿었기에 그와의 이별은 힘들었다.

5년 동안 모든 걸 함께한 것이 너무 익숙해져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다. 그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현실에 부딪혀 사랑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을 한 내가 다시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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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러시아 인형이다. 마트료시카라고도 불리는 이 오뚝이 모양의 목각 인형은 러시아의 대표적 공예품으로 러시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들이 포개어져 있는 게 엄마가 아이를 품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다산·풍요의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저 원색의 화려한 장식을 감상하거나, 이번엔 마지막이겠지 하고 인형을 열었다가 더 작은… 더 작은… 인형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은 타이밍>으로 알려진 영화 <러시아 인형(Les Poupées Russes)>의 모티브도 바로 여기서 따왔다. 이 영화는 마트료시카의 마지막 인형을 찾아내는 것처럼 20대의 철없었던 불장난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랑을 바라는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는 내용이다.

"마지막 인형을 고대하며 우린 게임 같은 인생을 산다. 단번에 만날 순 없다.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씩 뚜껑을 열 때마다 궁금하다. 마지막일까?"

하지만 마지막이 아니라면 그 전의 인형은, 그 전의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사랑의 상처로 깨진 마음이 처음엔 공허해 보였지만 그 안엔 그 경험으로 더 작고 단단하게 뭉쳐진 내가 있었다. 그리고 마트료시카는 포개어 놓을 수도 있지만 뚜껑을 열어 안의 인형들을 꺼낸 뒤 다시 닫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란히 세워놓으면 크기는 제각각이라도 하나하나 자체로 완전한 인형이 된다. 그 모습을 보며 비록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더라도 S 자체도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S와 함께 한 기적의 순간들 중 하나. 토스카나 해변에서.
 S와 함께 한 기적의 순간들 중 하나. 토스카나 해변에서.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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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랑은 앞서 말한 빨간불을 목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주의 신비를 한순간 경험하는 것. 둘이, 함께. 그래서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의 사랑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기적의 순간을 믿는 순수와 열정으로, 그리고 그 순간을 지속시키고자하는 더 단단하고 성숙해진 마음으로 나는 다음 사랑을, 마지막 사랑을 기다리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태그:#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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