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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기르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여러가지 육아 방법도 찾아보고 선배들의 아이 키우기 비법도 들어보지만 정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최근 우리 부부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가 생겼다. 만 40개월이 넘는 아들 녀석이 아직 기저귀를 못떼고 있는 것이다. 아니 못뗀다기 보다는 안뗀다고 해야 하나? 도무지 녀석이 화장실 가기를 거부한다. 때로는 얼러도보고 야단도 쳐보지만 헛일. 매일같이 아침 저녁이면 응가를 하고 팬티를 적신다. 이럴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참 어렵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거늘, 이놈이...

우리 부부가 원칙으로 지키려는 것이 아이에게 매를 들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매란 말도 있다지만 <꽃으로라도 때리지 마라>라는 어느 책의 제목이 아니더라도 폭력으로는 아이의 버릇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판단이다. 문제는 이 녀석에게 매를 들지 않고 어떻게 좋은 버릇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단지 응가나 오줌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 약한 누나를 괴롭히기 일쑤이고 엄마나 아빠의 야단에도 콧방귀를 뀌기 예사이다.

며칠 전의 일이다.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녀석이 마루에서 쿵쾅거리며 뛰어다녔다. 아랫층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한두 차례 시끄럽다는 항의도 있던터라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새벽아. 그렇게 뛰면 안돼. 아래층 사람이 시끄럽잖아."
"아빠 메롱."

녀석은 더욱더 쿵쾅거린다. 할 수 없이 녀석을 조용히 시키려고 녀석을 잡으러 일어섰다. 그런데 요리조리 피해 잘도 뛰어 다니며 더욱더 쿵쾅거릴 뿐이다. 아빠 눈이 안 보이는 것을 아는 녀석이라 어떻게 하면 도망갈지를 알고 잘도 피해 다닌다. 조금씩 화가 치민다.

"새벽아. 뛰지 말라니까"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래도 녀석은 들은 체도 안 한다. 헤헤 거리며 안방과 거실과 화장실을 뛰어다니며 내 손아귀에 안 걸리려고 요리조리 몸을 피한다. 그러다 결국 녀석의 팔목을 잡았다. 성질대로라면 정말 한 대 콱 쥐어 박고 싶다. 녀석을 바닥에 앉히고 설명 모드로 들어갔다.

"그렇게 뛰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래층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그러나 녀석이 이내 발딱 일어선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또 콩콩콩 뛴다. 다시 녀석을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아빠 싫어."

녀석이 오히려 화를 내며 일어선다. 다시 녀석을 강제로 앉히려하자 이내 힘으로 거부하기 시작한다.

"아빠 싫어. 싫단 말이야."

녀석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이건 분명 화를 내고 있는 목소리다. 잔뜩 짜증이 묻어나는 녀석의 반응을 보자 정말 화가 치밀었다. 이러다 이 녀석 정말 버릇없어지겠다 싶어 녀석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제 녀석은 거의 발작적으로 울어 제낀다. 나도 질 수 없다 싶어 몇 차례 더욱 손바닥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때린다. 이번에는 아프라고 일부러 볼기짝의 여린 맨살을 때렸다.

그래도 녀석은 막무가내다. 악을 쓰며 아빠에게 반항한다. 그렇게 5분 정도 녀석과 씨름을 했을까? 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선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겠다고 늘 생각을 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아이를 때린 것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줄곧 반항하는 아이를 보며 "과연 내가 이 아이에게 좋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또 이렇게 매를 들다가 그만두면 오히려 더욱 아이의 버릇이 나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고…. 아무튼 온갖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아이를 때리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버렸다.

40개월 아들과의 씨름...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 메이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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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2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났다. 우리 남매들에게 절대 매를 들지 않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늘 어려웠던 아버지. 화가 나면 부지깽이던 마당을 쓸던 빗자루던 아무것이라도 우리를 때리던 어머니는 별로 안 무서웠지만 때리지도 않고 화를 특별히 내지도 않으시던 아버지는 늘 엄하고 어려웠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로 기억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5살 위에 누나가 무언가 잘못을 한 적이 있었다. 어김없이 어머니께 빗자루로 몇 대 얻어맞았고 우리는 어머니께 대들었다. 마침 그때 아버지께서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우리는 어머니께 대든 것 때문에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의 얼굴이 화가 난듯이 보였다. 그 때까지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마루로 부르시고는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제 부모에게 대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곧이어 아버지의 추상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 밖으로 나가서 자기가 잘못한 벌을 받을만큼의 회초리를 구해오너라."

누나와 나는 거의 죽을 상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어스름이 지는 저녁에 누나와 나는 온 동네를 돌아 다녔다. 서울이라지만 먹골배로 유명한 동네답게 시골 마을이었다. 회초리를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회초리가 적당한지가 우리의 고민거리였다.

어느 것은 너무 굵어서 그걸로 매를 맞았다가는 종아리가 부러질 것같기도 하고, 어느것은 너무 삭아서 똑똑 부러지는 통에 그런 회초리를 구해왔다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1시간을 넘게 동네를 헤매고 나서야 아프지 않을 것같으면서 나름 체면도 차릴 것 같은 적당한 회초리를 구했다.

마루에 앉아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집을 나설 때와 같은 자세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회초리를 보여 드렸다.

"너희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지?"

아버지의 엄한 물음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다.

"그럼 둘다 종아리를 걷어라."

우리는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울음을 삼키며 종아리를 걷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엄한 목소리가 아닌 원래의 부드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가 잘못을 인정한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되었다. 종아리 내리고 세수하고 오너라."

처음 아버지께 매를 맞을 뻔 했던 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지만 그날의 회초리를 구하러 다닌 1시간은 그 날 이후에도 늘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에도 아버지는 전혀 매를 들지 않으셨다.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야단치시곤 하였다. 

아버지처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요즘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내 아버지처럼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전혀 매를 들지 않았지만 엄하셨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언제나 인자하신 아버지. 한때는 그런 아버지에게 불만도 많았다.

1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이름표를 달았을 때의 일이다. 다른 아이들은 깨끗한 비닐로 된 문방구 이름표를 달았다. 두꺼운 비닐 안에 들어 있는 이름표는 전혀 망가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단 이름표는 두꺼운 종이에 아버지가 먹을 갈아 붓으로 글씨를 적은 것이었다. 덕분에 내 이름은 누구보다 커 보였고 비닐커버가 없는 이름표는 이내 구겨졌다.

늘 그랬다. 교과서를 받아오면 다른 아이들은 투명한 비닐 커버였지만 내 교과서 표지는 달력으로 책을 싸서 붓으로 이름을 쓴 것이었고, 친구들의 연필은 당시 유행하던 샤파 연필깎이로 매끄럽게 깎은 것인데 비해 내 연필은 아버지가 연필깎기 칼로 일일이 깎은 각이진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내 아이에게 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엊그제 아들과의 충돌로 다시금 나와 내 아버지를 돌아본다. 요즘 들어 자꾸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만약 지금까지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나에게 어떤 것이 아버지의 길인지 가르침을 주셨을텐데 말이다. 내 아버지처럼 나도 내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태그:#육아, #아버지, #회초리,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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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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