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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겉표지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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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법관과 전직 검사가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하겠다며 책을 냈다. 서강대와 경북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과 김두식 전 검사, 둘의 대담 내용을 엮은 것이다. '전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했지만, 기득권의 한복판에 서 있던 이들이 굳이 지금 꼭 해야 할 이야기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책을 펼쳐 들었다.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는 탁상머리에 앉아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교과서 수준의 대화가 오갈 것이란 선입견도 있었다. 그러나 내 선입견은 오래가지 않아 깨졌다. 프롤로그의 첫 마디를 읽으며, 이 책의 진실성과 치열한 반성에 기인한 자조적인 색채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이 몸담았던 분야에 대한 비판은 매도당하기도 쉽고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어렵다.

"물론 질적 연구의 목적이 당장 '각 잡힌 대안'을 내놓는 것은 아닙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하는 것이 질적 연구의 힘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교과서적인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본문 9쪽)

사회에 만연한 '엘리트 카르텔'

현재 우리 사회가 정의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루가 멀다고 권력형 비리가 터진다. 지겹다 못해 만성화된 부패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럴수록 국민들의 정의에 대한 갈증은 깊어진다. 두 사람의 대담은 이 갈증에 작은 물길이라도 가져다 대어 보자는 것이다.

저자들은 스스로의 경험에 비춰 상황을 진단한다. 어쩌면 불가분 관계인 법조계와 권력을 경험한 이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판사를 지낸 이의 현실적인 경험담은 박탈감과 회의감을 동시에 준다. 너무 솔직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법조 비리가 아니더라도 은연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무게추에 기울어짐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엘리트 카르텔은 사실 재판에서도 알게 모르게 작동이 되죠. 근본적으로 재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의 문제로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은 학벌이나 성장배경이 판사와 비슷해서 동일시가 일어나기도 쉬워요."(본문 77쪽)

이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니라, '유권(權)무죄 무권유죄'의 세상이 돼버렸다. 하여 이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느냐가 화두가 된다. 쥔 자가 스스로 놓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연줄사회는 넓은 의미에서 계층을 고착시키고, 좁은 의미에서 부정부패를 만들어요. 아는 사람끼리 서로 도와주고 도움 받는 것, 한 건 봐줬으면 다음에 다른 한 건은 돌려주는 식이죠. 돈이 오가느냐만 따져서는 부패를 막을 수 없어요. 돈이 오가지 않는 청탁도 많으니까요."(본문 252쪽)

시스템적인 규제의 필요성

평소 자신이 신세지던 사람이 갑자기 뭔가를 요구해 온다면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 마침 동전이 없어 자판기 커피라도 한 잔 얻어 마셨다면, 다음에는 내가 사야겠단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애초에 '엮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계획적인 접근을 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나 역시 자신이 없다.

바로 현행법의 맹점은 이런 식으로 이미 만들어진 유착관계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 문제의식은, 착한 사람들도 발을 조금만 젖게 하면 금방 온몸을 다 적시게 된다는 데에서 출발했어요. 그것을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 어떤 명목으로든 돈을 못 받도록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본문 31쪽)

따라서 김영란 교수는 국민권익위원장 재직 시절 대가성 없는 돈 자체도 주고받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이른바 '김영란법'이다. 또한 이 법은 해당 법의 제재를 받는 공직자들을 오히려 부패행위로부터 보호할 수 있으리란 취지도 담겼다.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거절하는데 구조적으로 거절할 수 없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걸 막아주면 공무원들이 다 환영할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물들다가 전체가 물들게 되는 거거든요."(본문 46쪽)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엘리트 카르텔'을 끊자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이 모든 구조가 공무원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게끔 하는 것이거든요. 결국 엘리트 카르텔을 끊게 하는 것입니다. 연줄 문화를 끊는 것이 그 다음 단계로 나가는 것이에요. 연줄 문화를 끊기 위한 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할 때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모든 게 다 연결이 되네요."(본문 316쪽)

근본적인 해결책은 의식의 전환

책에서 전반적으로 다뤄지는 담론은, 권력을 권력으로 견제하자는 주의다. 법령과 구조로 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권력이 이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민주주의의 건전한 작동으로 이어진다면 굳이 이렇게 머리를 맞대지 않아도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국민의 의식 전환이 이뤄져 사법적 처벌만이 아닌 사회적 처벌 또한 병행된다면, 우리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도 이 점을 지적하지만 대담에서 크게 할당하지는 않는다. 아쉬웠다.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접근이 더뎌서는 안 될 일이다.

막스 베버는 '적발이나 처벌이 범죄 억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공식적 사법적 처벌에 앞서 우선 공동체의 비난이나 따돌림 같은 사회적 처벌 풍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적인 규제도 시민이 권력을 감시하고자 하는 의지가 선행되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는 지적이다.

2판을 찍을 즈음에는, 우리나라가 책 제목을 이렇게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을 국가가 되기를 바라 본다. <언제든 모두가 해야 할 이야기>로 말이다.

김영란법이란 무엇?
김영란 교수가 국가권익위원장으로 재직시절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입법예고해 국회 상정을 추진했던 법이다.

주요내용으로는 ▲ 이해당사자가 제3자를 통해서 공직자에게 부정한 청탁을 하거나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공직자에게 부정청탁을 하는 경우의 처벌(제8조) ▲ 공직자가 사업자나 다른 공직자로부터 직무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더라도 100만 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수수·요구·약속하는 경우 금품제공자와 해당 공직자 모두 처벌(제11조) ▲ 신규 임용된 고위공직자가 민간부문에서 재직당시의 이해관계를 신고하고 임용 후 2년간은 해당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금지 등이 있다.

이후 법무부 측에서 '과잉금지의 원칙'을 이유로 반대하자 세 차례 수정을 거쳤다. 수정안은 처벌대상과 기준이 대폭 축소돼, 있으나 마나 한 법이 돼버렸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 수정안은 7월 초 국무회의를 통과할 경우 곧바로 국회로 넘어간다. 그러나 야당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원안 추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덧붙이는 글 |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l 김영란,김두식 지음 l 쌤앤파커스 펴냄 l 2013.05 l 1만5천원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 공정한 한국사회를 위한, 김영란.김두식의 제안

김영란.김두식 지음, 쌤앤파커스(2013)


태그:#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김영란, #김두식, #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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