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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이 용역 업체를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하는 언론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사흘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빌딩 로비에서 한국일보 기자들이 장 회장의 퇴진과 편집국 폐쇄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한국일보> 파탄주범 장재구 회장 물러나라"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이 용역 업체를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하는 언론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사흘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빌딩 로비에서 한국일보 기자들이 장 회장의 퇴진과 편집국 폐쇄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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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안돼. 너네 그거 승산없다. 내가 10년을 봤지만 경영진은 절대 안 변한다."

한국 언론 역사상 초유의 사건인 '한국일보 사측의 용역동원 편집국 폐쇄'사태가 나흘째로 접어든 지난 19일. 한 동료가 밖에서 이런 말을 듣고 와 분을 삭인다. 수년 전 <한국일보>에서 타사로 옮겨간 선배 기자가 제 딴에는 친정을 걱정한다며 야속한 냉소를 보낸 것이다. 사측이 고용한 용역에 의해 180여 명의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내쫓기고 기사 전송 아이디를 박탈당했다는 소식에 각계 인사와 독자들, 전직 사우들이 "사측에 맞서는 기자들을 지지한다"는 응원을 보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기자들에게 사측이 하나의 큰 벽인 것은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기자들이 어떻게 사주를 직접 형사고발하고 그와 싸워 이기느냐'는 회의론이 나오는 것도 맞다. 사측이 용역까지 동원하고 나선 마당이라 사태는 더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한국일보> 기자들 대다수의 마음 속에는 이런 열패감 대신 '이길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이 자리잡고 있다. 이번 사태가 노사갈등이나 노노갈등이 만든 위기가 아니라, 신문을 위해 비리를 지적하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가겠다는 기자 절대 다수의 뜻이 하나로 모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일보> 사태의 구조는 간단하다. ▲ 기자들이 '신문사 자산인 중학동 사옥 우선매수권을 처분해 개인 빚을 갚는데 사용한 혐의'로 장재구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자 ▲ 사측이 편집국장 좌천 인사를 냈고 ▲ 이에 기자들이 반발한 채 기존 체제대로 신문을 제작하자 ▲ 사측이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한 뒤 ▲ 회장과 신임 간부들의 지시를 이행하겠다는 '근로제공확약서'에 사인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후 전체 기자들의 펜을 빼앗은 채 예닐곱 간부들이 만드는 '가짜 한국일보'가 배포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참담한 현실이다.

당초 장 회장은 용역 동원 사태가 발생하기 일주일 전인 6월 7일 창간 59주년 행사에서 "현재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사원들의 의견을 청취하겠다"고 말했다. 또 "필요 시 개별 면담을 해 의견을 듣고 면담 후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원칙대로 처리하겠다"고도 말했다. 지시 거부 기자들을 무더기 징계하겠다는 뜻 아니냐며 편집국은 술렁였다. 아예 전화를 받지 말자는 말과 무슨 말을 할지 적어두자는 말들이 돌았다.

나도 당시 사측 면담에 대비해 내가 할 질문을 곱씹었다. 가만히 짚어보는데 떠오르는 항목이 생각보다 제법 많아 실소가 났다. 다 기억은 안 나지만 ▲ 사주 배임 혐의에 대한 입장 ▲ 지난해 돈을 돌려놓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 ▲ 단 한마디 설명 없이 매번 수 개월에서 1년씩 체불된 취재비와 통신비·야근수당 등의 지급 계획 따위의 것들이었다.

'기자는 열심히 취재하고 신문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일보(회장 장재구) 사측이 지난 15일 용역직원들을 동원해 편집국을 봉쇄한 가운데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빌딩 15층 한국일보 편집국 비상구 입구에서 건장한 체구의 용역들이 책상 등 사무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쌓은 채 노조원들을 막고 있다.
▲ 덩치 큰 용역이 점령한 한국일보 편집국 한국일보(회장 장재구) 사측이 지난 15일 용역직원들을 동원해 편집국을 봉쇄한 가운데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빌딩 15층 한국일보 편집국 비상구 입구에서 건장한 체구의 용역들이 책상 등 사무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쌓은 채 노조원들을 막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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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그저 열심히 취재하고 신문 잘 만드는 생각만 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사내에 자리잡은 지 오래라 모두가 오랫동안 애써 외면해 온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기왕에 직접 기자면담을 하겠다면야' 싶었다가, '아무리 그래도 경영진 면전에서 이런 말을 어떻게 하나' 싶어 혼자 질문 목록을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같은 면담은 상상에 그쳤고, 일주일 뒤인 지난 15일 밤 황당한 '용역 동원 사태'가 발생했다.

그렇게 신문사의 심장인 편집국에 <한국일보> 유니폼을 아무렇게나 구겨 입은 용역들이 진을 친 지 닷새째. 1층 로비로 내몰린 기자들은 정체성이 뿌리 뽑히고 거덜난 비통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또 하나의 고통은 평소 함께 구슬땀을 흘려가며 신문을 만들어 온 일부 선배들이 사측과 뜻을 함께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문 정상화에 폭력이 절대 동원되지 말아야 한다는 자명한 명제를 모를 리 없는 선배들이 왜 그 길을 선택했는지 나는 아직도 짐작하기 어렵다.

왜 경영 책임자들은 기자들을 피하기 바쁜데, 숱한 세월 영광과 한숨과 눈물을 공유해 온 동료들이 서로를 원망해야 하나. 명백한 잘못을 고쳐나가기 위해 우리가 왜 이처럼 '가짜 한국일보' 발행이라는 막대한 손실과 갈등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개개인의 입장이 다르겠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그들이 돌아와 함께 일하는 날을 기다릴 뿐이다.

나는 기자 양성의 요람이라는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기자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배웠다. 또 희망을 탐색하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훈련받았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한국일보> 기자들이 신문의 뿌리를 마구 파헤치는 배임의혹과 불법인사·해고·용역폭력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기준마저 버린다면 기자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가짜 한국일보'를 받아 보게된 독자들께는 한없이 송구스러운 마음이지만, 금도를 넘은 불의에 침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릴 뿐이다.

사측에 반대하는 기자에게 "안돼"를 연발한 그 전직 사우를 조만간 마주치면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내 일터가 망가져 가는 것을 방관하는 삶이야 말로 비겁한 삶이 아니냐고 말이다. 비리 의혹과 폭력에 침묵하는 기자야 말로 진짜 '안 되는 기자' 아니냐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혜영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는 2009년 <한국일보> 입사, 현재 사회부 법조팀 소속이다. 한국기자협회 제238회(제2조두순 사건 보도), 제263회(청와대 제1부속실장 저축은행 금품수수 보도), 제264회 (민주당 공천헌금 명목 금품수수사건 보도) 이달의 기자상과 법조언론인클럽 2012년 올해의 법조언론상 수상했다. 저서로는 <전관예우 비밀해제>(북콤마)가 있다.



태그:#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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