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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10만인클럽 특강 73회 - 박재동, 아버지를 말하다'가 열리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10만인클럽 특강 73회 - 박재동, 아버지를 말하다'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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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 화백의 아버지는 남달랐다. 국내 최초 SF 만화 <라이파이>(59년 발간)의 동호회 회장이었던 그의 교육관은 "자기 삶은 자기가 알아서"였다. 박 화백은 "아버지는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거나, 잔소리하지 않았다"며 "저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아버지가 된 박 화백의 생각도 이와 맞닿아 있다. "내가 하기 싫거나 하지 못한 것을 자식이 실현해주길 기대하지 말자"는 것. 그는 "네(자식) 꿈과 내(부모) 꿈을 경쟁하는 우리는 삶의 동료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박재동 아버지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10만인클럽 특강 73번째 강연(6월 11일)에서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은 아버지와의 애틋했던 기억들과 그 자신이 아버지가 된 후 좌충우돌 하며 깨달은 자식 교육의 '좌절사'를 털어놓았다. 박 화백은 90년대 <한겨레> '박재동 그림판' 연재를 통해 한 칸 만평의 진수를 선보이며 시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장본인이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 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보니...

어느덧 돌아가실 무렵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된 박 화백은 뒤늦게 아버지의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20년 가까이 쓴 일상의 기록이었다. 박 화백은 그것을 묶어 최근 책 (<아버지의 일기장> 돌배게)으로 펴냈다.

교사였던 박 화백의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교단을 떠나 부산에 터를 잡고 만화방을 운영하며 세 아이를 키웠다. 박 화백의 기억 속 아버지는 "차마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던, 보자마자 경례하듯 인사해야 했던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일상의 불의에도 단호하게 싸우고, 신문을 꼼꼼히 챙겨보는, '민주 시민' 의식이 투철했던 아버지는 그에게 먼 존재였다. 그러나 일기장을 정리하며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돌이켜 보면 어렸을 적에 제가 사용했던 스케치북이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거였어요. 송곳으로 장판을 뚫어 그렸던 그림을 보시고도 화도 안 내셨어요. 고등학생 시절 전교 꼴찌를 했을 때는 담담히 '1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는 법이지'라고 하셨어요. 일기에도 저희들 이야기로 가득해요. 아버지는 멀리서 지켜보며 묵묵히 기다려주시는 분이었지요."

정작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박 화백은 어떤 모습일까?

"딸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거리를 걷는데요. 미용실도 만두집도 다시 보이는 거예요. 그래, 우리 딸도 저런 거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제가 그동안 우리 딸은 저런 거 안 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살았던 거죠. 엘리트주의가 뿌리 깊이 박혀있었던 겁니다."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박 화백은 "딸 때문에 완전히 깨졌어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박 화백과 달리 딸의 소망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 처음에는 딸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딸의 아르바이트 근무지를 방문했는데, 사장이 "딸이 손님들한테 참 싹싹하고 잘한다"며 칭찬을 하더란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그때부터 박 화백은 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 번 뿐인 인생, 네가 태어나 좋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내 바램은 그것이다. 다만, 어딜 가든 너의 밥벌이만은 알아서 해다오."

굳이 분류하자면 박 화백은 친구 같은 아빠다. 그것의 장점은 아이들이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점. 최근에 "하고 싶은 게 마땅히 없어 보여 늘 걱정스러웠던 아들과 밤을 지새우며 가진 달콤한 대화의 시간"이 자신의 우려를 접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는데 '아, 이 아이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구나' 싶은 깨달음이 오더라구요. 그럼 된 거지 뭐. 더 걱정한다는 자체가 아들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자기가 알아서 할 건데, 내가 간섭하면 기분 나쁘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것, 은근한 관심을 유지하자, 그렇게 정리가 되었어요. 자식의 꿈을 위해 부모가 등이 굽도록 희생하는 삶은 전 시대로 족하지 않나요?"

박 화백의 기억 속 아버지는 "차마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던, 보자마자 경례하듯 인사해야 했던 무서운 사람"이었다.
 박 화백의 기억 속 아버지는 "차마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던, 보자마자 경례하듯 인사해야 했던 무서운 사람"이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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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문화요, 모든 시민이 창작자다"

박 화백의 꿈은 그림 잘 그리는 '그림쟁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요새는 버려지는 '쓰레기'에도 그림을 그리고 예술의 소재로 삼는다. 그는 강연 도중에 주머니에 있던 과자 봉지를 꺼내며 "아까워서 어떻게 버려요, 이거 하나 만드는데도 얼마나 많은 노고가 숨어있을 텐데"라고 말했다. 이어 청중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 하지만 즐긴다고 생각하는 사람?"

청중의 80%는 두 질문의 어떤 경우에도 손을 들지 못했다.

"손을 안 든 분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미술교육 12년의 결과가 '그림 못 그려서 창피해'라고 주눅들게 만든 겁니다. 제대로 된 교육이라면 '나는 못 그리더라도 즐길 수 있어'라고 여길 수 있어야죠.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북한산을 부끄러워서 못 간다'고 하지 안잖아요? 그냥 에베레스트 가는 사람이 있는 거고 북한산을 가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일상이 문화요, 모든 시민은 창작자다' 박재동의 새로운 예술선언! 그 액션플랜의 첫 번째 지침은 그림일기다. 그는 청중들에게 당장 그림일기 쓰는 것부터 실천하라고 권했다. 스케치북을 살 것도 없다. 괜히 종이가 크면 겁부터 난다. 그러니 작은 메모지, 포스트잇, 담뱃곽을 스케치북 삼으라 한다. "그림이 못 생기면 어때요? 이제는 내 그림을 평가할 미술 교사도 없잖아요(웃음)"란다.

이날 강연은 앞뒤로 특별한 시간이 있었다. 강연 전, <오마이뉴스>가 주최한 '당신의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기사 공모전에 당선된 시민기자들의 시상식이 열렸고, 강연 후에는 청중들의 케리커처를 박 화백이 일일이 그려주는 시간이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박 화백은 "좋아서 그리는 거야"라며 30여초 만에 한 장을 거침없이 그려냈다. 그는 오랜 내공으로 '마음 관상'까지 볼 수 있게 된 경지에 이르렀을까? 한 청중이 "너무 예뻐요, 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당신 내면의 얼굴이 이렇다"고 화답했다.

밤 열 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기다리던 청중들의 얼굴은 막 피어난 꽃처럼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박 화백의 꿈은 그림 잘 그리는 '그림쟁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박 화백의 꿈은 그림 잘 그리는 '그림쟁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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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재동, #10만인클럽, #아버지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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