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잘 도착했어요."
"일요일에 돌아간다더니, 이제야 도착?"
"진작 도착했어요. 여기 일이 많아요. 돌아오자마자 교육 들어가고, 바빴어요."

지난 20일 저녁, 햇수로 5년 만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귀환이주노동자 T를 만났다. T는 한국에서 십년 가까이 이주노동을 하다가 지난 2009년 초에 본국으로 자진 출국했던 사람이다. T가 한국을 다시 찾은 이유는 이주노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모 기업체 중간 관리자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교육을 받고 일요일에 귀국한다던 그가 전화를 해 왔다.

T가 지인과 식사를 하며 해후를 즐기고 있다.
▲ 5년만에 한국에 온 T T가 지인과 식사를 하며 해후를 즐기고 있다.
ⓒ 고기복

관련사진보기


불량학생, 이주노동자 되다

T는 파란만장하다는 말 한마디로 다 설명하기에 부족할 정도의 굴곡 많은 인생을 산 사람이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겨서, 부인은 고교 중퇴를 하고, 아이는 장인어른 앞으로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한 마디로 이름 꽤나 날리던 불량학생이던 T는 우여곡절 끝에 졸업은 했지만, 변변한 직장 없이 기계공으로 몇 년을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다가, 한참 붐이 일던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결심하게 된다.

T가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을 때는 한국이 IMF를 겪고 있던 때였다. 정상근무를 한다고 했을 때, 출국 전에 들인 돈을 갚는데도 빠듯했다. 그렇지만 3년 동안 매일매일 잔업과 야근, 특근을 도맡아 하면서 송출비용을 다 갚고, 고향에 밭도 사고, 집도 지을 준비를 마쳤다.

산업연수생으로 2년을 일하고 난 뒤에는 일시 귀국하기도 했었는데,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부인이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양할 가족이 한 명 더 생겼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낀 T는 산업연수생 계약이 만료된 후, 귀국해야 할 즈음에 사측으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된다.

일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T를 눈여겨 보아왔던 사장이 출국하지 말고, 회사에서 계속 일하라고 권한 것이다. 그 제안을 받고 T는 인도네시아에 있는 부인에게 한국에서 조금만 더 일하겠다고 전달한다. 그러자 부인은 "어서 돌아와요. 당장 귀국하지 않으면 도망가 버리겠어요"라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T는 결국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T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미등록이긴 했지만, 산업연수생으로 3년을 일했던 회사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고,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매달 송금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등록으로 2년을 더 일한 T는 계획했던 집이 완공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하루 빨리 귀국할 것을 요구하는 부인의 말대로 귀국을 하려고 했다. 문제는 5년간의 행복했던 순간을 뒤로 하고, 귀국을 결심할 즈음부터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T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임금체불과 이어진 불행

T가 5년간 열심히 일했던 회사는 핸드폰 케이스를 제작하는 중소업체였는데, T가 귀국 준비를 시작할 즈음부터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임금체불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귀국일자를 정한 T에게 회사 사장은 "회사가 이렇게 어려운데 귀국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회사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조금만 더 일해 달라"고 하면서 귀국을 미룰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금만 참아주면 밀린 급여와 퇴직금을 다 지급하겠다고 각서를 쓰며 약속한다. 그러자 T는 회사 경영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귀국일정을 잠시 뒤로 미루게 된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귀국 일정을 미룬 지 얼마 되지 않던 날, 출입국 단속반이 회사에 들이닥쳤고, 사장의 지시로 2층에서 뛰어내려 도망가던 T는 왼쪽 복숭아뼈가 다 으스러지고 오른발은 깁스를 해야 할 정도의 큰 사고를 당한다.

사고 당시 왼발바닥이 20㎝ 정도 벗겨졌는데, 응급처치가 늦어 지방 성분을 다 제거해야 했다. 그 결과 회복된 뒤에도 T는 예전처럼 운동을 하는데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게 2005년도의 일이었다.

출입국 단속으로 사고를 당한 T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
▲ 병원 입원 중인 T 출입국 단속으로 사고를 당한 T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
ⓒ 고기복

관련사진보기


2006년에는 콩팥 기형과 신장결석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아야 했다. 결국 2005년과 2006년은 일한 기간보다 병원과 이주노동자쉼터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이 과정에서 T는 용인이주노동자쉼터와 인도네시아공동체의 도움을 받게 되고, 아픈 몸을 추스르는 기간 동안 쉼터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인도네시아공동체 조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당시 용인이주노동자쉼터는 매일 상담이 끊이지 않았고, 일요일 같은 경우에는 쉼터 직원들이 상담 온 사람의 사연을 다 듣지 못할 정도로 상담이 많았다. 쉼터에서는 상담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초기 상담을 T를 비롯한 인도네시아공동체 리더들이 받았는데, 이를 통해 T는 이주노동자 조직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T는 2006년 4월에 자신처럼 출입국 단속을 피하다 죽은 인도네시아인 누르 푸아드(Nur Fuad)와 거의 같은 시기에 친한 친구가 기계오작동으로 직장 동료가 사망한 것을 목격하고, 외상성 스트레스 장해로 업무에 복귀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주인권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T는 수술 후, 몸이 회복된 뒤에도 쉼터에서 상담을 돕고, 인도네시아어로 번역된 문건을 쉼터를 찾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에게 회람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출입국 단속 과정에서 사망한 인도네시아인 누르 푸아드 장례식장의 T
▲ 이주노동자 장례식장 출입국 단속 과정에서 사망한 인도네시아인 누르 푸아드 장례식장의 T
ⓒ 고기복

관련사진보기


준비되지 않은 귀국, 남은 것, 하나 없어!

공동체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T가 귀국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T는 아들이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기별을 받고 부랴부랴 귀국한다. 하지만 T는 아들을 품에 안을 수는 없었고,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리고 10년 가까운 이주노동을 했던 T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산업연수생 계약 만기 때부터 귀국할 것을 종용하던 부인이 바람이 나서 집과 밭을 갖고 이혼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T는 한국에서 공동체 활동을 같이 했던 친한 친구들과 함께 전화방 사업도 해 보고, PC방도 차려보고, 폐광을 임대해서 성공을 꿈꿔 봤지만 사업 경험도 없고, 인도네시아 형편에 어두웠던 탓에 다 망하고 만다. T를 아는 사람들은 'T 곁에 있으면 다 망한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할 정도가 되었다.

그때 T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여행사에서 한국인 가이드로 일하던 지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공동체 활동을 같이 하던 쉼터 직원이었다. T는 자신이 한국어가 유창하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달리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사업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기 때문에 가이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얼마간의 가이드 생활을 하며 T는 자신이 인도네시아에서 경쟁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사람들보다 한국어가 유창할 뿐만 아니라, 십년 가까운 한국생활로 한국인들의 성격이나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T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체가 설립한 회사에 통역관으로 지원하여 취직하게 된다.


인생의 디딤돌 같았던 한국생활

되는 일이 없던 T는 통역관이 되면서 인생 역전이 시작된다. T를 통역관으로 채용했던 회사에서는 T가 회사 내에서 사람들을 잘 관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T가 한국에서 관계를 맺었던 여러 이주노동자들을 회사에 추천했는데, 그 사람들이 일을 워낙 잘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게 된다.

그 결과 회사에서는 T를 통역이 아니라 현장 중간 관리자로 인사 발령한다. 현재 80여 명의 직원들을 관리하고 있는데, 지난주에 해당 기업이 진출한 각국 공장의 관리자들과 함께 한국에서 집체 교육을 받고, 앞으로 200명이 넘는 직원들을 관리하게 된다고 한다.

십년의 이주노동을 통해 집도 짓고, 밭도 사고, 자식들도 키울 것을 꿈꿨지만, 가진 것 한 푼 없이 집을 나서야 했던 사람이, 곁에 있으면 망한다는 소리를 들을 지경에도 이르렀던 사람이, 어지간한 기업체 사장 못지않은 직원들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T는 이제 한국에서 인연을 맺었던 친구들의 귀환 후 재정착을 돕기 위해 직장을 알아봐 줄 정도로 삶에 여유가 생겼다.

인도네시아 공동체와 함께 노동절 행사에서 행진하고 있는 T
▲ 노동절 행사에 참석한 T 인도네시아 공동체와 함께 노동절 행사에서 행진하고 있는 T
ⓒ 고기복

관련사진보기


T는 산업연수생으로 공장에서 일할 때와 처음 쉼터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한국어를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공동체 교육을 위한 자료집이 쉼터에서 나오면 그 번역본이 잘 됐는지 회람하고, 기초 상담을 할 때 역시 한국어가 필요할 때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쉼터 한국어교실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공부하면서도 한국어가 자신의 인생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십년 이주노동에서 남은 것은 결국 한국어 실력 밖에 없었고, 그게 현재 자신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이 한국에서 공동체 활동을 활발히 할 때 함께 했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T는 자신이 한국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낼 때, 귀국해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은 인도네시아공동체였고, 쉼터였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힘들어 할 때, 함께 해 줬던 인도네시아 공동체, 쉼터와 당신이 제 평생의 디딤돌이 되었어요. 한국에서의 경험은 제 인생의 디딤돌이죠."

T는 우리와 같은 동시대를 살며 아픔과 슬픔, 기쁨과 행복을 똑같이 느끼고 경험하는 우리 시대 사람이었다. 그의 고백은 이주노동에 명암이 있을 수 있고, 그 명암 여부는 곁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태그:#이주노동자, #인도네시아공동체, #귀환, #출입국단속, #한국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