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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켄과 프란치스코 교회

다음날 버스를 타고 어제 멈추었던 곳으로 돌아와서 남쪽으로 향했다. 어제의 숲길과는 달리 좌우로 아기자기한 독일식 집들 사이로 길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내가 걸어가는 지역의 이름은 슈타켄(Staaken), 베를린의 최서단지역이다.

원래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때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해 조성된 정원도시(Gartenstadt)이다. 그래서인지 왼쪽 편을 보면 2층 4가구 주택 집이 다닥다닥 붙어서 길게 늘어서 있다. 어떤 집은 곡선으로도 이어져 있었는데, 마치 군용막사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일부 집의 경우 역사적 가치가 있어서 기념물로 남았지만, 아직 상당수의 집에서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왼쪽 편을 보면 2층 집들이 길게 붙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조의 집들은 20세기 초반 노동자들을 위한 거주지역이다. 현재는 리모델링이 되어서 겉은 막사 같지만 속을 보면 평범한 가정집이다.
▲ 슈타켄의 집 왼쪽 편을 보면 2층 집들이 길게 붙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조의 집들은 20세기 초반 노동자들을 위한 거주지역이다. 현재는 리모델링이 되어서 겉은 막사 같지만 속을 보면 평범한 가정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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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슈타켄은 독일 피겨의 전설 카타리나 비트(Katarina Witt)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그녀가 태어난 지역은 동독에 속한 지역이었다. 즉 내가 걸어가는 길에서 약간 동쪽 부근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장벽이 세워진 지 겨우 4년이 넘어선 시점이었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장벽과 시대와의 간발의 차이로 그녀는 동독 피겨국가대표 선수로 지내게 되었다.

피겨 스케이팅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연아 선수의 활약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특이하게도 김연아 선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인 80년대에도 동계 올림픽이 열리면 피겨 스케이팅을 절대 빠지지 않고 시청하셨다. 그 중에서도 주목했던 선수는 카타리나 비트. 현재도 유튜브에 그녀의 피겨 연기가 올라와 있는데, 지금 봐도 카리스마적인 연기가 매우 돋보인다. 피겨 역사에 조예가 있으신 분이라면, 그녀는 올림픽 2연패를 한 몇 안 되는 선수라는 것을 아실 것이다. 김연아 선수가 바로 소치 올림픽에서 카타리나 비트의 아성에 도전하는데 꼭 성공했으면 한다.

마을을 지나가보면 오른편에 공터와 주황색 푯대가 보인다. 이곳은 바로 교회 터. 장벽으로 인해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이름은 프란치스코 교회. 냉전시대에 이 교회는 바로 국경근처에 있었기에 이 교회를 섬기던 목사님의 사무실은 강제로 서베를린으로 옮겨졌다. 또한 교회마저 이전을 했기 때문에 결국 방치되고 말았다. 보통 독일교회처럼 파이프 오르간과 목사님 강단 그리고 성도들을 위한 교회 특유의 기다란 의자가 있었지만, 관리 부실로 인해 교회는 점점 폐허화됐다.

주황색 푯대와 잔디공터가 옛 교회의 역사를 말해준다.
▲ 구 프란치스코 교회 공터 주황색 푯대와 잔디공터가 옛 교회의 역사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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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교회는 1987년 동독정부에 의해 철거되는 운명을 맞는다. 교회역사가 100여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벽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즉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경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 교회를 통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정권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본 이곳 주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켜주지 못해 너무나 미안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회뿐만 아니라 장벽 건축으로 인해 역사적 시설이 많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조상들의 소중한 유산들이 방치되고 파괴되어간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철마는 장벽시대에도 달렸다

교회 터를 나서고 조금 걸어가다 보면 철도가 나온다.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철로인데,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자면 헤이그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들이 1907년에 만국평화회의를 참석하기 위해 지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장벽시대에 서베를린에서 동독으로 가는 철도는 끊겨 있었나요?

우리나라와는 달리 철마는 장벽시대에도 달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설명한 고속도로 검문소처럼 서베를린이나 서독 주민이 국경근처 역에 도착하면 동독 경찰이 열차에서 신분증을 체크하게 된다. 만약 동독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서독으로 바로 가는 경우라면, 통행료와 신분증만 지참하면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

동독 지역으로 가는 경우 지난 번 고속도로 편에서 설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자를 미리 받은 후 지정될 기일 내까지 머무를 수 있었다. 반면 동독주민들에게 서독여행은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 서베를린에서 사셨던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국경을 통과할 때 플랫폼에 서 있는 동독 군인들과 군견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하셨고, 경계가 매우 삼엄했다고 언급하셨다.

단지 차이는 플랫폼에 주둔했던 동독 군인의 유무일 뿐
▲ 철마는 달렸고 지금도 달린다. 단지 차이는 플랫폼에 주둔했던 동독 군인의 유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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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이러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경의선 철도와 동해선 철도를 부분 연결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것이다. 당시에는 남북이 화해의 길로 갈 수 있는 신호탄으로 보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으로 남북관계는 냉각되었고, 두 철도의 운행은 2008년에 중단되고 만다. 아직까지 남북이 이 문제를 푸는 길은 너무 요원해 보인다. 언제쯤 철도를 타고 중국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 갈 수 있을까?

교회 앞 십자가: 슈타켄. 1961년 분단, 1990년 통합. 단순한 글귀지만 이곳 토박이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의미있는 말이다.
 교회 앞 십자가: 슈타켄. 1961년 분단, 1990년 통합. 단순한 글귀지만 이곳 토박이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의미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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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지나고 나니 새롭게 지어진 교회가 눈에 띄었다. 마치 1987년도에 무너진 프란치스코 교회의 한을 풀어주는 건물이라고 해야 할까.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아담한 독일교회였다. 교회 앞에 십자가는 슈타켄의 역사를 말해주는데,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슈타켄은 오늘날과 같이 통합된 구역이 아니라 서베를린 지역과 브란덴부르크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통합되고 나서도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교회 서쪽으로는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는 반면, 교회 동쪽으로는 거의 잔디밭 공터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인지 슈타켄이 통합된 것은 장벽이 붕괴된 1989년이 아닌 실제 독일통일이 이루어진 1990년이라고 십자가에 새겨져 있다.

교회 앞에 작은 십자가가 있는데, 1951년에 분열되었고 1990년에 통일되었다고 적혀있다.
▲ 작고 아담한 슈타켄 교회 교회 앞에 작은 십자가가 있는데, 1951년에 분열되었고 1990년에 통일되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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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나서고 나니 드넓은 들판길이 다시금 펼쳐졌다. 화창한 날씨에다가 탁 트여서 그런지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지난 2011년 여름에 베를린 장벽길 160여km를 한 달간 도보로 답사하였다.



태그:#베를린장벽길, #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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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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