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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영 교수와 수강생들이 군산선 마지막 통근열차 영상을 감상하고 있다.
 김민영 교수와 수강생들이 군산선 마지막 통근열차 영상을 감상하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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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화) 오후 7시 전북 군산시 영화동 평생학습관 3층 강당에서 열린 '群山學'(군산학: 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제2기 세 번째 강좌에서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김민영 교수는 '민족과 애환을 함께해온 지역의 철도들'이란 주제로 강의를 펼쳤다.

강의에 앞서 김 교수와 수강생들은 군산-전주를 운행해 온 세 칸짜리 꼬마통근열차의 마지막 3일 모습과 새벽마다 서는 군산역 광장 도깨비시장 풍경, 왕복 차비 1400원(경로우대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시골 할머니 상인들, 군산역 매표원 강미혜씨 인터뷰 등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상을 감상했다.

삼국시대부터 해상 물류유통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군산의 근대사는 개항과 함께 시작되는데, 묘하게도 한국의 철도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군산 개항일은 1899년 5월 1일이고, 이 땅에 첫 기적을 울린 경인선(노량진-제물포) 철도가 그해 9월 18일 개통된 것.

1912년 3월 6일 개통된 군산선(24.7km)은 치욕적인 국권침탈(1910)과 함께 일제가 호남평야 농산물을 착취하기 위해 호남선과 연결할 목적으로 부설한 철도로, 증기기관차, 비둘기호, 통일호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95년 동안 운행하다가 2007년 12월 31일 밤 10시 25분 군산발 익산행 열차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의 치밀한 공작과 강압으로 개통된 '호남선'

 호남선이 개통하는 과정을 강의하는 김 교수
 호남선이 개통하는 과정을 강의하는 김 교수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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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선 건설이 대두하기 시작한 시기는 프랑스가 경의선·경원선 철도와 함께 부설권을 한국 정부에 요구한 1896년부터로 전해진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목포 사이를 연결한다 해서 '경목철도'라 불렀는데, 프랑스 요구에 대항해 다른 열강들도 눈독을 들였으나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열강들의 경목철도 부설권 요구를 거절하고, 1898년 6월 정부가 직접 건설할 것을 결의한 뒤 이를 프랑스·영국·일본 등 각국 공사에 통보한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와 호남지방 일본인들은 부설권 획득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공작을 펼친다.

1899년 봄 한국 정부는 자력 건설계획을 거듭 확인하고, 1904년 5월 호남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충남 직산에서 강경·군산에 이르는 철도와 공주, 목포 사이의 철도부설권을 철도원에 청원한다. 한편 일본은 거대자본이 소요되는 사업이어서 불가능하리라 판단하고 자본을 빌려줘 부설권을 매수하려는 계략을 구사한다.

호남선을 자력으로 건설하려 했던 한국의 꿈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물거품이 된다. 김 교수는 "일본 정부와 군산, 목포에 거주하는 일인들이 호남선 부설에 집착했던 이유는 경부선과 경영상 경쟁의 위치에 있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호남선을 경부선과 연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제는 을사늑약(1905) 이후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는 물론 내정까지도 심하게 간섭하는데, 군사상 중대한 의미가 있는 철도 건설을 개인에게 허가함은 부당하니 그 인가를 취소하라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한국 정부는 결국 호남철도주식회사의 특허권을 취소하고, 1909년 5월 보상금으로 12만 9000여 원(圓)을 지급한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유역 곡창지대를 횡단하는 호남선 본선(261.5km)은 대전에서 출발하여 가수원-두계-논산-강경-이리-김제-광주-송정리-영산포를 지나 종착역 목포에 이르며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인 1910년 10월 공사에 착수하여 1914년 1월 완공됐다.

군산선 개통과 지역 경제·사회적 변화

 일제강점기 군산항. 부두 노무자들이 쌀을 배에 옮겨 싣고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항. 부두 노무자들이 쌀을 배에 옮겨 싣고 있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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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개설한 군산선이 지역 경제사회에 끼친 영향을 여객 수송, 쌀, 가마니 등 화물 수송 확대, 인구 증가와 역세권 확장, 새로운 운송기구 발달, 건축사적 의미, 군산-장항을 잇는 금강철교 건설 운동과 장항선 조기 추진 등으로 분류했다.

1912년 군산역 개통 당시 각각 6만 명을 웃돌았던 승하차 인원은 10년 뒤인 1922년 연인원 각각 20만 명을 넘어선다. 특히 태평양전쟁 시기인 1943년에는 승하차 연인원이 각각 60만 명을 넘어서며 개통 이래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한다. 이러한 여객 수송은 해방 이후에도 크게 줄지 않아 승하차 연인원은 각각 50만 명을 넘나든다. 

군산역 소화물 도착과 발송도 점차 늘어 1940년경 최고치에 이른다. 1912년 3만 톤을 시작으로 전시하인 1940년경 합계 40만 톤을 웃돌아 절정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화물은 시대별로 편차를 나타내는데, 1920년대까지는 소금, 면포, 콩깻묵, 석탄 등이 많았다. 1930년대에 들어 비료가, 전쟁이 치열해지는 1930년대 후반에는 군용품이 늘어 주목된다.

한국 국유철도 전체 쌀(벼 포함) 수송량은 1911년 7만 6759톤, 1919년 34만 5444톤, 1929년 69만 5180톤, 1938년 108만 7383톤으로, 1911년에 비해 각각 4.5배, 9.1배, 14.2배씩 증가한다. 식민지 시대 말기 쌀 수송은 초기보다 14배 정도 늘어났는데, 증가 폭이 가장 컸던 해는 1915년, 1919년, 1927년, 1931년, 1933년, 1937년 전후였다.

특히 군산항의 쌀 반출은 부산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다. 철도편으로 군산에 도착하는 쌀의 양은 1916년 4만 톤을 넘어, 1927년 15만 톤, 1933년 20만 톤을 넘기면서 최고에 이른다. 특히 산미 증식 계획기간에 쌀이 대거 군산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일본으로의 쌀 반출이 그만큼 왕성했기 때문이었다.

 평양역과 같은 설계로 지어졌다는 군산역 전경.
 평양역과 같은 설계로 지어졌다는 군산역 전경.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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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역사(驛舍)들을 검토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는데, 군산역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역사들은 표준 설계에 의한 일본의 전통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게 김 교수 시각. 평면 형태는 대부분 직사각형으로 일본의 전통 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군산 역사(1912년)와 목포 역사(1913년), 원산 역사(1914년) 등이 해당된다고.

군산선 개통으로 군산은 점차 역세권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한다. 역이 들어서고 20년이 지난 1932년 역세권 인구가 10만 명을 웃도는데, 당시 군산 인구를 고려하면 놀라운 숫자였다. 직업도 농업에서 상업과 도시 서비스업 및 공업의 비중이 상당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공장이 40개를 넘어서고, 그 가운데 정미업이 12개를 차지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군산역의 마지막 일본인 역무원 '쓰루 세츠오'씨 

  군산역 역무원 변화 통계. 1944년까지 소화 19년으로 표기돼 있다.
 군산역 역무원 변화 통계. 1944년까지 소화 19년으로 표기돼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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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군산역 마지막 일본인 역무원 쓰루 세츠오(鶴節雄)씨 증언을 소개해서 관심을 모았다. 1927년 군산에서 태어난 쓰루씨는 군산우체국에 다니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하면서 가정이 어려워졌으며 18세 때 군산역에 근무했는데, 월급은 40엔, 역장은 100엔이었다 한다. 당시 주요 화물은 쌀과 잡화 등.

쓰루씨는 해방 후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군산역에 남아 일인들 귀국을 돕다가 그해 12월 15일 마지막 귀향행렬에 끼어 군산을 떠났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국철에 취직하고, 자위대 7년 근무, 제대 뒤 자동차 정비회사 운영 등 정착하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현재는 별다른 직업 없이 노년을 보내면서 군산시 '통상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일본기업 한국 유치에 노력을 기울이는 쓰루 씨는 해방정국에서 많은 일인이 한국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했고, 귀국해서는 일본인들로부터 미묘한 차별이 심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군산역 통계에서도 격세지감을 느꼈다. 1912년에서 1925년까지는 대정(大正)으로, 1926년 이후엔 소화(昭和)로 적었다가 해방되는 1945년부터 서기(西紀)로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엔 단기(檀紀)로 표기했기 때문. 역무원도 1912년 모두 19명으로 출발, 1922년 26명, 1932년 28명, 1942년 57명, 1946년 74명으로 해마다 증가하였다.

시민의 종합 인문교양교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군산학은 작년 하반기엔 개항 이전 군산의 역사, 문화 등을 다뤘으며 지난 3월 26일 개강한 2차 과정은 개항 이후 군산의 역사, 경제, 음식문화 등 다채로운 주제로 6월 11일까지 12강좌를 운영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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