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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신청을 하지 못할까. 나는 순간적으로 이곳에서 수업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 말라가대학 자연과학대학 앞 수강신청을 하지 못할까. 나는 순간적으로 이곳에서 수업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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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신청을 못 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말라가(Málaga) 대학 국제처. 수강신청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에 수강신청을 받아주지 못하겠다는 직원 앞에서 난 무릎을 꿇을 준비가 돼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스페인어 단어를 짜내고 있던 찰나, 직원이 말했다.

"다음 주에 다시 오세요. 못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연장기간까지 수강신청 받습니다."

아휴. 속을 쓸어내렸다. 조기 귀국은 면했구나 싶었다. 그때가 오후 두 시, 나를 마지막으로 대학 국제처 사무실은 문을 닫았다. 터덜터덜 걸어서 건물 밖으로 나오니, 독일에서 온 교환학생 친구가 보였다. 수강신청을 하러 가는 길이라 했다. 아마 나처럼 'Cita Matriculation(수강신청 시간예약)'의 존재를 모르고 사무실에 온 모양이다. 일단, 문 닫았다고 했다. 독일 남자라서 그런지 평소에 무척 차분한 것 같던 그 친구가 그렇게 길길이 뛰는 건 처음 봤다.

"아, 정말! 이곳 사람들은 너무 심해. 게으르고 생각이 없어! 왜 인터넷으로 처리 안 해줘?"

나도 동감. 함께 길길이 뛰며 직원들을 욕했다. 아까는 급해서 그냥 감사하기만 했는데,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니 화가 난다. 당장 오후에만 사무실을 연다면 내가 집에 갔다가 다음 주에 또 와야 하는 수고를 또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여기선 그래야 한다. 이들의 시에스타(la siesta, 남유럽의 낮잠시간) 문화 때문이다.

일을 미루기 싫어도 미루게 되는 아이러니...

얼마 전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경제위기를 맞은 스페인에서 관공서의 시에스타를 폐지했다.'

지난 4분기 스페인의 실업률은 26%에 달했고, 이곳 말라가는 실업률이 35%(약 27만 5천 명)에 달했다. 유럽 경제위기의 어두운 한 단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일터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문을 닫는다.

평일 오후 세시 경. 말라가 시내 한복판. 사람들은 거닐고 있으나 가게와 은행에는 불이 꺼져있다
▲ 문 닫은 시내 중심가 평일 오후 세시 경. 말라가 시내 한복판. 사람들은 거닐고 있으나 가게와 은행에는 불이 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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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고 생글생글한 게 이곳 사람들 특성이라지만, 시에스타 시간에 문 닫는 것만큼은 용납 없다. 바로 그저께, 시내의 휴대폰 통신사를 갈 일이 있었다. 한국의 비싼 로밍요금보다 싸고, 유럽 전역에서 로밍돼 많은 교환학생이 애용하는 통신사다. 한국이었다면 도로 앞에 판촉물을 늘어놓고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현란한 광고를 했을 테다. 정말, 이젠 한국의 그곳이 그립기까지 하다. 오후 두 시 즈음 가게 앞에 선 순간, 날 기다렸다는듯이 철망이 죽 내려가고 불이 딱 꺼지는 데 당해보지 않은 한국인은 모른다.

하루 계획이 꼬인다. 저녁에 할 일이 있는데 미루기 싫어도 일을 내일로 미뤄야 한다. 분명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시간은 3시간이 비는데... 그 시간에는 무언가를 살 수도 없다. 재래시장이나 일부 가게는 아예 2시에 닫아 다음날까지 열지 않기도 한다. 그저 헛웃음만 난다. 다행이라면 그래도 커피가게나 식당은 문을 연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 시간에 햇살과 여유를 즐기며 음식을 음미하고 커피를 마신다. 나라고 다를까. 가끔은 '별수 없지~' 하면서 지중해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놀기도 했다.

너는 아프더라도 나는 시에스타를 즐겨야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만일 몸이 성치 않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에 처음 오면 다들 한 번씩 아프다. 물 때문에 위장을 부여잡고 지사제를 찾거나, 갑자기 변한 기후에 감기가 걸리기도 한다. 난 좀 더 독특하다. 지난 2월, 난 여기서 썩어가던 사랑니를 뺐다. 비용이 좀 많이 들었지만, 겨우 치과를 찾아서 이를 뺐다. 다행히 치통을 극복했다.

하지만 이를 뽑고 진통제를 약국에서 구해야 했는데, 하필 이를 뽑고 병원을 나온 그 시각은 오후 두 시였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마취가 풀리기 전에 약국에 가서 처방전(약 이름이 적힌 쪽지)를 들이밀고 빨리 내 진통제를 갖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집 앞에 가니 약국이 철창을 닫고 불을 끄고 있던 것.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으나 모든 약국이 나를 절망케 했다. 24시간 여는 약국은 시내에 있었으나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몸이 너무 아팠다. 기어이 마취가 풀린 후인 5시, 끔찍한 고통을 견뎌가며 피 흐르는 솜을 물고 약국에 가서 약을 구해야 했다.

시에스타에도 불구하고 문을 여는 약국. 하지만 당장 이를 뽑고 나니 여기까지 올 엄두가 안났다.
▲ 센트로(시내 중심)의 24시간 약국 시에스타에도 불구하고 문을 여는 약국. 하지만 당장 이를 뽑고 나니 여기까지 올 엄두가 안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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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얼마나 아팠던지.
▲ 사랑니를 뽑은 치과 당시에는 얼마나 아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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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도 약국이지만 은행도 문제다. 말라가에 사는 대다수 한국 교환학생은 시티은행을 애용한다. ATM 수수료가 1달러만 붙어 가장 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점은 시내에 하나밖에 없는데다가 ATM 기계도 애매한 위치에 있다. 바로 은행 안쪽 문과 가장 바깥 문 사이 공간에 있다. 가끔은 바깥문이 열려있기도 한데, 대개 은행 영업시간 외에는 문이 잠겨있다. 즉 평일 다섯 시가 아닌, 두 시에 문을 잠근다.

정말 문제는, 당장 월말에 집값을 현금으로 내야 할 때다. 늦게까지 스페인의 뜨거운 밤을 즐기다 그날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난다면 그냥 사단이 나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막대한 수수료와 함께 다른 은행의 ATM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시에스타가 사라지지 말았으면...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이유가 있을 터. 이곳의 태양은 너무 뜨겁다. 4월인 지금 기온은 18도에서 20도를 육박하고, 더위를 타는 난 반소매에 겉옷 하나만 걸치고 다니지만, 몸이 뜨끈뜨끈해진다. 시에스타는 이곳 사람들이 태양을 이기는 방식일 테다. 그렇게 여유를 부린 후, 밤이 되면 축제를 즐긴다.

대낮에도
▲ 5시 경 집 앞에서 대낮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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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벽까지, 그들은 축제를 즐긴다. 사진은 마리아상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 새벽 세시 집 앞에서 그리고 새벽까지, 그들은 축제를 즐긴다. 사진은 마리아상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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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마지막 주는 말라가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세마나 산타(부활절 주간, Semana santa) 기간이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놀기 좋아하는 '안달루시안(안달루시아 지방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부활절 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집 바로 앞 도로에서 새벽 세시가 되도록 시 정부에서 준비한 퍼레이드 소리로 시끄러웠다. 집 앞 베란다에서 인파를 피해 느긋하게 아래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운치 있다. 그리고 다음날 시에스타 시간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저녁에 다시 나와 퍼레이드를 하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 한국인들에게는 춘곤증을 이겨내면서라도 한창 일에 매달릴 시간이다. 한국 사회는 보다 능률적이고 성실한 삶, 일을 되도록 많이 잘해 성공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추구한다. 반면에 내 생각에 스페인 사회는 인생을 보다 건강하게 잘 즐기는 걸 좋은 삶으로 추구하는 것 같았다. 물론 가끔은 성질나고 서럽기도 하지만, 없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시에스타가 없는 스페인은 즐기지 않는 스페인, 다시 말해 '스페인'이 아니게 될 것 같으니까.

2월 초 축제 때. 경제위기에 위기를 겪고 있어도 이들의 축제가 계속될 수 있기를.
 2월 초 축제 때. 경제위기에 위기를 겪고 있어도 이들의 축제가 계속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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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알림] 개인 사정으로 인해 1주 연재를 쉬었습니다. 사전 언급 없이 연재를 못해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음부턴 이 같은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또바기미디어(http://ddobagimedia.tistory.com)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말라가, #교환학생, #시에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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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씁니다. 세상을 봅니다. http://ddoba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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