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들어가는 말


"탕! 탕! 탕! 탕!"

서울 한복판 경교장에서 한낮 정적을 깨뜨리는 네 발의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그날은 1949년 6월 26일 일요일로 초여름치고는 무더웠고, 경교장 일대는 도심답지 않게 고즈넉했다.

그날 정오가 조금 지난 12시 34 분 무렵, 육군 정복 차림의 안두희 소위는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향하여 미제 45구경 권총 방아쇠를 네 차례나 당겼다. 네 발의 총알은 김구의 얼굴과 목·가슴, 그리고 아랫배를 관통했고, 그 가운데 두 발은 집무실 유리창도 꿰뚫었다. 또한 그 총알은 백성들의 간장을 찢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민족정기에 움푹한 생채기를 남겼다.

그날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날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암살범 안두희를 둘러싼 백범 시해사건 배후는 아직도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동안 시계 제로의 컴컴한 암흑 속에서도 암살범을 끈질기게 추적 응징하고, 그 진상을 밝히고자 고군분투한 의인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김용희·곽태영·권중희·박기서씨 등이다.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지만 나는 기록자로 2003년부터 곽태영·권중희·박기서씨를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김구 선생 곁을 지킨 선우진 비서도. 그뿐 아니라 오마이뉴스 여러 누리꾼의 성원으로 4천여만 원의 성금을 모아 백범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하여 2004년 1월 31일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40여 일간 다녀오기도 했다.

이제 그 10주년을 맞아 지난 달 하순에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나는 이 책을 그때 성금을 보내준 일천여 누리꾼과 오마이뉴스 올드팬에게 바치면서 백범 김구 선생 암살사건에 얽힌 진상과 그 뒷이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연재한다.


백범 김구 선생 만년의 모습.
 백범 김구 선생 만년의 모습.
ⓒ 백범기념관

관련사진보기


"Kim Koo, former Presid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China - whose reputation as a patriot had been won partly through his success at exterminating unpopular Japanese - died from four shots of Korean army officer's American pistol at about 12:20 p.m on June 26th. The whole country was stunned and horrified at the news."

"6월 26일 오후 12시 20분경,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한국 육군 장교(소위)가 쏜 미제 권총 네 발을 맞고 사망했다. 김구가 애국자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일본인 요인 암살에 성공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의 저격 소식에 전국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 미육군 정보문서(Army Intelligence Documents) 1949년 7월 11일자 전문 427호(문서번호 895.00/7-1149)

전날 밤

사건 전날인 1949년 6월 25일 밤, 김구는 잠을 쉬 이루지 못했다. 그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먼저 그날 김구는 공주에서 열릴 건국실천원양성소 10기 개교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 양성소는 김구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이미 경찰에서 집회 허가도 났다. 그런데 행사 전날인 6월 24일 경찰에서 갑자기 집회 허가가 취소되었다고 경교장으로 연락이 왔다. 김구는 그 일에 몹시 불쾌해 했다.

'이제는 우남(雩南, 이승만의 호)이 내 발마저도 묶어 놓으려는 것인가….'

그날 밤 김구는 늦도록 불도 켜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김구는 그 얼마 전부터 측근들이 경교장 주변에 떠도는 괴이한 풍문을 전하며 몸조심하라고 이르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매번 웃어넘겼다. 하지만 마냥 속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런 풍문을 전한 측근들의 얼굴이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랐다.

그 얼마 전 임정 때부터 동지였던 조소앙이 일부러 경교장으로 찾아왔다. 2층 집무실에서 단둘이 마주 앉자 조소앙은 김구에게 신변을 조심하라고 각별히 당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얼마 전에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주고받은 얘기를 전했다.

백범 시해 직후 거실에 모신 모습.
 백범 시해 직후 거실에 모신 모습.
ⓒ 백범 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이승만의 경고 메시지

"소앙, 백범이 공산당과 내통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각하,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 내가 알기로는 그 소문이 틀림없는 것 같아.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잘되어 가나 연구를 해야 할 텐데…. 백범이 공산당과 내통을 한다면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이 가만히 두고만 있지 않을 게야."
"……"
"아무래도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으니 이참에 백범이 조심해야 할 게야."

노회한 이승만은 조소앙을 통해 김구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김구는 조소앙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소앙 아우님, 내가 무슨 일을 한다고 우남이 해치겠소. 나는 이제 은퇴한 정객이나 다름이 없는데."
"백범장,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남은 꺼진 불도 다시 밟을지 모르지요. 예로부터 권력욕에 빠지면 부자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야 이제 죽어도 한이 없는 사람이오. 중국에서도 몇 번은 죽은 목숨 아니오."
"백범장, 우리가 한가하게 이런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언제 우리 한 몸 잘되자고 독립운동을 하였습니까? 백범장은 혼자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왜놈들에게는 맞아 죽을 일을 했어도, 내 동포가 나를 죽일 일은 하지 않았소. 소앙 아우님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아닙니다. 백범장! 그런 말씀 마세요. 우남은 보통 단수가 높지 않습니다. 번번이 당하시고도."

조소앙은 백범이 자기 말을 귀담아 듣지 않자 다소 역정이 났다. 하지만 이런 경고의 말에도 백범 특유의 태연자약한 풍모에 새삼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났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순수하고 대범할 수 있을까. 하긴 저 담대함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 되었지. 그래서 사분오열된 임시정부를 봉합했고, 중국에서도 사선을 숱하게 넘었을 테지. 역시 백범은 큰 그릇이야.'

"백범장, 아무튼 매사 조심하십시오."

조소앙은 아무래도 시절이 수상한 데다 뭔가 예감이 이상하여 일부로 찾아왔다고 말했다.

"소앙 아우님, 아무튼 고맙소. 자주 경교장에 들러 내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들려주시오."
"네, 그러지요. 백범장, 아무쪼록 부디 옥체 조심하십시오."
"잘 알겠소."

조소앙은 경교장을 떠나면서도 백범 언저리에 드리운 뭔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또 다른 불길한 정보

이날(6월 25일) 초저녁에 박동엽과 김승학이 매우 다급하게 경교장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 모두 김구의 측근이었다. 그 시간은 해거름 때로 어둑했는데 김구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집무실 남향 창가에서 숭덕학사 야학생들에게 졸업선물로 보낼 <백범일지>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박동엽과 김승학은 불을 켜고 그 일을 옆에서 거들어 준 다음 박승엽은 감정을 삭인 채 조용히 말씀드렸다.

"선생님, 요새 무슨 불길한 얘기를 들으신 일이 없으십니까?"
"뭐, 별로 없는데."

박동엽은 김승학과 함께 그가 들은 백범 암살 계획을 전했다. 장은산 포병사령관은 백범 암살 행동대장으로 오병순 소위를 지명했다. 곧 오 소위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친구인 육군 소령인 김정진에게 그 음모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김정진은 은사인 박동엽에게 몰래 그 사실을 전하면서 한독당 홍종만도 행동대와 한통속이라고 귀띔했다.

그가 전한 바, 1949년 6월 23일 밤 11시 30분 무렵 서대문 충정로 동양극장 앞 경교장 어귀에서 속도를 줄인 두 대 지프차가 무엇을 노리다가 사라졌다. 그 이튿날 밤 행동대원들은 계동 중앙학교 옆 아지트에 모여 다음날 김구의 공주행 때 실행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6월 25일, 행동대원 일당은 수원의 병점 고갯마루 길목에서 김구 일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공주에서 열릴 건국실천원양성소 개교식이 갑작스럽게 취소되는 바람에 김구 일행이 나타나지 않자 그들은 헛걸음을 쳤다. 그날 밤 육군 포병사령관 장은산은 행동대원들에게 다음날인 6월 26일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김구를 살해하라고 다시 지령했다.

박동엽과 김승학은 이런 음모를 김구에게 전하면서 이참에 아예 며칠 병원에 입원해 있을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김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태연했다.

"내 전부터 유언(流言, 떠도는 말)을 한두 번 듣지 않았네. 나는 왜놈이라면 몰라도 동족에게 해를 당할 일을 하지 않았네. 멀쩡한 사람이 왜 입원을 하나. 괜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 나라 잘될 일이나 연구해 보시게."

박동엽과 김승학은 자기들의 권유에도 초연한 김구의 태도에 섭섭하고 불안했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아들 김신을 별도로 만나 김정진의 제보를 전하면서 아버지의 신변안전을 신신당부했다.

'설마, 우남이 나를….'
'우남이, 그럴 리가 없어.'

김구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을 뒤척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명은 재천인 거다

그날 밤 쉬 잠을 못 이룬 것은 김구만이 아니었다. 아들 김신 소령도 마찬가지였다. 김신은 소속부대인 육군 항공대로부터 이튿날 아침 일찍 옹진전투에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집을 비우게 되면 아버지 신변이 염려스러웠다.

그즈음 김신의 귀에도 '김구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 '김구를 해치려는 행동대가 조직되었다'는 등, 결코 한 귀로 흘릴 수 없는 흉측한 풍문이 꼬리를 이었다. 그런데 이날 밤에는 박동엽과 김승학에게 대단히 신빙성 있는 음모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표지. 위 사진은 남북연석회의 때 연설하는 김구, 아래 사진은 김구 시해 소식을 듣고 경교장에 몰려든 시민들의 통곡하는 모습을 안두희가 쏜 총알로 경교장 거실 깨진 유리창을 통해 본 것이다.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표지. 위 사진은 남북연석회의 때 연설하는 김구, 아래 사진은 김구 시해 소식을 듣고 경교장에 몰려든 시민들의 통곡하는 모습을 안두희가 쏜 총알로 경교장 거실 깨진 유리창을 통해 본 것이다.
ⓒ 백범기념관,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김신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고 아버지 침실로 갔다. 김구는 그때까지도 컴컴한 방안 의자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었다.

"오늘 따라 잠이 오지 않는구나."
"아버님, 요즘 좋지 않은 소문도 들려오는데, 이참에 요양도 하실 겸 당분간 병원에 입원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김구는 아들의 권유에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아비 목숨은 독립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나라에 바쳤다. 아비 걱정 말고, 네 군무에나 충실해라. 인명은 재천인 거야."

잠시 후 생각을 가다듬은 김구는 아주 결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버님, 이즈음 소문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왠지 불길합니다."
"내 조국 땅에서 누가 나에게 위해를 가하겠느냐."
"하지만 아버님, 매사에 조심하시고, 앞으로는 가능한 바깥출입도 삼가십시오."
"그래, 잘 알았다. 어서 가 자거라. 너 내일 새벽에 옹진으로 떠난다지?"

"네, 아버님. 이제 그만 주무십시오."

"잘 알았다. 너도 그만 자거라."
"네, 아버님. 편히 주무십시오."

그날따라 김신은 웬일인지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설마, 우남이… 그럴 리가 없어. 모두들 잘못 들은 괜한 풍문일 거야. 우남과 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김구는 불편한 마음을 다독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사건 전날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태그:#백범, #암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